내 친구 데이비드에 대하여 (하)

오늘의 책: <신이 쉼표를 넣은 곳에 마침표를 찍지 말라- 류시화>

by 이제은





마음이 쿵쾅쿵쾅 거리고 도무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잠을 자려고 누워도 그 순간으로 자꾸만 되돌아갔다. 후회는 아니었다. 다만 안타까웠다. 나 스스로도, 데이비드도. 그 상황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피할 수 있었더라면 좋았겠지만 분명 언젠가는 마주했어야 한 것이란 것을 알고 있었기에 어느 정도 덤덤했다.



다음날은 다른 곳으로 일을 나갔기 때문에 데이비드를 만나지 않았다. 어쩌면 다행이다 속으로 생각했다. 이왕이면 어제 부딪히길 잘했다 싶기도 했다. 단순히 나도 데이비드도 시간이 필요한 것일지도 몰랐으니 말이다. 홀로 고뇌하는 시간이.


마음이란 것이 현실에만 머무른다면 훨씬 수월하겠지만 마음에는 경계선이 없다. 이리저리 과거로 미래로 또 현재로 정신없이 끊임없이 움직인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가라앉히는 것뿐. 깊은숨으로 묵직하게 눌러내리는 것뿐.



다음날 아침 데이비드를 마주했다. 아니, 데이비드의 뒷모습과 마주했다. 아침부터 분주히 움직이는 그를 지나치며 짧게 인사를 건넸다. 그 정도 여유는 생겼으니. 그도 고개를 휙 돌려 나를 향해 짧게 인사를 건넸다. 그도 그 정도 여유가 생겼나 보다.


이날 아침도 어김없이 일은 바빴고 데이비드와 딱히 마주칠 세 없이 일에만 몰두했다. 내심 안도했다. 그렇게 조금은 편한 마음으로 오피스에 들어가는데 데이비드와 딱 마주쳤다. 오피스 안에는 그와 나뿐이었다. 순간 문을 닫아야 하나 고민했지만 문은 알아서 '자연스럽게' 닫혔다.



순간 짧은 정적이 흘렀다. 어디에 시선을 두어야 할지 몰라 그의 손에 들린 상자를 바라보았다. 갈색 종이 상자에는 동그란 원들이 그려져 있었다. 내가 말없이 물끄러미 상자를 바라보자 그가 먼저 상자를 책상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해피 밸런타인데이"


내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와 상자를 번갈아가며 쳐다보자 그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서둘러 상자를 열어보였다. 그 안에는 초콜릿이 듬뿍 얹힌 하트 모양의 도넛, 블루베리들이 박힌 보라색 도넛 등등 다양한 도넛들이 들어있었다.


"땡큐" 나는 일단 고맙다고 말했다. 고마운 것은 고마운 것이니까. 그리고 도넛들은 잘못이 없으니까. 다시 한번 정적이 흘렀다. 이번에도 어디에 시선을 두어야 할지 고민하다가 문쪽으로 향하는 그의 발걸음을 보곤 말이 먼저 튀어나왔다.



"다른... 할 말은 없어?"



그리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는 그를 바라보았다. 정확히 그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마음속으로는 아차 싶었다. 순간 어디서 용기가 났는지. 왜 이럴 때만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건지. 불안감이 엄습했다. 혹시 돌이킬 수 없는 대화로, 관계로 이어질까 싶어 겁이 났다.



다시 그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미세하게 떨리는 눈동자들이 그를 대신해 나에게 그도 얼마나 당황했는지 알려주는 듯했다. 우리 둘은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다. 낯선 그의 표정이 나 또한 동요시키기 시작했다. 나는 차라리 그가 왈칵 울어버리 어떻게 될까 순간 상상했다. 요 며칠 아니 지난주, 지지난주, 지난달도 그 전 달도 감정이 메말라 보였던 그가 갑자기 울어버린다면... 오히려 마음이 놓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그도 폭발할 수 있다는 뜻이니까. 감정이 남아있다는 뜻이니까.


그의 시선이 나에게서 오른쪽 천장으로 향했다. 그는 생각에 빠진 듯했다. 더 이상 이 침묵을 참기가 버거워진 내가 먼저 문고리를 향해 손을 뻗으며 말했다. "원하지 않으면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러나 내 손이 문고리에 닿기 전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나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썹을 살짝 덮을 정도의 검은 앞머리는 차분했고 곧 그의 두 눈동자도 이내 차분함을 되찾았다. 그는 시선을 상자에 고정시킨 채 조용히 말하기 시작했다. "최근에 일이 너무 바빠져서 정신이 없었어. 해야 할 일들은 너무 많은데 혼자서 해야 했거든... 다." 그러고 보니 지난주에 직원 한 명이 개인 사정으로 일을 나오지 못했었다. 그리고 그 직원의 일은 모두 데이비드의 몫이 되었다. 이미 많은 일들 위에 또 일들이 위태롭게 얹힌 셈이었다.


그는 짧은 한숨을 내쉬곤 이어 말했다. "그래서..." 다시 짧은 침묵이 흘렀다. 굳게 닫힌 그의 입을 바라보는 내 주먹진 손에서도 땀이 나기 시작했다. 나는 기다렸다. 그가 준비가 될 때까지.



"미안." 그가 말했다. 이번에는 나를 똑바로 응시하며.



우리는 종이 상자를 가운데 두고 한동안 말없이 상자 안의 도넛들을 바라보았다. 표현을 하는 것이 서투른 우리들의 어색함을 달래주듯 달콤한 도넛들의 향기가 코끝을 간질였다. 내 마음 한구석도 함께.






데이비드는

내 친구이자

선배이자

상사이다.


나는 데이비드를 보며, 데이비드를 통해 나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조금 더 알게 되었다. 어릴 적부터 막연히 어떤 사람들을 동경하며 그들처럼 되기를 소망하고 노력했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행복해질 수 있다고 굳게 믿어왔다. 열심히 자기 계발서들을 읽고 메모해가며 실천해왔고 그 노력이 전부 헛된 것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항상 끊임없이 갈망하고 있었다. 채워질 듯하면서 결코 채워지지 않는 이 갈증과 해소되지 않는 욕구는 무엇인지, 잠이 안 오는 많은 밤들을 생각에 빠져 지새웠다. 생각이 많다는 것이 때론 괴로움으로 다가왔다. 단순하게 살고 싶었다. 깊게 생각하지 않고 그저 주어진 길에 만족하며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으니까.



그렇게 생각해오던 내게 나와 비슷한 데이비드와의 부딪힘은 지금껏 내가 만들어온, 정성스레 쌓아 올려온 나의 오랜 가치관을 송두리째 흔들어놓았다. 나는 스스로에게 많은 질문들을 던졌다.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지금의 나는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의 모습인지. 또한 내가 살아온 길이 앞으로 내가 살아가고 싶은 길인지. 이 수많은 질문들에 대한 답은 하나였다.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기 위해 오랜 세월 수많은 추구자가 수많은 실험을 하고 수많은 길을 시도해 왔다. 모든 길은 혼을 담아 여행을 하면 언젠가는 진리로 데려다준다. 겉모습에 홀려 누군가를 따르는 사람은 결국 길을 잃을 뿐 아니라 그 누군가에게 문제가 있다고 원망하며 길 잃은 자신을 합리화한다. 사람을 따르지 말고 그 사람이 걷는 길을 따라야 한다.

< 신이 쉼표를 넣은 곳에 마침표를 찍지 말라, 류시화 >



그렇다. 지금껏 나는 내가 동경하는 사람들을 따르는 삶을 살아왔었다. 그들처럼 되고 싶은 열망에 불타올라 번쩍이다가 사그라들기를 반복하며 내 안의 갈망은 더 커져만 갔다. 그러던 차에 데이비드를 다시 만나고 그를 바라보면서 느꼈던 감정들은 과연 호기심이었을까, 안타까움이었을까, 아니면 연민이었을까. 그를 향한 동시에 나 스스로를 향한 연민.


그의 미안하다는 한마디가 그동안 내 마음 한가운데에 딱딱하게 얼어붙었던 무거운 얼음덩어리와 부딪혀 큰 파동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 파동은 결국 그 얼음덩어리를 쪼개고 부수었다. 남은 것은 없었다. 모든 물은 증발해서 구름의 일부가 되어버렸다. 마음이 구름처럼 가벼워졌다.


나는 이제 어느 정도 확신이 생겼다.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은 내 친구 데이비드가 걷는 길과 결코 다르지 않다는 것을. 올드 소울을 가진 외로운 왕, 데이비드. 그가 홀로 견뎌온 그 시간 동안 그는 참 많은 것들을 이루어냈다. 단지 병원을 운영하는 것을 넘어서 그만의 가치관이 살아 숨 쉬는 '공간'을 창조해내었으니 말이다. 명함의 글자 색부터 시작해서 병원 전체를 아울러서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것들은 없다. 모두 그가 많은 날들 쏟아부은 그의 시간의 흔적인 셈이다.


그 흔적에서 나는 그의 고요한 고뇌의 시간을 느낄 수 있었다. 외로움을 벗 삼아 자신의 꿈을 현실로 만들어 낸 자랑스러운 내 친구 데이비드. 그가 걸어온 길을 따라 걸어간다면 언젠가는 그와 나란히 걸을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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