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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ris Apr 28. 2023

서프라이즈

며칠 전에 있었던 일이다.


남편 J가 한밤 중에 지갑을 차에 두고 온 것 같다면서 차에 갔다온다고 했다. 외출했다가 막 돌아온 참이라 밖에서 잃어버린 건 아니냐고 내가 물었더니 J는 운전할 때 뒷주머니에서 지갑이 느껴졌으니 차 시트에 흘린 게 확실하다면서 얼른 다녀오겠다고 대답했다.  외출의 여파로 에너지가 다한 나는 J가 나간 사이 쇼파에 널브러져 쉬고 있었다.

근데 얼마 안 가 현관문 밖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한동안 수상한 택배 기사가 우리 집에 배달하는 것도 아니면서 굳이 우리 집까지 와서 현관문 비밀번호 패드를 누르는 사건이 계속 됐었기에 또 그놈인가 싶어 귀를 쫑끗 세웠다. 그러다 초인종이 울려 카메라를 보니 J였다. 가끔 초인종을 누르는 귀여운 애교를 부리는 J가 또 장난을 치는 것이었다.


“그냥 열고 들어오지…”


하필 유난히 피곤한 날에 이런 장난을 치다니. 궁시렁거리면서 무거운 몸을 일으켜 세우고 현관문을 열었다. 근데 J가 문을 잡지 못 하고 서 있어서 J의 손을 바라봤더니 손에는 와인병과 와인잔, 장미 한 송이와 와인과 곁들여 먹을 치즈가 들려있었다. 순간, 어디서 본 것 같은 익숙한 장면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과거의 한 순간을 떠올랐다.




바로 우리가 연애를 시작하기로 한 첫날이었다. 유학 시절, 당시 친구였던 J와 밤새 수다를 떨다가 덜컥 내게 사귀자며 고백한 J에게 난 새침하게 “나중에 대답해줄게”라고 대답했었다. 그후로도 한참 대화를 나누다가 새벽에 집에 돌아가는 J를 배웅하며 시간을 끄는 게 어쩐지 좀 미안한 마음도 들고, 애매한 기간을 오래 끄는 걸 싫어하는 성미에 마음이 동해 충동적으로 “그래. 사귀자.”라고 대답해버렸다. 신이 난 J는 활짝 미소를 지으며 성큼 나한테 다가와 아무말 없이 양손으로 내 얼굴을 감싸고 가볍게 입에 뽀뽀를 했다.

온화한 성격의 J가 보일 만한 행동이 아니라 깜짝 놀란 내가 “뭐야”라며 투정 섞인 반응을 보였지만, J는 아랑곳 않고 웃으며 말했다.


“저녁에 올게. 그때 봐.”


그리고 그날 저녁, J는 정말로 와인 한 병, 치즈, 일회용 와인잔, 그리고 새빨간 장미 한 송이를 들고 우리 집 현관에 다시 나타났다. 그날 우리는 와인을 마시며 또 긴 대화를 나눴다.




이날의 기억은 우리에게 소중한 추억이라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간간히 꺼내보았고, 그 덕에 오랜 세월에도 지워지지 않고 생생하게 살아남았다. 하지만 결혼한 지도 꽤 지난 지금은 사귄 날을 크게 기념하진 않았다. 그저 집에서 와인 한잔하거나 그도 여의치 않으면 “오늘 그날이더라.”라고 언급만 하고 지나가곤 했다.


근데 올해 나는 이날을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새로운 거래체에 대한 생각과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와의 약속으로 머리가 가득차 있어서라고 핑계를 대고 싶지만, 당일 뿐만이 아니라 한 달 전에도 아예 생각도 못 했던 건 올해가 처음이었다. 우리는 예상 가능한 걸 좋아하기 때문에 서프라이즈한 감동은 좀처럼 없는 편이지만, 이번 서프라이즈는 감동적이었다. 아마도 난 전혀 생각하지도 못 했는데, 남편이 진심 어린 편지까지 써줬기 때문에 더 그랬던 것 같다.


나를 만나기 전엔 건더기 하나 없는 국밥 같은 인생이었다면 나를 만난 이후의 삶은 한우가 듬뿍 들어간 국밥에 최고급 까눌레를 디저트로 먹는 것과 같다는 먹보들만이 공감할 수 있는 표현의 러브레터라니.


다음 날 아침, J는 느즈막히 일어난 날 위해 맥모닝 신메뉴를 포장해오는 것으로 서프라이즈의 마무리를 찍었다. 마치 우리의 1일을 기념하며 와인을 마신 다음날에 우리가 좋아하는 미국식 차이니즈 식당에서 볶음밥을 사다줬던 그날처럼.


서프라이즈를 받은 나는 소중한 날을 새까맣게 잊어버린 와이프를 기쁘게 해주겠다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순수한 마음에 대한 고마움과 망각의 죄책감으로 우리의 데이트는 하루 미루고, J의 농구 모임을 허락해줬다.


이로써 모두가 행복한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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