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그런 날이 있다
유난히 재수 없는 날, 뭘 해도 안 되는 날, 이렇게까지 재수가 나쁘다고? 싶을 정도로 헛웃음 날만한 날.
나는 코스타리카에서 그런 날을 보낸 적이 있다
코스타리카에서 살 때의 이야기다.
교환학생으로 멕시코행이 결정되고, 하나씩 하나씩 정리하며 코스타리카를 떠날 준비를 하고 있을 때쯤이다. 멕시코로 떠나는 것은 1월 중순쯤으로 예정되어 있었고, 살고 있던 집 계약은 12월 말에 만료되었기 때문에 재계약을 하지 않고, 대신 멕시코로 떠나는 1월 중순까지 잠시 살만한 곳을 물색하고 있었다. 친한 친구가 초등학생 아들 방을 내줄 테니 와서 있으라고 했지만 결혼한 친구의 집에 들어가서 신세 지는 게 옳은 일은 아닌듯해 돌려 거절했다. 그러자 친구는 그럼 어차피 1월 초에는 본인 가족 전체가 고향집을 방문할 예정이니 (러시아) 5일 정도는 편하게 와있는 건 어떻겠냐고 해서 어차피 비게 될 집, 빈 집 봐주는 셈 치고 잠시 머물기로 했다. 그 전 후로는 에어비앤비를 통해 잠시 있을만한 저렴한 거처를 구해놓고, 5일 정도는 친구 집에 있게 되었다.
12월 말에는 컨테이너로 만든 저렴한 에어비앤비에서 지내고, 1월이 되자마자 다시 짐을 바리바리 싸들고 친구 집으로 향했다. 정리할만한 살림살이는 다 정리했다고 하지만 그래도 멕시코에 가져갈 짐을 다 들고 다녔으니 그 양이 어마어마했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캐리어 큰 것 두 개, 중간 것 하나, 작은 캐리어 하나에 큰 가방까지 있었다. 그 많은 짐을 싸고 옮기는 것만으로도 기진맥진해 친구 집에 짐을 다 옮겨놓고 나서는 맥을 못 추고 늘어져있었다.
때는 1월 1일, 가족과 친구들과 보내야 하는 연초에 혼자 빈집에 덩그러니 뻗어있으려니 서글퍼졌다. 기운을 차리고 잠시 집 구경을 했다. 집구석구석마다 단란하고 행복한 가족의 흔적들이 묻어있어 행복한 친구를 생각하니 기분이 잠시 좋았다가, 또 나는 혼자라는 생각이 들어 외로워졌다. 외롭고 슬펐다. 뭐 어쨌든 사람은 외롭든 안 외롭든 슬프든 행복하든 밥은 먹어야 한다. 친구는 집에 있는 건 아무거나 꺼내먹으라고 했지만 어쨌든 잠깐 머무는 입장에서 아무거나 꺼내먹기도 영 어색했다. 배달을 시킬까 하고 대충 배달앱을 살펴봤지만 1년의 첫날에는 연 곳이 거의 없었다. 지나오면서 본 중국집은 열려있던 것이 생각나 차를 타고 갈까 하다가, 유턴하고 주차하는 게 더 일일 것 같아 걸어가기로 했다. 500m쯤 걷자 다 닫혀있는 식당가에, 혼자 영업하고 있는 중국집이 보였다. 코스타리카는 중국사람 (중국인 후손)이 정말 많고, 중국식당도 정말 많다. 그리고 중국사람들은 365일 영업을 한다. 크리스마스도, 1월 1일도 예외는 아니다. 양은 많고, 맛은 없는 저녁식사를 하고 카드를 내밀자 계산대에 앉아있던 주인이 중국어 억양이 잔뜩 묻어나는 스페인어로 이렇게 말했다.
"저희는 카드 안 받아, 500미터쯤 가면 ATM기 있어. 현금 뽑아와 현금, 캐시!"
세상에 안 그래도 맛없는 저녁식사를 눈물과 꾹꾹 씹어 삼키느라 체할까 했는데, 마침 운동이 필요한 참인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어쩌겠는가, 새해를 무전취식으로 시작할게 아니라면 또 걸어가서 현금 뽑아와야지. 왜 하필 오늘 슬리퍼를 신고 나왔는지. 또 터벅터벅 집 반대방향으로 걸어 ATM기를 찾아 카드를 넣고 현금을 찾았다. 현금이 나오고 이제 카드가 나올 차례인데, 어라? 카드가 나올 생각을 안 한다. 캔슬 버튼도 한참 눌러보고, 종료 버튼도 눌러봐도 홈 화면만 나올 뿐 내 카드를 뱉어내질 않는다. ATM기에 적힌 번호로 전화하자 고객센터에서 내 사정을 듣고 이렇게 말했다
"ATM기가 에러가 난 것 같은데 오늘은 1월 1일이라 보낼 수 있는 사람이 없고요, 카드사에 전화하셔서 카드 분실 신고하셔야 될 것 같은데... 그게 혹시라도 나중에 다시 나올 수도 있거든요 그걸 주워서 다른 사람이 쓰면 안 되니까..."
기계가 내 카드를 먹은 건 내 잘못이 아닌데 왜 내가 카드를 분실신고를 하고 다시 재발급을 하는 수고를 해야 하나라는 마음에 억울한 것도 잠시, 하필 ATM기가 먹은 카드가 코스타리카 국내 카드도 아니고 니카라과에서 발급받았던 해외 카드였던 것이 생각났다. 그리고 그 생각이 나자마자 식은땀이 등 뒤로 또로록 흘렀다. 쉽지 않은 밤이 되겠구나, 라는 직감에 눈을 감았다. 코스타리카 국내 발행 카드가 아니라 해외 카드라 분실신고도 재발급 요청도 국제전화로 니카라과 해당 은행 고객센터에 전화해서 해야만 했다. 그이 미 밤이 내려앉은 코스타리카 길거리에 쪼그리고 앉아 고객센터에 전화를 걸었다. 국제전화요금은 요금대로 나오고, 연결도 매끄럽지 않아 꽤 시간이 걸렸다.
"네 고객님, 그럼 현재 코스타리카에서 카드 사용 중에 분실하신 거죠?"
"아니요 제가 분실한 게 아니라 ATM 기계가 먹은 건데요..."
"네 고객님, 그런 경우에도 도난이나 다른 특이 사유가 아니라 분실이라고 봐서 수수료가 발생하는데요, 괜찮으신가요?"
"ATM 기계가 훔쳐갔다고 보면 안 될까요...?"
"ATM 기계를 상대로 절도 신고를 하시고 경찰서 경위서를 제출하시지 않는 이상 그건 좀 힘들 것 같아요"
"분실 신고로 진행해주시고 재발급 신청도 해주세요..."
현금을 갖고 또 터벅터벅 식당에 돌아가 값을 치르고 다시 집까지 걸어가는데 눈물이 또 나고 훌쩍 코가 막혔다. 터벅터벅 가로등이 외롭게 비추는 길을 걸었다. 별로 걸을 일 없을 줄 알고 슬리퍼 신고 나왔는데, 생각보다 식당이 멀었고, 길은 좋지 않았고, 의도치 않게 ATM기까지 걸어갔다 와야 했으며, 슬리퍼는 점점 발목을 타고 올라왔다.
집에 도착하고 그냥 쓰러져 자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으나, 친구 집 침대 기도 하고, 땀도 많이 흘려 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오늘 나 정말 수고 많았다, 쉽지 않은 하루였다, 그래도 다 잘 해결됐으니 잘 됐다 생각하며 주섬주섬 옷을 벗어 개어놓고 샤워실에 들어가 물을 틀었다. 따뜻한 물이 하루의 피곤을 다 씻어내 주는 듯했다. 한참 따뜻한 물 앞에 서있다가 머리에 샴푸칠을 하고 더듬더듬 샤워 수도꼭지 (수전)를 찾아 물을 틀었는데...
수도꼭지가 그대로 벽에서 뽑혔다
벽면 부착형이었던 수도꼭지가 문자 그대로 벽에서 뽑혔다. 얼떨떨했다. 수도꼭지가 벽에서 뜯겨 나오듯이 아예 뽑혀버렸다. 아니 이게 어떻게 뽑히지, 이게 왜? 이게 왜 뽑히지?라는 생각과 동시에 실 웃음이 났다. 운명에게도 목이 있다면 목을 졸라버리고 싶다고 한 게 베토벤이었던가? 뽑혀 나온 수도꼭지를 내 손에 들고 바라보며 수도꼭지의 목을 조르고 싶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 공기가 무겁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수도꼭지를 손에 들고 멍하니 서서 물을 맞았다. 떨어지는 물이 수돗물인지 눈물인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이제 수도꼭지 없이 물을 어떻게 잠글지 고민해봐야 했다.
아니 수도꼭지 없이 물을 어떻게 잠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없어 손으로 대충 샤워기를 막아보려다 콩쥐팥쥐에 나오는 두꺼비 같다는 생각이 들어 실소했다. 잠깐 웃다가 정신을 다시 잡고 일단 대충 몸을 닦았다. 머리카락도 제대로 털지 못하고 대충 둘둘 말아 머리 위에 얹고 집 밖으로 나와 수도밸브가 있는지 대충 둘러봤는데 아무래도 이미 어두워진 후라 찾는 게 쉽지 않았다. 물은 콸콸콸 쏟아지고 있고, 잠글 수 있는 장치는 안 보이고, 한숨 푹 쉬고 단지 입구에 있는 경비 사무소로 뛰어갔다. 나는 서럽고 억울한 마음에 축 쳐진 목소리로 수도밸브 찾는 것 좀 도와달라고 했는데, 경비 아저씨들은 내가 설명하는 자총 지종을 듣자마자 하하 웃었다.
"샤워기 수도꼭지를 뽑았다고요? 대단한데요?"
"그런 거 아니에요... 도와주세요..."
"아까는 슬리퍼 발목까지 올려 신고 터덜터덜 들어오더니 이번엔 샤워기 수도꼭지를 뽑으셨어요?"
"놀리실 거예요 도와주실 거예요?"
"하하하 도와줄게요"
경비 아저씨들의 도움으로 수도를 겨우 잠그고, 샤워기 수도꼭지도 대충 밀어 넣었더니 어느 정도 수습이 됐다. 다음날이라도 수리공이 와서 봐줬으면 했지만 때는 1월 1일, 코스타리카에서는 아무도 일을 하지 않는 날이었다. 화장실이 하나 더 있어서 내가 있는 동안 샤워나 기타 용무에는 문제가 없지만 어쨌든 객이 집안 재산을 하나 해 먹었다는 게 문제였다. 덕분에 내 친구는 러시아에서 돌아오자마자 샤워기를 고쳐야 하게 됐다.
다시 정신을 부여잡고 친구에게 보낼 메시지를 썼다.
'친구야 미안한데 내가 샤워실 수도꼭지를 뽑았어... 이게 어떻게 된 거냐면... 내가 오늘 중국집에 저녁을 먹으러 갔는데...'
'뽑히라는 카드는 안 뽑히고 샤워기가 뽑혔어...'
그리고 드디어, 잠자리에 들었다.
길고 길었던 하루가... 끝났다.
제목은 운수 나쁜 날이라고 썼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운수 좋은 날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물론 객관적으로 봤을 때 그날 귀찮은 일들이 한 번에 몰려서 일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충분히 좋은 일들도 있었다. 나에게는 본인의 부재에도 흔쾌히 집을 내줄 좋은 친구가 있다는 것을 실감했고, ATM기는 다행히 현금인출 후에 에러가 나서 저녁식사값은 무사히 치를 수 있었다. 길거리를 그렇게 오래 걸었지만 아무 일도 없었고, 무엇보다 외로움과 우울감과 함께 잠들지 않았다. 그날 하루에 일어났던 모든 일들이 얼마나 정신없었던지, 덕분에 외롭다는 생각을 할 새도 없었다. 내가 좋아했던 웹툰 작가는 종종 끝에 이렇게 적었다 "실소도 웃음입니다" 실소도 웃음이라면 나는 그날 많이 웃었다. 많이 웃은 날이라면, 충분히 좋은 날이었다.
코스타리카 버전 재수 좋은 날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