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국산달동네박물관, 다시 달빛을 품다

특별기획 / 굿모닝인천 2026년 3월호 Vol 387

수도국산달동네박물관,

다시 달빛을 품다


‘도시 외곽의 산등성이나 산비탈 등 비교적 높은 지대에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동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달동네를 이렇게 정의한다. 사전적 정의만 놓고 보면

‘산동네’가 맞다. 그러나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그곳을 산동네 대신 달동네라고 불렀다.

왜 산이 아닌 달일까. 그리고 해나 별, 은하 등 그 수많은 천체 중에서

달은 왜 유독 가난한 동네를 상징하는 비공식 접두어가 됐을까.

전국에서 유일하게 ‘달동네’란 단어를 품은 박물관이 우리 시에 있다.

최근 재개관한 ‘수도국산달동네박물관’이다. 수도국산 언덕 끝자락에서 마주한

이 공간에서 그 질문의 실마리를 찾아봤다.


글. 임성훈 본지 편집장 사진. 김성재 포토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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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jpg 위에서 바라본 수도국산달동네박물관
3.jpg 1960~1970년대 수도국산달동네의 모습을 재현한 전시실

다시 비추는 달빛


수도국산달동네박물관이 위치한 인천시 동구 송현동 163번지 일원. 인천 사람들은 이곳을 ‘수도국산’이라 부른다. 수도국산은 ‘수도국이 있는 산’이라는 뜻이다. 수도국산이란 이름은 구한말인 1910년 상수도 배수지와 이를 관리하는 수도국이 설치되면서 생겨났다. 이 산의 옛 이름은 만수산(萬壽山) 또는 송림산(松林山)이었다.


수도국산에 본격적으로 동네가 형성된 것은 개항기 이후로 전해진다. 개항초기 일본인들에게 쫓겨난 주민들이 모여 살기 시작했고 이어 6·25전쟁 이후에는 이북 피란민과 충청·호남 지역에서 올라온 노동자들이 둥지를 틀었다.


수도국산은 우리나라에서 대표적인 ‘달동네’로 꼽힐 정도로 주거환경이 열악했다. 그도 그럴 것이 5만 5천여평의 산비탈에 3천여 가구의 낡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폭 1m가량에 불과한 좁은 길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어 손수레조차 제대로 다닐 수 없었다. 5일째 물이 나오지 않자 주민들이 줄지어 동네 아래로 물통을 들고 내려가 급수차에서 물을 받는 진풍경이 벌어진 적도 있었다.


이처럼 서민들의 애환이 깃든 수도국산 달동네는 1990년대 후반 재개발 사업이 추진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제는 2005년 개관한 수도국산달동네박물관이 당시 달동네 주민들의 삶을 추억하고 있다.


이 박물관은 지난 2년간 증축 공사를 거쳐 새롭게 단장한 모습으로 2월 1일 다시 문을 열었다. 한 달간 시범운영을 거쳐 3월에 정식 개관한다.


기존 지하 1층, 지상 1층, 연면적 2,045㎡ 규모였던 박물관은 증축 공사 후 지하 1층, 지상 3층, 연면적 3,640㎡ 규모로 몸집이 커졌다. 아울러 101면의 대형주차장을 신설해 관람객의 편의를 높였다. 특히 전시 콘텐츠 재구성을 통해 달동네의 서사를 보다 입체적으로 조명했다.


상설 전시실은 1개에서 2개로 늘었고 시대별 TV와 라디오 등을 소개하는 아카이브 전시실, 기증 전시실, 어린이 전시실 등도 새롭게 조성됐다. 무엇보다 포니 자동차, 최초의 텔레비전 등 볼거리를 보강한 것이 눈에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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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jpg 전시실을 둘러보는 이상환씨 가족
6.jpg 달동네 주민들이 한데 모여 TV를 시청하는 모습

‘우리는 이렇게 살았다’


수도국산달동네박물관에서 가장 인기를 끄는 곳은 1960~1970년대 달동네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 상설전시실 2관이다. 이 공간에 들어서는 순간, 관람객은 그 시대의 주민이 된다.


“어느 집에서 텔레비전을 사면 동네 사람들이 저녁에 레슬링 본다고 그 집에 다 몰려들었어요. 김일의 시원한 박치기를 보며 함께 박수치며 웃고 떠들던 어린 시절이 생각납니다.”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수도국산 달동네에 살았다는 이상환씨가 당시의 생활상을 풀어놓으며 걸음을 몇 걸음 옮기자 공교롭게도 흑백 TV의 추억을 그대로 재현한 비좁은 방이 나타났다. 무엇이 발목을 잡았는지 한동안 자리를 떠나지 못한 그는 “이 골목에 들어서니 겨울철에 손이 부르터 피가 나는데도 딱지치기를 하며 놀았던 기억이 새롭다”고 말했다.


이날 이 씨는 그의 부인과 아들, 며느리, 15개월 된 손녀딸까지 세대를 아우르는 가족과 함께 박물관을 찾았다. 이 6명의 대가족이 솜틀집, 이발관, 연탄 가게 등을 차례로 둘러보는 여정은 부모 세대에게는 향수, 자녀 세대에게는 공감과 이해의 시간이 됐다.


이 마을체험형 전시공간에서는 몇몇 수도국산 사람들과 마주하게 된다. 수문통 일대를 청소하거나 송현동 주변의 폐지를 주워 모은 돈으로 어려운 이웃을 도왔던 ‘호랑이 눈썹 할아버지’, 연탄 25장을 등에 지고 비탈길을 오르며 이웃들에게 온기를 전달했던 수도국산 달동네의 ‘마지막 연탄장수’, 솜이불이 겨울철 필수품이었던 시절, 솜틀집을 운영하다 자신의 손때 묻은 솜틀기를 박물관에 기증하라는 유언을 남긴 ‘솜트는 아저씨’, 동네 사람들의 헤어스타일을 책임졌던 이발사 등이다.


한 통에 얼마씩 일정 금액을 받고 물을 팔던 공동수도에서는 달동네사람들의 고단한 삶이 엿보인다. 겨울이 되면 물지게에서 흘러내린 물이 얼어 달동네 사람들을 더욱 힘들게 했다.


달동네의 배움터였던 야학당 ‘청산학원’ 코너는 또 다른 풍경을 보여준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학교에 다니지 못했던 주민들이 하루 일을 마치고 밤마다 모여 불태웠던 향학열이 느껴진다.


오래전 한 사진전 초대장에 적힌 문구는 이 동네의 정서를 압축한다.


“집집이 풍겨나오는 따뜻한 밥내음이 아릿한 변소내음과 섞여 당신을 향수에 빠지게 하는 곳, 언제 어느 모퉁이에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아이들과 개들의 깜짝쇼가 펼쳐지는 곳. 그러나 당신이 고층아파트의 삭막함과 이웃과의 벽에 답답해 본 적이 없다면 이 모든 것은 결코 찾아낼 수 없는 보물일 뿐….”


수도국산달동네박물관은 바로 그 ‘보물’, 도시의 변천과정에서 지워지지 않아야 할 기억들을 붙잡고 있었다.


7.jpg 미니어처로 옛 수도국산일대 거리 풍경을 재현한 전시물
8.jpg 수도국산달동네 골목 풍경을 재현한 상설전시관
9.jpg 수도국산달동네 형성과정을 보여주는 시청각실

달빛을 닮은 공동체


산비탈에 자리 잡았음에도 산동네가 아닌 달동네로 불린 이유는 단순하다. 달이 가장 잘 보였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도시의 가장 낮은 삶을 상징하던 이 공간은 지리적으로는 가장 높은 곳에 있었다.


달빛은 강렬하지 않지만 오래 남는다. 수도국산 사람들의 정서도 그랬다. 좁은 골목은 사생활을 숨기지 못했지만, 대신 서로의 안부도 감추지 못했다. 전기와 상하수도를 끌어오기 위해 이웃집 공간을 지나야 했고, 주민들은 서로의 공간을 내어주며 배려했다.


개인설비를 갖추지 못한 집들은 공동수도와 공동화장실을 함께 사용했다. 겨울철 연탄 배달과 김장은 품앗이로 해결했다. 생활의 불편을 결속과 정으로 상쇄해 가며 주민들은 끈끈한 생활공동체를 만들어갔다.


칼럼집 ‘장미를 주는 손’(저자 오광철)에서는 수도국산 사람들의 삶을 이렇게 기록했다.

“골목을 생활무대로 수도국산 사람들은 정답게 살아간다. 다닥다닥 지붕으로 머리를 잇고 골목길을 사랑방 삼아 정리를 나눈다”


산동네라 불렸다면 수도국산은 단지 지형에 머물렀을 것이다. 달동네였기에 기억이 됐다.


수도국산달동네박물관은 재개관을 통해 잊지 말아야 할 그 기억을 다시 소환했다.

인천광역시 콘텐츠기획관실에선 <굿모닝인천>, <Incheon Now>, <仁川之窗 인천지창> 세 종류의 매거진을 발행한다. 발행인 유정복 인천광역시장. 8년 연속 대한민국 커뮤니케이션 대상 수상, 창간 15주년의 영문 매거진, 대한민국 최초의 지방정부 중문 매거진. 훌륭한 콘텐츠와 공감의 글을 나누고 싶지만 아직 ‘그게 뭐야?’라는 시민들이 태반이다. 인천이라는 아이템의 보고(寶庫)에서 아껴둔 보물들을 하나 하나 꺼내 알리고 싶다. 가자! 인천시민과 외국인을 위한 열린 소통의 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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