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어머니 이야기

by 사오십년대소녀

시흥 관악산 쪽에 살 때의 이야기이다.

큰댁은 시흥 읍소재지에 살고, 우리는 산 중턱에 살았다.

큰어머니는 12남매를 낳았고, 우리 어머니는 5남매를 낳았다.

명절에 큰댁에 모이면 아이들로 바글바글했다. 가끔 보이지 않는 아이가 있었다.

언니들이

“영□가 안 보여요.”

하면

“홍역하다 죽었대.”

하고 누군가 대답하고,

또 다음 해에

“영△, 영◎가 안 보여요.”

하면

“염병 앓다 죽었대.”

하고 누군가 대답했다.

그래서 12남매 중 6남매만 살아 자라났다.

그런 시대였다.


우리 어머니 얘기를 들어보면, 큰어머니와 우리 어머니의 육아 방식은 아주 달랐다. 큰어머니는 나이가 들어서도 아이를 많이 낳고 키우다 보니 에피소드가 몇 가지 남았다.

큰댁에서 어느 오빠의 파발이 오곤 했다.

“작은어머니, 우리집에 와서 영□ 젖 좀 주래요.”

그러면 우리 어머니는 나를 끌어안고 먼저 젖을 물리고 나서 서둘러 큰집에 갔다. 큰어머니는 찬방에서 쌀밥과 미역국을 끓여 어머니를 먹이고, 어머니는 영□에게 젖을 먹였다.

이미 젖을 먹였는데 미역국밥 먹었다고 젖이 금방 나왔을까? 지금 생각하면 그런 궁금함이 든다. 다행히 어머니는 집에 오시면 나에게 또 젖을 먹였고, 나는 꿀꺽꿀꺽 잘 먹었단다.


삼시 세끼 먹이는 일도 우리집과 달랐다.

우리집은 아침은 해 뜰 때, 점심은 방직공장 사이렌 울린 때, 저녁은 해 넘어갈 때를 꼭 지켜서 온 식구가 모여 밥을 먹었다. 그때를 놓치면 끼니는 없다.


큰댁은 부엌 찬방에 상을 차려놓았다. 아이들은 나가 놀다 배고프면 들어와서 솥에서 밥 퍼서 먹고 또 나갔다. 중년의 큰어머니는 장죽을 물고 부엌으로 난 쪽문을 열고 밥 먹는 아이들을 관리하셨다. 하루 세끼를 모두 그렇게 하셨다.


큰댁 사촌들은 공부하고 싶으면 하고, 공부하기 싫으면 학교도 안 갔다.

우리 형제들에겐 아버지의 목침 위 회초리가 무서웠다.

사촌들은 그래도 잘 된 사람은 잘 됐다.

세월이 흘러 소식을 거의 모르고 지내고 있다.

우리와 사촌의 자녀들은 그리고 그 자손들은 지금 어딘가에서 조상도 모르고 ○ 씨의 성만 가지고 서로 남남이 되어 살고 있다.

그래도 내 형제들은 내 어머니가 물려주신 방식대로 살아가고 있으니, 사촌들은 큰어머니가 물려주신 방식대로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시간이 흐르고 사람이 달라져도 물려받은 삶의 방식은 은은하게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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