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작 아침 풍경

by 사오십년대소녀

우연히 단원 김홍도의 ‘벼 타작’이라는 풍속화를 보았다. 웃통 벗은 일꾼들이 열심히 벼를 털고, 갓 쓴 양반이 멍석 깔고 누워 장죽을 물고 감시하고 있다. 그 옆에 술병도 있는 게 그럴듯하다. 그림을 보자니 어린 시절 잠시 살던 외갓집 벼 타작하던 날 아침이 떠오른다.


‘와랑 와랑’

소리와 함께, 동녘이 밝아오기 전 아슴푸레한 새벽부터 타작이 시작되었다.

나는 탈곡기 돌리는 소리에 다른 날보다 일찍 잠에서 깨었다. 방문을 열고 내다보니 도토리 줍던 넓은 마당에 탈곡기 두 대가 양쪽에서 돌아간다.

요즘 아이들은 옛날에 벼 타작을 했다고 하면, 도리깨 같은 것으로 볏단을 때려서 턴 줄 아는데, 내 어린 시절에도 탈곡기가 있었다. 커다란 둥근 통에 둥글게 구부린 쇠 같은 것이 촘촘히 박힌 모양이다.

탈곡기 옆에는 볏단이 산처럼 쌓여 있다. 우리 외갓집은 대농이라 탈곡기 두 대를 놓고 털어댄다. 나는 마루에 앉아 구경하는데, 탈곡기 하나에 두 사람이 발을 굴려 가며 볏단을 대면 누런 벼 알갱이들이 하늘로 날다 후두둑, 후두둑 멍석에 떨어진다. 다 턴 볏단을 옆 사람에게 주면 받아서 알뜰하게 더 털어서 옆으로 던지면 짚단이 되었다. 누런 벼 알갱이가 순식간에 무덤을 이룬다. 어린 나이에 처음 본 나는 신기했다. 나머지 탈곡기도 똑같이 한다.

어느덧 해가 뜨면 어머니가 마루에 아침상을 차리고 일꾼들을 부른다. 아침상은 평소보다 푸짐하다. 어제 만든 두부를 가득 넣어 끓인 구수한 찌개가 있고, 여러 가지 반찬도 먹음직스럽다. 일꾼들은 집에서 담근 막걸리를 대접으로 마신다. 어린 나는 겁이 났다. 술 취하면 누가 저 많은 벼를 터나. 무슨 노래를 부르던데 나는 모르는 노래다. 술 한잔 들어가니 흥이 났겠지.

그리고 다시 벼를 털기 시작한다.

언니들은 학교에 가고 나는 마루에 앉아 구경하고 있으면 어머니가 마당에 내려가 새들을 쫓으라고 하셨다. 오늘은 우리 집 마당에 푸짐한 식당이 열려서 새들이 잔치를 벌이고 있다. 나는 마당에 내려가 나무막대기를 휘둘러 새들을 쫓는다. 조금 있으면 팔이 아파 주저앉아 쉬고 다시 휘둘렀다. 그러자면 해가 점점 떠오르고, 막걸리 한 모금씩 입을 축이던 일꾼들의 얼굴은 아침부터 벌겋게 달아오르고 노래도 부른다. 그렇게 우리 집 마당엔 벼 알갱이들과 벼 자루가 수북수북 늘어간다.

그날 오후의 일은 기억나지 않는다. 벼 타작은 오래 지속되었고 그걸 견디기엔 어린애 인내심은 짧으니까. 그저 벼 타작의 아침이 선하게 떠오를 뿐이다.

새벽부터의 낯선 부산스러움, 텅 비고 무료했던 마당에 쌓인 볏단과 사람들의 활기 같은 것들. 어른들에겐 힘든 날이라는 것도 모르고 나는 아이의 호기심과 들뜸으로 신이 났던 것 같다.


세상에 신기한 것이 별로 없고 신날 일도 없는 지금, 이제 다시는 볼 수 없는 광경과 철부지의 설렘 같은 것이 그리워서, 벼 타작은 아직도 먼 이 시절에 잠시 회상에 잠겨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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