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에 온 뒤로 인간관계는 단순해졌다. 단순하다는 말이 좋아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은 그냥 줄었다는 말의 포장을 좀 예쁘게 해 본 거다. 가장 가까운 친구는 남편이다. 물론 결혼 전에도 가까웠지만, 지금은 좀 다르다. 그는 내 통역사이자 서포터이자 24시간 자동응답 시스템이다.
외국 생활이 외로워서 힘든 건 아니다. 진짜 피곤한 건, 관계의 시작을 내가 항상 설명부터 해야 한다는 거다. 나는 어디서 왔고, 왜 여기 있고, 직업은 뭐고, 언어는 아직 어렵고... 소개팅 프로필처럼 자기 인생을 요약하는 것도 지칠 때가 있다. 그래서 그냥 안 하는 쪽을 택하게 된다. 말 안 하고 가만히 있으면 덜 피곤하니까.
그러다 보니 대화보단 관찰이 늘고 사람보다 내 감정이 더 가까워진다. 요즘은 뭔가 느껴지기만 해도 그게 너무 크게 다가온다. 조금 기뻐도 눈물이 나고, 살짝 민망해도 하루 종일 되새김질한다. 언어가 줄어드니 감정은 점점 더 오디오를 뚫고 나온다. 말 대신 눈썹이, 표정이, 어깨가 대신 말하려 한다.
한국에 있을 땐 몰랐다. 사람들과 섞여 사는 게 이렇게 감정을 걸러주는 역할을 했다는 걸.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기서 적당히 괜찮게 살아가고 있다. 그 감정들과 어울리는 시간도 나쁘지 않다. 감정은 늘었지만 관계는 좀 줄었고 대신 그 줄어든 공간에 내가 좀 더 들어왔다.
낯섦이 일상이 되면 그건 더 이상 낯설지 않다. 그래서 더 애매하다. 익숙하지도, 그렇다고 완전히 낯설지도 않은 세계. 딱 적당히 어색한 상태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간혹 그 어색함이 나를 무디게 만들기도 한다. 기분이 나쁜 건 아닌데 딱히 좋은 것도 아니다. 그냥 묘하게 무에 가깝다.
이방인으로서의 삶은 어쩌면 그런 것이다. 늘 적당히 떠 있고, 적당히 비켜서 있다. 그 속에서 나는 존재하는 걸로 충분히 바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