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은 많고, 나는 말이 없다.
스페인은 햇빛이 많다. 해가 떠 있는 시간이 길고, 사람들의 말소리도 그만큼 길다. 사방이 찬란한데, 내 안은 좀 그늘지다 못해 눅눅하다. 사는 데 큰 불편은 없다. 다만 말수가 줄고 생각이 늘었다. 한국에 있을 땐 나도 꽤 수다스러웠던 것 같은데 요즘은 침묵이 더 편하다. 이쯤 되면 내가 원래 이런 사람이었나? 싶기도 하다.
여기서는 대부분의 사회적 대화를 남편을 통해 한다. 공공기관은 물론이고 식당에서 주문 한 번 하는 일도 그의 몫이다. 가끔 혼자 나서야 할 일이 생기면 마음부터 다잡는다. 인사말, 본론, 사소한 덧붙임 멘트까지 머릿속에서 몇 번쯤 리허설하고 나서야 Hola 한마디가 입 밖으로 나온다.
내향성과 완벽주의. 이 둘의 조합은 언어 습득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머릿속 시뮬레이션이 끝나기 전까진 입이 열리지 않으니 매 순간이 대화가 아니라 프레젠테이션이다.
반면 실수에 개의치 않고 막 던지는 사람들이 휘뚜루마뚜루 유창해지는 걸 보면 감탄 반, 피로감 반이다. 그럼 나는 또 조용히 입을 닫는다.
예전엔 이 모든 게 내 성격 탓인 것 같았다. 겁이 많아서, 예민해서, 어쩌면 성격이 덜 자라서. 그러다 문득, 그래도 시험은 잘 보잖아 싶어 자격증 몇 개를 따고 조용히 만족했다. 그것도 나름의 성취니까.
그렇지만 나는 언어를 사랑한다. 대화보다는 문법을, 표현보다는 어원을 파고든다. 보통은 의사소통이 목표라면,
나는 언어를 해체하고 분석하는 과정을 좋아한다. 말은 서툴러도 언어는 좋아한다. 이게 가능한 조합이라는 걸, 나를 통해 새삼 알게 됐다.
하지만 이런 하루가 반복되면, 어느샌가 기운이 빠진다. 말이 막히면 생각도 잘 흐르지 않는다. 외국어를 배운다는 건 잠시 멍청해진 나를 견디는 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나는 아직 로딩 중이다. 진행은 느리지만, 멈춘 건 아니다.
다만 아직 업데이트 중일뿐이다.
번잡한 지하철 안에 있을 때면 나는 대체로 조용한 배경이 된다. 사람들의 빠른 스페인어는 총알처럼 튀어나오고 나는 매번 스치기만 한다. 대화는 번쩍이며 오가고 웃음소리는 쉴 틈 없이 터진다. 나는 그 흐름 속에 있지만 사실상 그 자리에 있지 않은 사람이다.
섞이고 싶다는 마음은 있지만 내 입은 늘 준비가 안 돼 있다.
말을 꺼내기 전에 이미 타이밍은 지나가 있다. 하고 싶은 말은 태산인데 정리되지 않은 문장들이 머릿속을 뒤엉키다
그냥 목구멍을 타고 조용히 사라진다.
그럴 땐 괜히 자존심이 상해서 나도 한국어로는 내 생각 또렷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인데... 하고 삐친다.
그러다 마음이 좀 무른 날엔 한국어로도 잘하긴 했던가? 하는 의심이 살짝 스친다.
내가 하루 중 말을 가장 많이 하는 순간은 마트 계산대 앞이다. Gracias. 처음엔 기어들어가는 소리였다. 요즘은 제법 힘도 실리고 상황에 따라 톤도 조금씩 다르게 조절해 본다. 그걸로 나름의 성장곡선을 그리고 있다. 물론 그 곡선은 너무 완만해서 확대경 없이는 보이지 않는 수준이긴 하다만 그래도 뭐, 그런 거라도 있어야 계속하지 않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