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같으면 사회 초년생으로 분주하게 살고 있었을 나이. 나는 스페인의 작은 아파트에서, 남편이 출근하고 비어 있는 집을 지키고 있었다. 스페인어는 아직 입안에서만 맴돌았고, 밖에 나가는 건 어색했고, 사람을 만나는 건 어렵고 두려웠다.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이건... 결혼인 거잖아? 그 질문이 처음 마음에 내려앉았던 날, 나는 처음으로 스페인이 낯설고 싫었다. 남편과 오래 만나왔고, 사랑하는 사람을 따라 이민을 결심한 나였지만 사실 ‘결혼’이라는 단어 앞에 서보지도 못한 채 '따라왔다'는 감정이 나를 짓눌렀다. 그리고 작년 여름, 한국에 다녀왔다. 남편은 처음으로 한국 땅을 밟았고, 짧은 시간이었지만 너무 따뜻하고 행복했다. 지하철에서 익숙한 안내 방송이 들릴 때, 친구들과 밤늦게 동네 카페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눌 때, 거리마다 한국어 간판이 반짝일 때, 나는 울컥했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엉엉 울었다. '혹시 내가 한국에서 살고 싶어지면 어떡하지?' 그 생각이 너무 무서웠다. 돌아와서 나름 마음을 다잡으려 노력했다. 다시 스페인어를 붙잡았고, 작은 루틴들을 만들었다. 그러던 중 한 달간 미국에 다녀올 일이 생겼다. 스페인에 온 후 처음으로 남편과 한 달을 떨어져 지냈다. 가족들을 만나고 정말 편안하게, 즐겁게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돌아오는 길이 가까워질수록 피로감이 몰려왔다. 어딘지 낯설고 긴장이 가시지 않았던 시간. 마음 한구석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스페인으로 돌아온 날, 공항에서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창밖으로 익숙한 건물들, 익숙한 색감들, 그리고 나를 기다리고 있던 남편의 얼굴. 그 순간, 문득 마음속 깊이에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나 집에 왔구나.” 어쩌면 아주 평범한 순간이었다. 누구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은 일상이었겠지만, 그 순간은 나에게 처음으로 ‘이곳이 내 집’이라는 감각을 준 시간이었다. 이민이라는 건 '정착하는 장소'보다 '정착하고 싶은 사람'과 함께 있어야 가능한 감정이라는 걸 그때 조금 알게 됐다. 나는 아직도 가끔 외롭고, 여전히 언어는 서툴지만 그래도 이제는 안다. 이곳이 내 일상의 무게를 감싸주는 ‘집’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이민의 어느 날, 나도 몰래 뿌리를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