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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동일 Mar 08. 2021

연애담(戀愛譚)

작곡가와 피아니스트의 소소한 사랑 이야기

1994년 “민족음악연구회 피아노 소모임”에서 “아리랑”을 주제로 <피아노 한마당> 음악회를 열었다. 나는 대학 졸업 즈음에 민족음악연구회 창립 준비에 참여했었는데 창립하기 전에 가족을 따라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그런데 내가 미국에 있는 동안에도 “민족음악연구회”와의 끈이 계속 이어졌고, <피아노 한마당> 기획 담당자가 이 공연을 위해 나에게 2대의 피아노를 위한 신작 작곡을 요청했다, 나는 음반을 통해 인상 깊게 들었던 김소희 명창의 <상주아리랑>을 테마로 작곡을 해서 보내주었다. 이 곡은 피아니스트 신은경과 김언지의 연주로 초연되었는데, 민족음악연구회 회원들 반응은 썩 좋지 않았다.


2년 뒤, 한국에서의 음악회를 위해 잠시 귀국했을 때, 내 곡을 연주했던 20대 중반의 피아니스트 신은경을 만날 수 있었다. 어려보이고, 순수한 인상이었다. 

계획했던 음악회가 끝난 뒤, <푸른 자전거> 음반 제작 등의 일이 계속 밀려들어오면서, 나는 미국으로 돌아가지 못했고, 민족음악연구회 피아노 소모임과 점점 교류가 많아지면서 신은경과도 더 자주 만나게 되었다. 동료로 가까워져 갔고, 나는 한편으로 우리 관계에 대해 주저주저하고 있었는데, 민족음악연구회 회원들이 무슨 눈치를 챘는지 우리 사이에 열심히 부채질을 하기도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연애 과정애서 많은 일을 겪을 것이다. 나와 신은경 역시 우여곡절이 있었고, 마침내 우리는 결혼을 했다. 


결혼 후 2년 쯤 뒤에, 아내가 연주할 수 있는, 우리들의 이야기가 담긴 피아노 모음곡을 작곡하기 시작했는데, 몇 곡 쓰고 더 이상 진척이 없었다.      


다시 또 5년이 흐르고, 아내에게 우리의 연애 시절 이야기를 함께 만들어보자는 제안을 했다. 경제적으로 쪼들려 늘 생활이 어려웠던 탓에, 아내는 우리의 연애담 공연에 또 돈을 들여 제작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얼마 뒤 새 공연에 활용할 수 있는 기금을 받게 되어, 공연을 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이 되었다. 이전에 작곡해 놓았던 몇 곡의 피아노곡들이 있었고, 가까운 제자 중에 좋은 연주가들도 있어서, 피아노곡과 실내악곡을 엮어서 공연을 만들 계획을 세웠다. 제목은 <연애담>이었다. 


아내와 함께 대본을 썼다. 각자 연애하던 시절을 떠올려 아내는 아내의 입장에서, 나는 내 입장에서 상황 별로 글을 써서 조정하고 배열해 나갔다. 내용을 좀 더 재미있게 만들고 싶어서, 극작하는 몇몇 제자들에게 각색을 부탁했는데, 선생님의 이야기라고 다들 부담스러워해서 그냥 우리가 쓴 대본으로 할 수 밖에 없었다.   

공연은 남자 배우와 여자 배우가 무대 양쪽에 등장하여 서로의 입장을 이야기하고 나서, 그 내용과 연결된 음악을 연주하는 형식으로 구성했고, 연주곡들은 피아노 솔로와 2중주, 전체 합주 등 다양한 편성의 음악을 배치했다. 대체적인 이야기 흐름은 서로에 대해 각자의 입장에서 다른 생각을 하면서 서로 가까워져 결혼에 이르게 되는 줄거리를 갖고 있다. 결혼 후 서로에 대해 생각했던 것들을 확인하면서 당황하기도 했던 기억이 있다.    


2007년 5월과 6월에 각각 1번씩 공연했고, 즐겁게 공연했다. 두 번째 공연 했던 극장의 담당자가 클래식 공연으로는 아주 신선하고 재미있었다며 공연이 계속 이어지면 좋겠다고 격려를 해 주었다. 관객들에게서는 “재미있다”는 반응과 “뭐야, 연애하는데 아무 사건도 안 일어났잖아...”라는 반응이 있었다. 부부가 자기들의 이야기를 음악회로 엮었다는 것에 대해 감동적이었다는 반응도 있었다. 이후로도 공연을 다시 올려 보려고 여러가지 아이디어를 생각해 보았지만, 실행하지는 못했다. 


아내 신은경은 나에게 가장 중요한 연주가이다. 창작음악, 우리나라 전통음악에도 관심이 많고, 창작음악에 대한 감각과 해석이 뛰어나다. 나와는 오랫동안 함께 작업하다보니 음악적으로도 잘 맞는다. 내가 서양음악 작곡을 전공했지만, 내 작품들이 고전적인 클래식 음악의 전형성과 거리가 있어서, 클래식 음악 연주만을 뛰어나게 잘 하는 피아니스트들이 내 작품을 연주할 때 음악적으로 어색한 경우가 적잖이 있다. 늘 상의할 수 있는 연주자가 곁에 있다는 것은 행운이다. 

"연애담" 공연 프로그램



◆ 연애담의 이야기

 

전주곡나의 오래된 꿈 하나


미국에서 그 사람이 왔다. 얼굴도 모르는 그의 작품을 내가 작년에 연주했었지. 작곡가를 직접 만나게 된다고 해서 기대를 했지만, 그의 첫인상은 별로 좋지 않았어. 어두운 표정에 초췌한 모습, 말도 거의 하지 않고 혼자 앉아 있었다.

 

두 번째 귀국, 모임의 사람들도 오랜만이었다. 낯선 얼굴들도 있었는데, 작년에 내 곡을 연주했던 그녀도 처음 만날 수 있었다. 내 곡을 연주한 낯모르는 피아니스트를 만난다는 것은 묘한 느낌을 주는 일이다. 그녀는 맑은 얼굴에 편안한 느낌을 주었다.   

 

1. 첫만남(앙상블)

 

 

어제는 그의 악보를 받기 위해 인사동에서 만나 점심을 같이 먹었다. 여전히 말이 별로 없지만 처음보다는 좀 밝은 모습이다.


모임에서 올해도 음악회를 준비하고 있다. 그녀는 소모임의 대표로 기획을 맡고 있었다. 서울에 왔으니 나도 관여하게 되었고, 그녀와 만날 일이 종종 생긴다. 그녀에게 좋은 느낌을 받는다. 그녀와 더 가까워질 수 있을까? 음악회를 마치면 난 미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런데, 내가 다시 사랑을 할 수 있을까?   

 

2. 망설임(Oboe & Piano)

 

 

음악회를 마치고 나서 그를 만날 일이 없어졌다. 공연 준비할 때 열심히 전화하더니 이젠 연락이 없네. 언제 미국으로 돌아간다고 했더라?


음악회가 끝났지만 돌아갈 수 없는 일이 자꾸 생긴다. 몇 주 더 있어야겠다고 직장에 다시 전화를 해야 한다. 그녀는...? 잘 모르겠다. 내 상황은 너무 불안정하다. 생각할수록 머리가 복잡하다. 공연도 마쳤으니 무슨 핑계로 만날 수 있을까?

 

3. 멀어져 가고(Piano)

 

 

요즘 나에게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많다. 왜 다들 나한테 그러는 걸까? 그가 남다른 사람이라는 건 안다. 좋은 사람이겠지만 나는 이성으로서 관심이 가지는 않는다. 만나도 별 느낌이 없고. 친해지기 어려운 사람이야...


작업이 계속 지연되고 있다. 미국에 돌아가지 못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요즘 그녀에 대한 생각을 자주 한다. 지난 주 음악 캠프에서 그녀를 지켜보면서 감정이 다시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녀와 다시 가까워지고 싶지만... 어떻게 해야 할까?   

 

4. 다시 그대를 바라보며(Piano)

 

 

더 이상 마음을 누르고 있기 어려워 결심을 했다. 그녀에게 만나자고 전화를 했는데, 마음이 통한 것일까? 그녀는 밝은 목소리로 기다렸다는 듯,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녀와 잘 될 수 있을 것 같다.  

 

드디어 그에게서 만나자는 전화가 왔다. 기분 좋게 그러자고 했다. 사귀자고 하거나 날 좋아한다고 하면 단호하게 거절할 생각이다. 오래 끌지 말고 깨끗하게 정리를 해야지.

 

5. 이 가을에(Clarinet & Piano)

 

 

오늘 뜻밖에 그가 와서 깜짝 놀랐다. 별 일 아니었는데 찾아와 주어서 고마웠다. 그를 전보다 자주 만나긴 하지만 더 가까워지지도 멀어지지도 않는다. 그냥 오랜 친구처럼... 그렇지만 뭔가 개운 하지 않아... 


오늘 그녀가 동문음악회에 출연한다고 해서 나로서는 어울리지 않게 꽃을 사들고 갔다. 뭐 특별한 음악회는 아니었고, 아는 친구들도 눈에 띄지 않았지만, 그래서 내가 그 자리에 있다는 게 즐거웠다. 음악회 마치고 조촐하게 둘이서 뒷풀이를 할 수 있었으니까. 

 

6. 음악회가 끝난 뒤(Piano)

 

 

그가 내게 <어떤 사랑>이라는 곡을 써서 주었다. 영화라면 감동받아 눈물을 흘려줘야 할 장면인데, 난 그의 작품을 받기가 부담스럽다. 작곡가가 나를 위해 곡을 쓴다는 것은 의미 있고 고마운 일이지만... 게다가 직접 손으로 그린 악보를 주었으니... 난 그가 날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런데 그는 통 말을 하지 않는다. 말을 해야 거절을 할텐데, 왜 좋아한다는 말을 하지 않는 걸까? 날 정말 좋아하는 거야?


그녀를 위해 곡을 쓴다. 그녀가 이 곡을 마음으로 느낄 수 있다면 내 감정을 전달 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지금 그녀에게 사랑을 전할 수 있는 최선의 표현 방법. 곡을 마무리하고 악보를 말아 붉은 색 리본으로 묶는다. 영화에서 모차르트가 그랬던 것처럼.  

 

7. 어떤 사랑(Piano)

 

 

한 낮에 덕수궁에서 만났다. 궁내 여기저기서 결혼식을 앞둔 남녀들이 사진 촬영을 하고 있다. 우리는 햇빛을 받으며 무심히 그들을 지나친다. 이젠 그녀가 내 마음 가득히 들어와 있다. 그녀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언젠가부터 그와 함께 있으면 따뜻함을 느낀다. 편안하다. 한결같은 사람. 있는 듯 없는 듯 하면서도 푸근한 느낌을 주는... 내가 이제껏 접하지 못한 부류의 사람이다. 

 

8. 덕수궁에서(Piano)

 

 

이제는 고백을 해도 될 만큼 그녀와 가까워졌다고 느낀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게 왜 그렇게 어려운지... 힘들게 말을 꺼냈다. 그녀는 해맑은 얼굴로 내 말을 듣고 있었다.

 

오늘 그가 내게 무언가 중요한 이야기를 한 것 같은데 잘 들리지 않았다. 그는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답답해. 지금은 많이 익숙해졌지만 오늘은 주위가 시끄러워서 더 안 들렸다. 아무튼, 이젠 그가 없으면 안 될 것 같아. 그가 아름다워 보이기 시작했다.


9. 고백(Oboe & Piano)

 

 

집에 오는 길에 그가 내 손을 잡았다. 아무 말도 없이 둘이 손을 잡고 걷기만 했다. 그의 손이 부드럽다. 그의 따뜻한 온기를 오늘 밤 내내 느끼고 싶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그는 돌아가고 난 내일을 기다린다.


그녀와 만나고 집에 돌아오면 금방 또 전화를 한다. 할 말이 없어도 그녀와 전화선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느끼며 즐거워한다. 정말 연애를 하는가 보다.


10. 겨울의 사랑(Bassoon & Piano)

 

 

오늘 밤은 늦도록 그녀와 함께 걸었다. 어느 낯선 골목, 아무도 없었다. 그녀를 안고 입을 맞춘다. 그녀의 부드러운 입술이 느껴진다. 오래 동안 그렇게 있었다.

 

하얀 눈밭에 푸르게 서 있는 소나무들과 맑은 하늘과 간간이 말하는 새들, 그 공간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추운 줄도 모르고 발을 묻고 서 있던 사랑하는 사람들. 그 사람이 늘 곁에 있어만 있어준다면 세상의 모든 산과 강과 하늘은 내 것이 된다.

 

11. 입맞춤(Flute & Piano)

 

 

그가 내게 좀 더 참견해 주었으면 좋겠어. 관심을 보여 주고, 또 나를 간절히 원하기를 바란다. 공기나 태양처럼 있어도 없는 듯한 존재이고 싶진 않아. 그의 무심함이 나를 너무 힘들게 해.


그녀가 무엇을 생각하는 지 잘 모르겠다. 사랑에 너무 집착하는 것 같기도 하고, 혹은 내게서 멀어지려는 것 같기도 하고.   


12. 봄은 왔지만(Bassoon & Piano)

 

 

한 달 간 미국에 다녀와야 한다. 한 달 정도 떨어져 있다고 우리 관계가 흔들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녀는 불안해한다.

 

그래, 잠시 떨어져 지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그를 만난 걸 후회하진 않는다. 그를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도 날 위해 노력해줬으면 좋겠다. 서로에게 좀 더 깊숙이 들어가기를 바랄 뿐이다.

 

13. 멀리 있어도(Piano)

 

 

그가 다시 돌아왔다. 그래도 그는 여전히 바쁘다. 그가 내게 줄 수 있는 시간은 많지 않다. 날 사랑하는 걸까? 그를 받아들려고 노력하지만 늘 그에게 상처를 주는 말만 하게 된다. 정말 날 사랑하나요?


그녀에 대한 내 마음은 처음이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그러나 그녀는 항상 사랑을 확인하고 싶어 한다. 그녀가 날 믿지 않는 걸까? 그녀와 헤어질 거라고 생각한 적은 없지만 그래도 요즘은 힘이 든다. 그녀는 날 사랑하고 있겠지? 

 

14. 날 사랑하나요?(앙상블)

 

 

사랑은 아프지만 행복하다. 나의 사랑을 놓치고 싶지 않다. 그녀에게 힘이 되어 주고 싶다. 사랑으로 흘린 눈물을 가슴에 담고 그녀에게 다시 입을 맞춘다,   

 

사랑을 하면 즐겁고 행복하기만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마음이 아플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어.  그가 보고 싶다. 날 꼭 잡아요. 내 손을 놓으면 안 돼요. 

 

15. 새로운 희망(앙상블)

 

 

마침내 오늘이 왔다. 계획대로 내가 작곡한 음악이 들리기 시작한다. 하얀 드레스를 입은 그녀가 내 팔을 잡는다.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우리는 예식장 안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간다. 우리의 삶에 새로운 장면이 시작됐다.  

 

믿기지 않는다. 내가 결혼을 하다니. 흥미진진한 날이다. 예식장에 모인 사람들 사이로 걸어 나가는데 웃음이 나온다. 결혼하면 뭐가 달라질까?

 

16. 결혼(Piano)

 

 

나른한 휴일 오후, 그녀와 집 앞에 나와 산책을 한다. 파란 하늘이 눈부시다. 그녀와 함께 있는 시간이 편안하다. 결혼, 우리는 이제 무엇을 꿈꾸게 될까?

 

이미 오래 전부터 함께 있었던 것 같다. 그와 함께 걷는다. 우리의 시간을 즐기리라. 


17. 함께 가는 길(앙상블)



아티스트 소개


신은경 : 피아니스트. 나의 아내. 한양대학교 음악대학 피아노과 졸업. 민족음악연구회 활동을 통해 만나 결혼까지 했다. 민족음악연구회에서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상주모심기, 합창단 음악이 있는 마을과 함께 <피아노와 합창을 위한 협주곡> 등의 내 작품들을 초연했다. 그 외에도 이야기 콘서트 <시리동동 거미동동>, Classic Music Drama <프록스(FROGS)>, 코믹오페라 <태이크 아웃>, 오페라 <로미오 대 줄리엣> 등 나의 여러 작품에서 피아노 연주를 맡아왔다. 내 작품들을 주로 연주하는 실내악단 “타랑퀄텟:과 ”앙상블 모로“의 피아니스트로 활동해 왔고, 최근에는 스스로 기획한 <스토리텔링 피아노 콘서트> 시리즈를 선보이고 있다. 




https://youtu.be/0tNlbUZZzVU

"연애담" 공연 실황(업로드한 지 오래되어 화질이나 음질이 좋지 않습니다. 상영시간 1시간1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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