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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동일 Mar 18. 2021

작곡마당 이야기 (1)

작곡마당의 초창기

제가 해 온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는 "작곡마당"이라는 단체를 만들고 20년 째 운영해 오는 것입니다. 작곡계의 제일 밑바닥에서 20년을 지켜온 "작곡마당" 이야기를 정리해 봅니다. 우선 창단 즈음부터 처음 몇년간의 이야기입니다. 


2000년 12월 31일, 나는 새해를 앞두고 밤늦게 컴퓨터 앞에 앉아 “다음 카페”를 만들고 있었다. 그 시기쯤 되어서야 인터넷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고 있던 나는, 자기가 작곡한 음악을 파일로 만들어 웹상에 올려 소개할 수 있는 미국 사이트인 mp3.com에 내 곡을 올려놓고 홈페이지처럼 운영하고 있었는데, 영어로 되어 있어서 국내에 내 주변 사람들이 쉽게 이용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한국의 포털 사이트를 몇 군데 살펴본 후 다음 카페를 개설하여 mp3.com에 링크하고 개인 자료실처럼 쓸 생각이었다. 카페 이름은 내 작품 중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기억하고 있었던 “푸른 자전거”를 살려서 “푸른자전거-신동일”라고 지었다. 나를 기억하는 사람들과 “푸른 자전거”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쉽게 찾아왔으면 하는 바램이었다. 금방 학교 제자들 몇 명과 다른 작곡 카페에서 만난 몇몇 친구들이 찾아왔다. 


카페를 만들면서 또 한가지 생각했던 것은 작품 발굴이었다. 당시 나는 피아노마당이라는 연주 단체의 음악감독으로 있었는데, 이듬해 3월부터 서초동의 한 소극장에서 “피아노 플러스”라는 월례음악회를 공동 기획하기로 이야기가 오가고 있었다. 이 음악회에 젊은 작곡가들의 신작 피아노 소품들을 연주해 주는 코너를 만들려고 생각했고, 카페 “푸른자전거-신동일”이 이를 위한 홍보와 작업 공간이 되어 주기를 기대했다. 

처음에는 기대에 부응하여 일이 잘 진행되었다. 작품을 보내 오는 사람들이 꽤 있었고, 연주 효과가 있고 피아노마당의 회원 연주자들이 연주하고 싶어하는 곡들을 골라서 무대에 올리거나 작곡가를 직접 초청하여 연주하게 하기도 했다. 


이즈음에 음악 활동에 대한 내 생각이 조금 조정된 부분이 있었다. 대학 졸업 후 나는 오로지 작곡가로 살 수 있는 길을 개척하겠다는 마음으로 내 작품을 스스로의 힘으로 무대에 올리기 위한 공연 기획을 많이 했는데, 처음의 내 생각은 작곡가와 연주가가 분리되어 있는 현실에서 역할 분담이 이루어져야겠다는 것이었다. 무대에서 청중과 직접 만나는 사람들은 어차피 연주자들이기 때문에 연주자가 창작곡 연주를 자기 작품으로 생각하고 적극적으로 작품 해석에 개입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판단 아래, 무대 형식에서도 그렇고 홍보에 있어서도 연주자를 크게 부각시켜 주었고, 나 자신을 비롯한 작곡가들은 텍스트를 제공하는 작가 또는 무대 제작에 관련한 스태프의 역할을 담당했다. 작곡가와 연주가 사이의 이런 관계를 만들어내고 심화시켜 가는 것이 내가 자신만의 길을 개척해 나가는 방법이었고, 내가 주로 함께 작업하는 사람들은 작곡가들이 아닌 연주가들이었다. 피아노 플러스에서 신작 코너를 만들었던 것도 이런 차원에서 시작했던 일인데, 신작 코너 진행에 조금 문제가 생겼다. 회원 연주자들이 몇 번 연주를 하기는 했지만, 연주자들이 원하는 곡의 스타일과 작곡가들의 생각이 쉽게 조율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연주자들은 나름대로 불만을 표시했고, 반면 작곡가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피아노 플러스”도 적자 공연을 면치 못하면서 4개월 만에 막을 내렸다.


“피아노 플러스”를 진행하면서 나는 처음으로 작곡가들을 집중해서 살펴보게 되었다. 자유로운 인터넷 공간에서 다양하고 진솔한 이야기들이 오갔고 이런 젊은 작곡가들에게서 희망을 보기 시작했던 것이다. 특히 전공을 하지 않았지만 작곡을 하고 싶어하거나 작곡가가 되려고 하는 사람들이 적잖이 존재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이런 사람들은 정말로 스스로 원하는 무언가를 위해 열정적으로 노력하기 때문에 작곡에 대해 대단한 정열을 갖고 의욕을 불태우고 있었다. 또한 작곡을 전공하지 않았어도 다른 공부를 하거나 직장 생활을 하다가 뒤늦게 작곡가가 되겠다는 어린 시절의 꿈을 이뤄보려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 또한 작곡에 대한 열정이 차고 넘쳤다. 이런 사람들을 통해 나는 무언가를 보기 시작했다. 정말 이런 사람들에게 음악과 작곡 활동의 길을 열어주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들에게 기회가 주어진다면 우리나라 음악의 미래에 분명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고, 그들에게 일정 정도 투자를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것은 단지 좋은 일을 한다는 차원을 벗어나 우리 음악의 미래, 나 자신의 미래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주게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나는 내 이름을 걸고 발표회를 갖기로 하고 공지를 내서 참가자를 모았다. 대관과 인쇄, 홍보 비용을 내가, 즉 카페에서 지원하겠으니, 연주자 비용만 부담하고 작품을 발표하라는 것이었다. 음악회 제목은 “신동일의 작곡마당”. 참가자들의 면면은 환상적이었다. 노동운동 경력이 있고 국악작곡에 뜻을 둔 주부 김정희, 모범적으로 대학원까지 작곡전공을 했지만 진로를 찾지 못해 작곡가의 길을 접고 피아노 학원을 운영하던 이지연, 대학을 영문과로 진학했다 그만 두고 작곡가의 길을 찾던 중 결국 음악학을 전공하고 있던 김상현, 공과대학을 다니면서 독학으로 작곡 공부를 했던 김현석, 그리고 조금 남다른 생각을 갖고 있던 작곡과 대학생 두 명, 김수민, 우예소라. 첫 발표회는 100석 규모의 알려지지 않은 작은 홀에서 하게 되었음에도 언론의 반응이 예사롭지 않았다. 음악회를 준비하면서 나는 언론에서 관심을 가질만한 충분한 이야기 거리가 있다고 기대하고 있었는데, 기대 이상의 반응이 있었다. 무료 공연이었기에 청중이 너무 많이 올까 걱정할 지경이었고 공연은 대 성공이었다. 특히 내가 사회를 보면서 각각의 작품이 연주되기 전에 작곡가를 불러내 작곡가 자신과 작품에 대해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고, 이 순서를 위해 작곡가들과 사전 준비를 많이 했는데 결과가 충분히 나왔고, 작곡가들의 인간적인 면모와 음악을 함께 묶어 청중에게 전달하겠다는 내 의도가 적중하여, 음악회는 감동적으로 치러졌다. 청중의 반응도 대단히 적극적이었고 뒷풀이에서도 많은 이야기가 오갔다. 이례적으로 시사주간지와 음악신문 등에 장문의 공연 리뷰가 두 개나 나왔다. 진심 어린 글들이었다. 

제1회 신동일의 작곡마당, 동아일보 기사


나는 카페 이름을 “작곡마당”으로 바꾸고 좀 더 적극적으로 활동을 전개했다. 사람들이 점점 모여들기 시작했고 작곡마당은 점점 활기를 띄어갔다. 

상승하는 분위기를 타고 바로 두 번째 발표회 기획에 들어갔다. 작곡마당에 대한 관심은 더욱 고조되었고, 특히 참여 작곡가들과 대담 준비를 하면서 쓰게 하는 자기 소개글을 부분적으로 공개하면서 작곡마당은 더욱 진한 색깔을 띄게 되었다. 매 번 공연을 준비하면서 참가자들이 자기 소개글을 작성했는데, 정말 남다른 삶을 살아온 사람들이 많았고, 그 글들은 충격과 감동을 전해 주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연주홀에서 있었던 제2회 신동일의 작곡마당은 추석 연휴를 끼고 있었던 탓인지 관객 수가 예상만큼 폭발적이지는 않았다. 그래도 제2회 발표회를 거치면서 회원이 크게 늘었다. 두 번째 발표회에서는 남도의 어려운 환경에서 성장한 음악 선생님 김지강, 비범한 고등학생 이승규, 경상남도에서 음악 교사를 꿈꾸는 대학생 정소현, 해외를 떠돌며 여러 장르를 섭렵하고 귀국했지만 현실에 적응하지 못했던 이방인 이종찬, 모범적인 서울대 작곡과의 지중배와 반항적인 작곡과 학생 황혜경 등이 참가했다. 


2001년 가을 즈음, 그 동안 인연을 갖고 있던 부암아트홀과 여러 가지 논의를 하게 되었다. 그 해 겨울 나는 “작곡마당의 사각무대”라는 월례음악회를 제안했고 부암아트홀에서 이를 받아들여 2002년 작곡마당과의 공동기획공연으로 진행하기로 했다. 

“사각무대”는 “신동일의 작곡마당”을 통해 검증된 작곡가들에게 좀 더 전문적인 음악가로 훈련이 되고 창작곡 발표회의 자생력을 키우려는 의도로 기획했다. 매 공연마다 4명의 작곡가가 자기만의 무대를 만든다. 표를 구입한 관객들은 입장할 때 채점표를 받고, 공연을 모두 보고 난 뒤 네 가지 코너의 공연 완성도와 자신의 만족도를 바탕으로 채점을 한다. 채점표는 수거하여 정산한 뒤 평점을 인터넷과 다음 공연 등에서 발표한다. 채점한 관객들 중에서 추첨하여 참가자들이 준비한 간단한 선물을 증정한다. 요즘 유행하는 오디션 프로그램과 비슷한 형태였고, 당시로는 획기적인 시도였다. 작곡가들이 발가벗고 청중 앞에 서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채점은 관객과의 의사소통의 도구이면서 작곡가들에게 자기 점검의 기회가 되어 주었다. 4월부터 8월까지 상반기에는 “신동일의 하얀나무”, “김준성의 오래된 일기장”, “김상현의 노래세상”, “김수민의 장기자랑” 등의 제목을 가진 4개의 코너가 고정으로 진행되었고, 9월 이후 하반기에는 좀 더 다양한 작곡가들이 참여하여 매달 새로운 코너들이 선을 보였다. 그러나 공연의 유료화에는 실패하여, 10월부터는 다시 무료 공연으로 진행했다.


“신동일의 작곡마당”은 2002년4월에 열렸던 제3회 공연부터 2번 이상 참여하는 작곡가와 처음 참여하는 새로운 작곡가들이 섞여 점점 안정감 있고 세련된 무대를 만들어 나가고 있다. 새로운 작곡가들의 신선함과 긴장감, 이미 발표회에 참여했던 작곡가들이 다시 무대에 서서 보여주는 안정감이 조화를 이뤘다.

  

작곡마당은 완전하게 열려 있다. 곡의 수준, 작품의 양식이나 스타일, 악기, 장르, 전공 여부 등에 관계없이 작곡을 하고 싶고 자기 작품을 발표하고 싶은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작곡마당의 무대는 이런 작곡가들의 정성과 열정으로 채워지며, 이런 힘이 관객들에게 감동을 전해 준다. 작곡마당의 무대는 항상 진한 정서를 발산하고 관객들은 여기서 전해지는 정서를 고스란히 받아들인다. 이런 교감이 작곡마당의 무대가 만들어내는 감동의 근원이고, 이것이 우리 음악의 미래를 위해 작곡마당의 전하고자 하는 비전이요, 희망이다.       










이어서 작곡마당 두번째 이야기, 작곡마당을 거쳐간 작곡가들을 기억해 봅니다. 


https://brunch.co.kr/@f314b41122b2406/29



몇 년 전에 크로스오버 앙상블 "새바"라는 연주단체에서 정기적으로 영상 팟캐스트를 진행했었는데, 회원 작곡가 한 분과 함께 출연하여 작곡마당에 대한 이야기를 한 꼭지 진행한 적이 있습니다. 영상 초반에는 전편 마지막에 감상했던 제 오페라의 한 장면에 대한 감상을 이야기하고, 3분20초 정도부터 작곡마당에 대한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


https://youtu.be/JIGUCQYp7k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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