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에 다가가기 14
글: 신동일(작곡가)
클래식 음악 하면 많은 사람들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작품은 아마도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일 것입니다. 베토벤의 교향곡 제5번 작품 67 “운명”은 음악사적으로 교향곡이 나아갈 길을 바꾸어 놓은 혁명적인 작품일 뿐만 아니라, 지극히 단순하면서 너무나 강렬한 “운명”의 모티브는 한 번 들으면 잊혀지지 않을 만큼 듣는 이에게 선명하게 다가와 꽂힙니다. 이 작품은 서양음악사의 중요한 변곡점이 되었고, 단 4개의 음으로 만들어진 “운명”의 테마는 후세의 작곡가들에게도 막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사실 “운명 교향곡”이라는 부제는 독일이나 유럽에서는 잘 사용하지 않는 제목입니다. 베토벤의 제자인 안톤 쉰들러(Anton Schindler)가 베토벤이 죽고 나서 몇 년 뒤에 베토벤의 이 작품의 유명한 모티브에 대해 “운명은 이처럼 문을 두드린다”고 설명했다고 썼는데, 이 기록으로부터 “운명”이라는 부제를 붙이게 되었고, 일본의 레코드사가 20세기 들어 “운명 교향곡”이라는 제목을 처음 사용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유럽에서 제작된 음반에서도 점점 “Schicksal”이라는 제목을 사용하다가, 요즘에는 다시 “운명(Schicksal)”이라는 제목을 사용하지 않는 추세라고 합니다.
베토벤의 교향곡 제5번은 그가 34세 때인 1804년 최초의 스케치가 나타납니다. 이때는 교향곡 제3번 “에로이카”가 완성된 직후인데, 작업이 계속 이어지지 않고 중간에 여러 다른 작품들을 작곡하게 됩니다. 베토벤이 가장 왕성하게 작곡 활동하던 시기여서 많은 명곡들이 이때 작곡됩니다. 피아노 소나타 제23번 “열정”, 작품 59의 3개의 현악4중주곡 “라주모프스크”, 교향곡 제4번, 피아노 협주곡 제4번, 바이올린 협주곡 등이 완성됩니다.
베토벤의 교향곡 제5번은 그가 37세였던 1807년부터 본격적으로 작곡이 진행되어 이듬해인 1808년 완성됩니다. 교향곡 제5번은 교향곡 제6번 “전원”과 동시에 작곡되었고, 1808년12월22일 오스트리아 빈의 “테아터 안 데어 빈(Theater an der Wien)” 극장에서 열린 음악회에서 베토벤 자신의 지휘로 두 곡이 함께 초연되었습니다. 이날 음악회는 추운 날씨에 4시간에 걸쳐 진행되어 관객들이 많이 지쳤고, 오케스트라의 연습 부족으로 연주가 좋지 않아 초연 당시에는 큰 반응이 없었는데, 1년 반 뒤에 악보가 출판되자 대단한 찬사가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베토벤의 교향곡 제5번 <운명>은 음악을 전개하는데 있어 새로운 방법을 제시했던 혁명적인 작품입니다. 서양음악 역사상 가장 단순하고 강렬한 모티브로 시작되는 이 작품은, 마치 작은 세포가 세포 분열을 해나가면서 거대한 유기체가 완성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단4개의 음으로 구성된 간단한 모티브가 제1악장 전체를 완벽하게 장악해 나가는 과정은 경이롭습니다. 악구와 악구, 각 부분과 부분이 긴밀하게 관계를 맺으며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제1악장의 구조를 완성했습니다. 음악을 건축물에 비유하곤 하는 음악가들의 표현에 가장 적확하게 부합하는 작품이 바로 베토벤의 교향곡 제5번일 것입니다.
주제와 4개의 변주곡으로 구성된 제2악장은 주제 속에 <운명의 모티브>가 숨어 있다. 처음 연주되는 부분은 제1악장과 큰 관계가 없는 듯 보이는데, 후렴 부분이 시작되면 <운명의 모티브>가 나타나고, 제1변주가 이어지면, Verse와 후렴이 어떻게 제1악장의 모티브와 연결되어 있는지 알 수 있게 됩니다. 교묘한 구성입니다.
제3악장은 첼로와 베이스가 연주하는 초조한 듯한 악구에 이어 나타나는 강력한 테마가 바로 제1악장의 주제를 3박자로 변형한 것입니다.
제4악장에서는 연결구, 제2주제, 발전부 등에 제1악장의 모티브가 나타나고, 발전부에서 재현부로 이어지는 부분에 제3악장의 주제가 나타나서 연결구 역할을 합니다.
조금 전문적으로 음악 내용을 설명해 보자면, 베토벤의 교향곡 제5번 <운명>은 전4악장을 하나로 묶어내는 구성도 치밀합니다. 물론 이런 방법은 소나타 형식이 확립된 이후의 모든 작곡가들이 자기만의 방법으로 적용해왔는데, 베토벤은 한발 더 나아갔고, 후대 작곡가들이 더욱 발전시켰습니다.
베토벤의 교향곡 제5번의 중심 조성은 c minor이고, 제1악장이 c minor입니다. 선율선은 G로 시작해서 C로 끝납니다. 제2악장은 Ab Major인데 VI에 해당합니다. (c moinor이므로 C를 I로 해서 순서대로 세러보면 Ab이 여섯 번째 VI이 된다) 서양의 조성음악은 구조적으로 V – I 진행이 중요합니다. (특히 제일 저음인 베이스의 진행에서 V - I은 더욱 중요.) 그리고 반음 관계가 중요합니다. 음계에서 중요한 음의 반음 위나 아래에 위치한 음과의 관계가 특히 중요한데, 중요한 음의 반음 위나 아래 음은 중요한 음을 강력하게 부각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V – I의 진행에 반음 관계가 포함되어 있고, 이 관계를 여러 다른 음에도 적용하여 중요한 음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하는데, I을 제외한 가장 중요한 음은 V이기 때문에 V의 반음 위나 아래 음이 V를 강화합니다. 특히 단조(minor)에서 V와 VI은 애초에 반음 관계에 있기 때문에 작곡가들은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왔습니다. 베토벤 교향곡 제5번의 제2악장 Ab Major는 이 곡의 중심 조성인 c minor의 V, 즉 G의 반음 위에서 G를 강화하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제3악장은 다시 c minor로 돌아오는데, 시작하는 음이 G입니다. 제3악장은 전체적으로 G음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그리고 제3악장 마지막 부분에서 G를 길게 연장하다가 종지하지 않고, 제4악장으로 바로 연결됩니다. 제4악장은 조성은 C Major이고, 제1악장과 제3악장의 어두운 C 화음과 다르게 공격적이고 화려한 C 화음이 연주됩니다. 제3악장과 제4악장은 큰 구조에서 V – I의 관계를 갖습니다.
이렇게 베토벤 교향곡 제5번 <운명>의 전4악장이 갖는 전체 구조는 I로서의 제1악장(c minor) - VI으로서의 제2악장(Ab Major) - V로서의 제3악장(c minor) - 다시 I로서의 제4악장(C Major)이다. 정리하면 I – VI – V – I의 기본 종지형 구조를 갖고 있다.
이런 악장 간의 조성 구조는 베토벤이 처음 개발했거나 베토벤만이 적용한 기법은 아니지만, 교향곡 제5번 <운명>의 경우는 지극히 단순한 모티브와 이를 기초로 한 강력하고 튼튼한 구성력이 이전 작곡가들과 다른 차원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이 특별하고, 19세기 이후의 서양음악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교향곡은 위에서 설명한 것과 유사한 방식의 조성 구조를 만들어냅니다. 이렇게 하나의 교향곡이 3~4개의 독립된 곡이 모여 있지만, 전체를 하나의 음악적 기승전결 구조로 만들어내는 방법으로 작곡됩니다. 그래서 교향곡 연주를 감상하는 청중들은 악장 사이에 박수를 치지 않고, 전곡 연주가 끝난 뒤 박수를 칩니다. 당연히 지휘자, 연주자들도 교향곡 전악장의 호흡을 끊지 않고 이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지휘자들을 보면 한 악장이 끝난 뒤 호흡을 완전히 놔 버리고 다음 악장을 준비하는 경우를 보곤 합니다. 청중에게 악장 사이에 박수 치지 말라고 하면, 지휘자도 악장과 악장 사이에 호흡을 이어가면서 전체 악장의 구조를 청중이 느낄 수 있도록 연주해야 합니다. 청중에게는 악장 사이에 박수 치지 말라고 하면서, 지휘자는 악장 간 호흡을 놔 버리는 연주는 적절치 못합니다.
베토벤이 교향곡 제5번의 스케치는 그의 나이 34세 때부터 시작되었지만, 이 교향곡에서 제시한 이른바 “운명의 모티브”는 베토벤이 20대 청년 시절부터 고민했던 모티브였고, 그의 인생에서 중요한 음악적 테마였다고 생각됩니다. “운명의 모티브”는 교향곡 제5번이 완성되기 전 여러 작품에서 발견됩니다. 같은 테마를 여러 작품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적용해 보면서 “운명의 모티브”를 계속 다듬어 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가장 유명한 사례는 피아노 소나타 23번 작품 57 <열정>의 1악장에서 “운명의 모티브”가 조용하지만 선명하게 나타난 것을 들 수 있고, 바이올린협주곡, 피아노협주곡 4번 등 여러 작품에서 “운명의 모티브”가 발견됩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초기 작품 중, 베토벤이 26~27세 경에 작곡한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작품 6의 제1악장을 보면 교향곡 제5번의 제3악장을 연상케 하는 “운명의 모티브”가 선명하게 제시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운명의 모티브”는 교향곡 제5번 이후의 작품에도 많이 나타났고, 후대 작곡가들의 작품에서도 적지 않게 발견됩니다. 특히 “운명의 모티브”는 워낙 단순해서 누구의 작품에서도 나타날 수 있는 기가 막힌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후대 작곡가의 작품 중 “운명의 모티브”를 의식한 것인지 아닌지 불분명한 수많은 사례들이 발견됩니다.
서양음악사는 베토벤의 교향곡 제5번의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