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2.10~12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초연
12월 공연 준비와 12월 작품 마감을 동시에 하느라 올해는 연말까지 계속 시간에 쫓기며 살고 있습니다. 12월10일부터 12일까지 국립현대무용단의 신작 <구두점의 나라에서> 음악을 맡았는데, 11월 초에 5회 공연 모두 매진이 되었고, 기록 삼아 브런치에도 적어 둡니다.
무용극에 가깝게 제작되고 있는 <구두점의 나라에서>는 그림책을 원작으로 하고 있습니다. 19세기 독일의 시인 크리스티안 모르겐슈테른의 풍자시를 텍스트로 해서 인도의 출판인 라트나 라미니탄이 그림책으로 만든 이 작품은 기하학적인 구두점의 이미지들을 디자인 개념으로 풀어냈고, 수제 종이에 수제 인쇄(실크스크린), 손 제본 등 모든 공정을 사람의 손으로 작업해 낸 하나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해외 라이센스 출판도 수제 가공하여 한정판으로 유통하는데, 국내에서 보림출판사가 한정판을 수입하여 판매했습니다. 원작 그림책은 영어로 되어 있고, 외국어 판은 거의 없습니다. 자세한 책 소개는 출판사 홈페이지를 링크합니다.
국립현대무용단의 <구두점의 나라에서>는 정영두 무용가의 제안과 저의 조정안으로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음악을 새로 작곡했습니다. 공연 프로그램에 수록할 작곡노트를 공유합니다.
<구두점의 나라에서>의 음악은 원작 그림책에 대한 감상을 바탕으로 표현된 작곡가의 음악적 반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림책 <구두점의 나라에서>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그림책”과 매우 다른, 특별한 그림책입니다. 내용이나 그림들도 그렇고, 인쇄와 제본, 유통 방법까지 특별한, 일종의 ‘미술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중에서 음악과 직접 연관된 글과 그림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이 책의 내용은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한 여러 겹의 복합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참혹하고 비참한 전쟁 이야기로 읽히지만, 그 주인공이 ‘구두점’들이라고 생각하면 우화적이거나 풍자적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어떻게 보면 장난스럽기도 합니다. 그림도 일반적인 일러스트레이션이 아닌, 그래픽 같은 기호와 조형으로 채워져 있는데, 장면마다 여러 가지 이미지들이 중첩되어 있거나, 층층이 쌓이고, 겹쳐 있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작품의 음악도 두 명의 피아니스트를 통해, 원작에서 나타나는 여러 겹의 복합적인 ‘결’(layer)를 음악적으로 표현해 보려고 했습니다.
두 명의 피아니스트는 서로 다른 성격의 테마를 교대로 연주하거나, 겹쳐서 연주하기도 하고, 흩어졌다 모이곤 합니다. 서정적인 악상과 울퉁불퉁한 악상이 교차되고, 긴장감 있는 리듬과 장난스러운 악구가 불쑥불쑥 튀어나옵니다. 복합적인 정서를 표현하기 위해 여러 가지 다양한 작곡 기법을 활용했습니다. 선명하고 단순한 스타일과 불협화음 위주의 시끄러운 음악이 교차되기도 하고, 국악 장단을 피아노 음악에 슬며시 녹아들게 해 보기도 했습니다. 전체적으로 ‘전쟁’이 주는 폭력적인 느낌과 흥미로운 놀이의 성격을 동시에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음색은 처음부터 끝까지 피아노라는 악기의 일관된 소리로 나타나지만, 다양하게 변화가 많은 음악을 따라가 보시기 바랍니다.
<구두점의 나라에서>의 음악은 전주곡과 에필로그를 포함하여 총17곡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책의 흐름에 따라 짧은 피아노 곡들로 나누어 작곡했는데, 노래 가사가 없는 피아노 음악은 구체적인 이야기를 들려주지는 않습니다. 곡의 순서도 안무가의 의도에 따라 변형되어, 작곡가가 의도한 곡의 순서와 관계없이 새로운 구성을 갖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원작 그림책의 내용을 담고 있지만, 원작과 관계없는 것으로 생각될 수도 있는 작품디 되었습니다.
두 피아니스트에 의해 연주되는 새로운 음악과 구두점이 된 무용수들이 만들어내는 독특한 움직임을 통해 관객 여러분들의 상상력을 마음껏 펼치며 감상하시면 즐거운 공연 관람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