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원봉을 든 우리는

by 라희

100만 명이 모인 국회 앞에서 터무니없을 정도로 다양한 색상의 응원봉들을 만났다. 2016년 광화문에선 보기 어려웠던 신기한 광경이었다. 보통 응원봉이라 함은 콘서트나 음악방송, 혹은 아이돌팬들이 주로 모여있는 시상식, 페스티벌에나 챙겨가는 것이었다. 그 외의 장소에 가져가는 것은 조금 민망하여 책장 위에만 올려두곤 했다. 내가 하는 사랑이 웃음거리가 될까 두려웠던 것도 있다. 이상하게 이번 집회 때는 응원봉을 들고나가겠다는 사람들이 많았다. 어느새 아이돌을 좋아하는 행위는 익숙하고 당연한 것이 되었고 팬들도 그 사랑을 티 내는 것에 거리낌이 없어 보였다. 심지어 응원봉을 든 팬들끼리 서로 초콜릿이나 핫팩을 쥐어주기도 했다. 그들의 사소하고 끈질긴 연대가 예쁘고 부러워서 나도 함께하고 싶어졌다. 이번만큼은 일반인보다 소위 말하는 빠순이 집단의 일원이 되고 싶었다.

예정되어 있던 토요일 일정이 취소되자마자 집에 있는 응원봉을 주섬주섬 챙겨 국회로 향했다. 한 발 한 발 걸어 나갈 때마다 눈에 익은 응원봉들이 보였다. 케이팝의 산증인 같은 1세대 아이돌 팬부터 올해 데뷔한 파릇파릇한 아이돌 팬들까지 정말 많은 케이팝 덕후들이 힘주어 구호를 외쳤다. 그들은 사납고 근엄하게 소리치다가도 케이팝 음악이 나오면 눈동자가 초롱초롱해지면서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팬들의 손에 들려있는플래카드엔 각자가 좋아하는 아이돌 멤버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그만 울고싶어 졌다. 이 사람들의 주특기는 사랑이다. 우리는 자신의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의 행복과 안녕을 비는 사람이다. 타인을 갖가지로 분석하고 들여다보며 백만 가지의 칭찬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런 대단한 사람들이 국회 앞에 모였다. 어쩌면 우리는 윤석열을 끌어내리기 위해 이곳에 모인 게 아닐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취미이자 전부인 사랑을 계속하기 위해서, 덕질을 킵고잉 하기 위해서, 그것을 방해하는 미움과 폭력을 제거하기
위해서일지도. 늘 그랬듯 다른 무엇이 아닌 사랑을 무기로 싸우는 이들을 보며 자부심을 느꼈다. 팬들 사이에는 '일코'라는 말이 있는데 일반인 코스프레의 줄임말이다. 순애하는 사람은 종종 무시당하기에 생겨난 말이다. 이런 줄임말에서 알 수 있듯 덕질은 숨어서 하는 마이너한 취미로 분류되어 왔다. 나 역시 조금 친해지고 나서야 얼굴을 붉히며 사실 이 아이돌 좋아해...라고 말하는 사람이라 일코에 더 능하다. 이번 집회를 계기로 당분간은 아니 앞으로는 일코를 그만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렇게멋진 집단에 속해있는데 왜 숨고 눈치를 봐야 하는가. 치졸하고 비겁한 사람들은 저토록 당당한데 우리가 어째서.

윤석열이 탄핵되고 나면 우리는 제자리로 돌아가 덕질을 할 것이다. 좋아하는 아이돌 콘서트에 가고, 음악방송에 가고, 굿즈와 앨범을 사겠지. 그런 평범하고 안전한 일상을 되찾았으면 좋겠다. 다른 걱정 없이 오로지 사랑만 할 수 있는 세상이 오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그때까지 응원봉을 든 우리는 상암과 일산 대신, 올림픽홀과 인스파이어 아레나 대신 국회 앞에서 만나는 걸로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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