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기 강하식

by 석담

그 일이 있은 후 나의 학교생활은 엉망이 되었다. 그 날이후 교실 문밖에서 급우들의 뒤통수를 바라보는 습관이 생겼다. 난생처음 친구에게 상처받았던 나를 친구들은 기억조차 하지 않았다. 나에게 우울한 어린 시절을 선물한 녀석을 만나지 말았어야 했다. 특유의 친화성으로 나를 끌어들였고 마침내 우리 집까지 같이 가면서 사달이 난 것이었다. 여자처럼 바싹 마른 녀석은 이름도 진희였다. 모르는 것이 없다는 듯 쉬지 않고 자신의 머릿속을 털어 내가 좋아하는 달콤한 초콜릿 같은 거짓말을 생산했다. 녀석을 처음 만났을 때 내가 정신 차릴 수 없게 푹 빠진 것도 엄청 부자인양 너스레를 떠는 녀석의 거짓말 때문이었다. 녀석을 보았을 때 춘향전의 변사또가 잘 어울릴 것 같다고 생각했다. 눈 속의 흰 토끼처럼 잘 숨겨진 인간의 내면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았다.


수업을 마친 녀석과 우리 집으로 향했다. 부모님의 맞벌이로 낮시간의 우리 집은 나의 전유물이었고 나는 종종 친구들을 불러들이곤 했다. 술래잡기, 말뚝박기가 지겨워진 우리는 레슬링을 시작했다. 한창을 엉켜 붙어 구르고 뒤집고 했다. 서쪽창이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목마르다. 마실 것 좀 줘.” 녀석의 말에 부엌으로 가서 냉장고의 우유를 들고 왔다. 방안에 그가 보이지 않았다. 이름을 불렀지만 아무 응답이 없었다. 얼핏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은 것 같기도 했다. 내 시선은 책상 위로 향했다. 있어야 할 곳에 그것이 없다. 내가 초등학교 입학하면서부터 하나둘 모았던 돼지 저금통이 사라졌다. 머리가 복잡해졌다.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 마루도 뛰어나갔다. 신발을 신을 정신도 없이 맨발로 달리기 시작했다. 산비탈에서 내려오는 동네 길은 내내 내리막이었고 군데군데 자갈이 박힌 콘크리트에 발바닥이 자꾸 아파왔다. 도로에 이르기 전 마지막 계단길을 따라 달렸다. 계단을 오르는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보는 것 같았다.

드디어 나는 도로가를 달리고 있다. 녀석은 아득히 먼 곳에 바람처럼 달아나는 게 보였다. 비가 내렸는지 보도블록이 군데군데 젖어 있었다. 발바닥에 차가운 물기가 느껴졌다. 조선공사 앞이다. 저녁노을이 더욱 붉어져 빨간 핏빛으로 변해 다가올 어둠을 맞서고 있었다. 조선소 고가 통로 앞에 도착했을 무렵이었다. 스피커로 여섯 시를 알리는 시보가 들렸다. 익숙한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들렸다. 국기 강하식이었다. 거기서 멈춰야 했다. 쉼 없는 달리기가 끝났다. 목구멍까지 차오른 숨을 진정이며 오른손을 왼쪽 가슴에 올렸다. 조선소의 태극기를 바라보는 동안 귀에 익숙한 음악이 계속 흘러나왔다. 시큰거리는 발바닥을 보다가 구멍 나고 해진 양말이 보였다. 부끄럽다는 생각은 온데간데없고 녀석이 어디쯤 갔을까 골똘히 고민했다. 음악은 막바지를 향해 달리고 저녁놀은 거의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내 얼굴은 붉게 물들고 나의 분노와 부끄러움도 같이 타올랐지만 나는 돌처럼 꿋꿋이 서서 차갑게 식어 갔다.


그 사건은 엄마가 직접 찾아가서 몇 푼의 보상을 받은 것으로 마무리되었고 그 뒤로 나는 녀석을 멀리했다. 그렇다고 녀석의 도벽에 대한 비밀을 누설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평생을 살아오면서 내가 도둑질과 거리가 멀었던 것은 녀석의 도벽이 내게 준 지워지지 않은 상처 때문이었다. 나는 그날이후 사람을 쉽게 믿지 못하게 되었다. 아직도 누군가를 처음 만나면 한번은 망설이는 습관이 생겼다.


☆ 그림은 챗지피티가 만든 가상의 이미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