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 <헤어질 결심>
나는 기억력도 나쁘고 집중력도 떨어지는 편인지라, 한 번 본 영화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을 두려워한다. 영화를 보면서 노트에 무언갈 끄적이지 않는 이상 영화가 끝나면 신기루 같은 조각 몇 개만 남을 뿐 자세한 것들은 금방 사라진다. 그래서 헤어질 결심을 보고 아무것도 쓰고 싶지 않았다. 그냥 깊은 바다에 영화를 던져버리고 싶었다. 아무도 못 찾게.
팬데믹 이후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일이 귀해졌고, 그와 더불어 시네마적 체험에 대해 한 발 떨어져서 바라보게 되었다. 몇 년 전만 해도 나는 감독이 누구던, 평이 나쁘던 좋던, 그날 잠을 얼마나 잤건 거의 매일을 극장에 갔다. 압구정에서 저녁 영화를 보고 막차에 겨우 올라타 집으로 돌아오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극장에 향하는 일이 일상보다는 이벤트에 가까워졌다. 표값이 올랐고, 극장에 다녀오려면 제법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소모해야만 한다. 더 이상 시간이 빈다고 아무 영화나 보기보다는 미리 예고편을 찾아보고, 영화잡지를 들여다보게 된다. 이제는 그 '아무 영화'에 내 시간과 체력을 배팅할 만한 여유가 없다. 그런 일은 이제 영화제에서나 즐길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변두리로 탈락시켜버리는 영화들이 생겨버린다. 다시 극장가에 활기가 불어오고 표값은 최고치를 찍은 지금, <헤어질 결심>은 그 탈락 과정에서 어디로 갈 것인가에 기로에 서있다.
시네마적 체험이 어떤 경우에 느껴지는 가가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나의 경우에는 그 체험의 수치가 '경이로움'에 달려있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속 적막한 우주 장면이라거나 <자전거 탄 소년>에서 소년이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롱 테이크 장면 같은 경우 말이다. 간혹 유치한 유머나 귀여움에 무장해제되어 영화를 사랑하기도 한다. <우리들>에서 주인공 동생이 '그럼 우린 언제 놀아?'라고 묻는 순간 나는 목을 놓아 울고 싶었다. 이렇게 한 사람이 어떤 영화를 보며 그것이 '좋은 영화인지'를 판단하는 기준은 이제 더 뻗어나가 '극장에서 볼만한 영화인지'에까지 잣대를 들이민다. 소비자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이다. 이제는 전처럼 지도를 보고 걷다 들어간 아무 식당에서나 밥을 먹는 대신 웹사이트를 통해 리뷰를 보고, 미리 예약을 해서 밥을 먹는 시대가 됐다. 영화라고 해서 이런 정보 쓰나미의 시대에서 비껴갈 리가 없다. 쏟아지는 정보 아래에서 사람들이 모험을 할 리는 없으니까. 극장에 갈 때 누군가는 재미가 보장된 양산형 블록버스터를 택할 것이고, 고독한 미식가의 길을 가고야 마는 이들은 늘 그렇듯 예술영화를 택할 것이다. 사실 나도 전자를 택하고 싶을 때가 종종 있다. 매트릭스를 포디 상영관에서 다시 한번만 볼 수 있다면 열 개의 아트영화도 포기할 수 있다.
이렇듯 극장에 걸리는 영화들은 전보다 더욱 견고해진 심판대 위에 올라야만 한다. 10만 관객만 들어도 환희의 눈물을 흘렸던 아트하우스 영화의 심판대는 사실상 그리 좁아지진 않았다. 아직까진 덜 접힌 신문지 위에 서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 나를 놀라게 한 것은 어째서 '박찬욱'의 영화가 심판의 기로에서 탈락하게 되었느냐는 것이다. 흥행부진에 대해서는 많은 해석들이 나오고 있고 나는 별 이의 없이 동의하는 바다. 그러나 소재의 문제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올드보이>가 개봉 당시 관객 수가 300만 명 넘게 들었던 것만 봐도 소재가 이번 영화의 흥행과 직결된 이유 같지는 않다. 꼭 영화가 흥행을 해야만 할 필요는 없다(내가 제작진도 아니고, 난 그냥 일개 관객일 뿐이니까). 그렇지만 이번만큼은 초조한 마음으로 손가락을 빨게 되는 이유가 뭘까. 조심스럽게 내가 사랑하는 아이돌의 신곡 뮤직비디오를 친구들에게 들이밀던 그 시절의 마음과 지금의 마음은 한 치도 다를 게 없어 보인다. 말이 길었지만, 그냥 <헤어질 결심>이 더 잘 되길 바라는 마음에 하는 아쉬운 소리일 뿐이다.
때때로 언어는 발화되지 않음으로써 아름답게 남는다. 말 되지'않음'으로써 말이 된다. 언어의 존재 이유가 언어의 무존재처럼 느껴지는 순간들이 있다. 영화라는 매체가 그 어느 때보다 아름답게 느껴지는 때가 바로 그 순간이다. 나는 그래서 사랑 영화를 사랑한다. 어차피 우리는 사랑의 끝이 어디인지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응시해야 할 곳은 사랑이 가닿는 곳이 아니라 바로 그 말해지지 않는 언어의 순간들이다. 헤어질 결심은 가장 극적인 방식으로 말해지지 않는 순간을 말한다.
사랑은 곧 붕괴요, 어리석은 믿음의 결말은 파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바보같이 모른 척하고 싶을 때가 있다. 그렇기에 따지고 보자면 결심이 필요한 쪽은 이별이 아니라 사랑일 텐데. 언제나 큰 결심을 요하는 것은 헤어지는 일이다. 믿는 것은 어렵지 않다. 속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해준은 함부로 속지 않는 사람이다. 그는 끝까지 서래를 의심하고 또 의심한다. 해준의 투철한 직업정신은 가장 쉬운 길을 누구보다 어렵게 건너는 그의 성격과 꼭 닮아있다. 그는 '붕괴'되었다고 말했다. 망가진 것도 아니고, 잠식된 것도 아니다. 공들여 쌓아올린 높은 모래성이 한 번의 파도로 와르르 무너지는 것처럼, 빳빳하게 살던 그가 사랑 하나로 몽땅 붕괴된 것이다. 그러니 해준에게 서래는 무서운 존재일 수밖에 없다. 그와 반면에 서래는 아무런 의심 없이 해준을 믿었지만, 결국엔 굳은 다짐으로 그를 떠났다. 템포가 달라도 너무 달랐던 것이다.
이 이야기에서 해준은 아무것도 해보지 못했다는 사실은 나를 영화 속에 고이게 만든다. 이 사랑에서 그는 철저하게 관객으로 남는다. 뭐 하나 해보지도 못하고, 도망만 치다가 그냥 끝났다. 그런 속설이 있다. 오히려 더 잘해준 사람이 헤어진 후에 후회가 없다고. (물리적으로) 비극적 결말을 맞은 것은 서래이지만 진짜 비극은 여기 있다. 진짜 비극은 남은 자의 삶에 있다. 두 사람의 이야기는 짧다. 첫 번째, 잘 살고 있는 해준의 삶에 서래가 균열을 일으켰다. 두 번째, 붕괴된 해준은 균열을 피해 그녀가 없는 곳으로 도망쳤다. 세 번째, 서래는 다시 찾아와 해준을 무너트리고 떠났다. 마침내. 이 각본의 집필가는 오로지 서래 한 명이다. 해준은, 으레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 그렇듯 불쌍하게 도망 다니고 끌려다니다가 내팽개쳐진 사람일 뿐이다. 사랑이 이렇게 지독하다.
서래는 해준에게 당신의 미결 사건으로 남고 싶다고 했다. 밤에 잠도 못 자고, 자신의 사진만 들여다보길 원했다. 그녀의 결심이 성공함으로써 두 사람의 이별은 종지부를 찍는다. 서래는 깊은 바다에 자신을 버림으로써 해준에게 못다 한 말을 전했다. 화자와 청자의 서로 다른 해석. 이 간극은 사랑이 탄생하는 본질적인 지점이자 이별의 지점이다. 의심과 관심은 사랑도 낳지만 이별도 낳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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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묵혀두고 있다가 어제 영화를 다시 보고 왔다. 역시나 모든 영화 재탕이 그렇듯 이번에는 시각효과보다는 청각효과에 집중할 수 있었다. 노래 '안개'의 가사, 해준이 서래의 냄새를 맡던 소리, 마지막에 서래씨 어디갔어요를 외치던 해준의 목소리에 담긴 울먹임.
슬픔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잉크가 퍼지듯 물드는 사람도 있다 한 것처럼, 마지막 바다 장면보다 슬픈 건 산에서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 장면이었다. 그들의 대화는 어긋나있다. 마치 다른 장면에서 한 사람의 음성만 따온 듯,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한다. 서래에게 당신이 왜 좋은지 아이처럼 신이 나 늘어놓는 해준과 달리 무언가 결심한 서래는 해준과 다른 공기를 내뿜는다. 참 서글프다. 열 길 물속도 모르고 사랑하는 사람의 한 길 마음속도 모르는 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