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게트의 나라, 재정의 벼랑 끝에서
프랑스 국가 재정에 빨간불이 켜졌습니다.
GDP 대비 국가부채는 113%를 넘기고, 지금 이 순간에도 시간당 180억 원씩 (1200만 유로) 빚은 불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외부기관의 경고가 아니라, 마크롱 정부 스스로가 인정한 위기입니다. 내각은 흔들리고, 대통령 탄핵안이 거론되며, 시민들은 다시 노란 조끼(반정부 시위의 상징)를 입고 거리로 쏟아져 나와 '국가마비시위'를 벌이고 있습니다.
혼돈 속으로 빠지는 프랑스. 위기는 갑자기 찾아온 게 아닌, 어쩌면 오랜 기간 동안 프랑스인들의 일터와 일상의 삶을 대하는 태도와, 변화하는 시대의 조류에 역행하는, 그네들의 삶에 뿌리 깊게 박힌 비생산성과 비효율이 쌓이고 쌓인 결과물일 수도 있겠습니다.
1. Art de vivre
삶의 기술. 삶의 즐거움, 아름다움, 매일의 우아한 삶에 대한 가치를 중요시 여긴다는 프랑스인들의 확고한 철학입니다.
보다 현실적으로 접근하면, 여유로운 휴가, 품격 있는 식사와 낭만적인 대화, 그리고 일터에서의 풍부한 복지제도입니다.
제가 다니던 회사의 본사 건물 중심에 위치한 복지관(CSE)에는 점심시간에 늘 직원들이 분주히 상담을 받습니다. 바캉스 프로그램, 자녀들의 예체능프로그램, 각종 문화/여가활동 지원 프로그램 등, 여름휴가를 갓 갔다 온 프랑스 직원들은 오늘도 다음 휴가를 준비하려, 열심히 할인혜택을 받고 프로그램을 고르라 바삐 검색을 하고 상담을 받습니다. 먹고 마시고, 즐기고 여행하는 프랑스인들의 여유.
회사에서 여름 휴가비는 한국처럼 일괄적으로 제공되지 않습니다. 대신 회사 복지 프로그램이 실제 여행을 떠나는 직원들에게 금액 지원이나 프로모션 형태로 주어집니다. 결국, 열심히 일한 당신. 많이 떠나면 많이 떠날수록 이득인 샘이죠.
8월 한 달을 통째로 쉬는 게 권리이자 정체성일 수밖에 없게 만드는 직장의 복지 제도입니다.
점심시간은 거의 종교적 의식입니다. 회의시간 동안 그렇게 불평불만을 늘어놓고, 회의 결과가 ''자 오늘 안건에 대해 회의가 필요하니 다음 회의를 잡읍시다.''라고 회의를 위한 회의로 마무리가 된 후 직원들의 점심시간을 관찰해 봅니다.
12시 회사식당의 줄은 길고 더딥니다. 뭐를 먹을지 이것저것 살피고, 식사 후 먹을 디저트를 고르는 건 필수! 좀 전 회의때와는 달리 눈빛이 반짝이고 생기가 돕니다. 식사 후엔 커피 타임 30분. 오후 업무에 복귀하려니 시간은 벌써 2시가 됩니다.
이런 직장의 일상이 반복되면, 복지의 무게는 나아가 기업의 생산성을 희미하게 만들고, 결국 국가의 허리를 짓누르게 됩니다.
2. 일상의 비효율
화장실 수리기간 11개월. 인터넷 설치기간 3주.
8년간 살면서 겪은 파리에서 서비스를 받는 데 걸리는 시간입니다. 서비스의 질을 따지기 전에, 그 느림의 속도부터가 비현실적입니다.
집 열쇠 꾸러미는 기본 세 개. 현관 열쇠, 주차장 열쇠, Cave 창고 열쇠. 자전거나 자동차 열쇠까지 합치면... 늘 쇳덩이 꾸러미를 들고 다닙니다. 디지털키, 지문인식장치? 그런 건 '미학을 해치는 기술'이라며 거부합니다. 기술이 사치가 아니라, 그냥 안 합니다. 프랑스인들이 자랑스러워하는 파리의 오스만 양식 집 구조에 최신 기술이 들어가는 건 '모욕'이라고 여기는 듯합니다. 늘 살아온 대로 살아가다 보니, 비효율이 프랑스의 핵심 라이프스타일이 된 지 오래되었죠. 동전은 여전히 활발히 사용되고, 변화가 주는 실용성은 철저히 무시됩니다. 과거의 영광을 고수하는 것이 미덕이라 믿는 그들만의 높은 콧대. 프랑스입니다.
문제는 그 비효율의 낭만과 아날로그적 위트가 지금의 경제 현실과 생산성을 필요로 하는 디지털 시대에는 너무 상반된 점이라는 거죠. 느림의 미학이 반복되고 이것들이 모이면 구성원들의 생산성, 나아가 국가의 경쟁력은 점점 퇴색될 수 있습니다.
3. 늘 지금처럼
파리를 대표하는 유명한 제과점이든, 동네의 흔한 빵집이든 메뉴는 한결같습니다. 문구점을 가봐도 학생 용품은 작년 재작년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초등학교 학기말 학예회 공연에는 프랑스 음악이 아닌 미국의 그것도 80-90년대 팝송을 지난 4년간 사용합니다. 유행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백화점이나 명품거리를 제하면 프랑스 현지인들의 삶의 거리는 다채로움이 없습니다.
일상의 콘텐츠가 수십 년째 그대로입니다.
아침엔 바게트, 오후엔 비슷한 메뉴의 간식타임. 저녁에는 테이블 와인과 함께 식사. 매년 열리는 크리스마스 마켓도 항상 같은 테마와 먹거리들로 변화가 없습니다. 2월 휴가엔 알프스 스키장으로 고고. 5월 휴가엔 별장으로 우르르. 8월 바캉스에는 코르시카섬이나 남프랑스로 몰립니다. 8년 동안 살면서 늘 프랑스 친구들의 연중행사는 똑같았습니다. 오히려 옆나라 영국은 소비재나 마트 브랜드 간 물건들도 더 경쟁적으로 구비하고 디지털 서비스도 빠르게 도입된 거 같습니다.
디지털 경제를 넘어 AI 경제로 넘어서는 지금. 아직도 프랑스는 늘 지금처럼을 고집하며, 바게트와 와인에 머문듯합니다.
프랑스에서 태어나, 배우고, 일하고, 생을 마감한다면 문제는 없습니다. 풍부한 자원과 비옥한 국토 그리고 조상들이 물려준 엄청난 문화유산들이 있죠. 하지만 글로벌 경쟁 속에서 생산성과 창의성이 요구되는 시대에, 프랑스의 라이프스타일은 더 이상 낭만이 아닌 리스크입니다. 가정경제도 수입은 그대로인데 지출만 늘면 결국 파산하듯, 국가도 마찬가지겠죠. 허리띠를 졸라매는 것만으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프랑스의 재정 위기는 단순한 숫자의 문제가 아닌 거 같습니다.. 삶의 깊숙한 곳에 뿌리내린 ‘변화를 거부하는 문화’가 만든 구조적인 위기인 거 같습니다. 이제는 바게트를 내려놓고, 현실을 마주할 시간입니다. 낭만은 아름답지만, 낭만만으로는 국가를 지탱할 수 없습니다.
제가 너무나도 사랑하는 프랑스. 지금의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