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영국의 낯익은 사교육 풍경

그래머 스쿨을 둘러싼 영국 입시경쟁 이야기

by 이제 Primary

영국 그래머 스쿨(Grammar school) 그리고 입시 스트레스에 대한 얘기입니다.


올해 초 영국으로 이주 두어 달 전 미리 방문해 거주할 곳을 알아보는 'look see trip' 기간이었습니다. 낯선 도시, 생소한 환경에 적응도 하기전, 가족의 새 보금자리를 찾는 것은 쉽지 않은 과정인데요, 가장 고려된 사항은 뭐니 뭐니 해도 학군이었습니다. 목표하는 거주지 학교 검색 -> 전학 가능한 학교 리스트업 -> 학교 평판 및 진학률 조사 -> 해당 학교 관할 지역 내에 집 알아보기 -> 매물 및 예산에 따라 진행. 이런 순입니다. (실제로는 더 정교한 학교별 분석과 임장 및 계약의 기술, 그리고 운이 필요하죠..)


영국에서 초등학교 (primary school) 취학 아동이 있는 집이라면 현지인이든, 저처럼 이주민이든, 바로 학세권이 가장 중요합니다. 차량이동이 대부분이고 생활패턴과 거주형태도 한국과는 달라, 역세권, 슬세권 같은 개념은 영국에서는 전무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허나, 학세권은 확실히 있습니다. 사실 중국, 홍콩, 프랑스를 살아보며 느낀바로, 거의 대부분의 나라에 공통으로 적용되는 부동산 입지라 하면 학세권이 유일할 거 같습니다.


사립학교나 특수학교를 제외하고 취학아동들의 90% 이상이 다니는 영국 일반 공립학교의 경우, 학세권이라는 입지에 부동산 가격을 결정짓는 주요한 학교 유형이 하나 있습니다. 정부에서 지원하는 무상교육이며, 동시에 높은 우수대학 진학률 그리고 때론 사립학교 버금가는 학교시설과 프로그램을 갖춘 영국의 국립 명문 중등학교.


그래머 스쿨(Grammar school)입니다.


우선 영국의 학제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자면. 우리의 초등학교에 해당하는 Primary school을 졸업하고 중등학교로 진학합니다. 영국 중등학교 (아래 그림 파란 부분)는 한국의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합친 개념입니다. 만 11세 (한국은 만 13세)부터 시작되는 5년간의 의무교육이며, 학교유형이 여럿 있는데 한국과 같이 복잡 세분화 (자율중, 특성화중, 특목고, 자사고 등) 되어 있진 않습니다. 물론 학년이 올라가면 대학진학여부에 따라 중등학교 졸업시험을 치고, Sixth form이라 불리는 대학진학 준비 과정을 밟게 되는 등 학제나 진학선별 방식이 다소 복잡해지기도 합니다.


화면 캡처 2025-08-17 111313.png


영국 중등학교의 시작점에는 학교 유형에 따라 입학방식이 별도로 존재하기도 하는데요. 이 가운데 한국의 공립학교처럼 정부가 지원하는 의무 교육 체계에 포함되어 있으나, 자체적인 선발시험을 치러야 입학할 수 있는 학교가 그래머 스쿨(Grammar school)입니다.


공사립 구분 없이 성적으로 선발하는 학교를 말하며, 상위 10-20% 이내 우수학생들이 모이며, 대학진학률이 높아 입학경쟁률이 높은 인기 학교입니다. 영국은 사립학교 진학비율이 꽤 높은 편인데 (학생수의 약 7%. 한국은 1-2%), 비싼 학비와 사립학교에 최근의 다소 과한 정부의 규제 (교육의 형평성 차원)가 실행되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탁월한 학교 인프라와 정부 지원에 사립학교 수준의 교육혜택도 (물론 사립학교와 직접 비교는 불가하죠) 누릴 수 있는 공립학교인 그래머 스쿨. 사는 지역에 이 같은 학교가 있다면, 대부분의 학부모들이 고려해 보는 선택지인 거 같습니다.


화면 캡처 2025-08-17 111543.png


근데 왜 '그래머 스쿨' (Grammar school)이라고 부를까요?

그래머 스쿨은 원래 라틴어 문법을 가르치던 학교에서 유래한 이름이라고 합니다. 중세 시대부터 이 학교들은 고등 교육이나 성직자 양성을 위한 준비 과정으로 설립되었습니다. 고전교육체계가 문법(grammar)-논리(logic)-수사(rhetoric) 이렇게 3단계로 나눠지는데 그중 첫 단계이며, 당시 교회나 수도원에 부속된 학교에서 라틴어는 학문, 법률, 종교의 공통 언어이었다고 합니다. 이후, 19세기부터 오늘날까지 수학, 과학, 현대 언어등의 교육범위가 확대되었고, 학업성취도가 높은 학생을 선발하는 중등학교로 발전되었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국립 명문 중등학교라고 칭할 수 있는데, 라틴어가 중심과목이 아니지만 이름은 그래도 유지되고 있네요.


Captur2e.PNG


'트라포드 그래머 스쿨 입시의 그림자 : 경쟁, 거짓말, 분열의 현장'


요즘 이런 제목류의 기사글들을 자주 접하게 됩니다. 지역언론들이 지나치게 경쟁적이고 불공정한 구조로 변질되고 있는 입학 시스템을 우려하는 목소리인데요. 인기 있는 학교 유형이다 보니, 경쟁적인 준비과정에 잡음이 생기는 건 당연하겠죠. 일부 가정은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과외선생님을 고용해 시험에 대비하고, 여름방학 동안 심화캠프에 보내는 등 그래머 스쿨만을 위한 지역 내 사교육 시장이 빠르게 확산 중이라고 합니다.


문제는 시간과 비용의 부담으로 일부 학부모들은 정서적, 경제적으로 고통을 겪고 있다고 합니다. 지역 배정 (catchment area)을 철저히 지키는 입학 조건이기에, 때론 은밀하게 불법적 경쟁도 이뤄지는데, 허위 주소지 사용, 이중 거주 등으로 입학 취소 사례도 발생하고, 단지 입학을 위해 이주해 오는 가정들을 보고 눈살을 찌푸리기도 한다고 합니다. 과열된 학부모 커뮤니티 내 고의 누설이나 비방 등 학부모간의 암투적 행동이 일어나고요. 학부모들은 입학 시스템이 주는 압박과 다소 불공정한 준비과정을 인식하면서도, 결국은 자녀를 위해 비싼 주거비와 과외비를 감당하면서도 '탈출할 수 없는 장벽'이라는 현실을 부정할 수 없다고 합니다.


''학부모들 모두가 11 Plus (그래머 스쿨 입학시험) 준비에 혈안이 되어 있죠. 아마 저희 학교 Year 4-5 모든 아이들이 과외를 받고 있거나, 시험준비학원 (Tuition center)에 다닐 걸요. 입학시험 3-4년 전부터 많게는 일주일 세네 번씩 1:1 과외를 받는 아이도 있다네요.... 애초의 전문화된 공립학교의 취지가 이젠 너무 왜곡 되어 가고 있죠....'' - 초등학교 자녀를 둔 영국 학부모의 인터뷰...


결국 준비과정에서 자녀들은 자존감, 스트레스 문제를 겪기 쉽고, 이를 지켜보는 학부모와 선생님들도 안타까운 심정이 많은데요. 작년에 근처 그래머 스쿨에 입학한 아이의 부모 얘기를 들어보면 한 학년 200여 명의 출신 초등학교(primary school) 수가 거의 학생수에 가깝다고 합니다. 그 말인즉 해당 지역을 넘어, 주변 타운의 각 학교에 우수학생들이 대부분 입학했다는 얘기인데요. 실제로 방과 후 멀리서 통학하는 아이들의 경우 귀가하기 바쁜 경우가 많아, 급우들 간의 교류가 빈약하다며, 지나치게 경쟁적인 학습 분위기가 우려스럽다고 하네요.


그래머 스쿨의 인기와 입시스트레스는, 영국 학부모들의 교육열이라고 볼 수도 있겠으나, 실상은 인도계, 아시아계 (특히, 홍콩) 학부모들이 이런 현상을 심화시킨다고 합니다. 2019년 우산혁명 이후 많은 홍콩시민들이 영국으로 이주해 왔고, 인도인들과 더불어 이들은 교육열이 꽤 높은 성향의 국민들입니다. 실제로 제가 있는 맨체스터 지역 7개 그래머 스쿨 중 한 학교의 홈페이지에는 대부분의 홍보사진이 인도학생들입니다. 심지어 동네에 꽤 소문이 난 입시준비학원과 과외선생님들을 보면 똘똘한(?) 인도인들이 독점적인 지위를 갖고 있습니다.


그래머 스쿨 입학을 위한 경쟁은 지역 내 불평등도 야기하는데요, 그래머 스쿨로 인재가 유입되면, 기준 이하 학력이 남은 지역 공립학교의 질이 하락한다는 우려입니다. Cathchment area에 속해 있어야 진학에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에 비싼 가격부담을 안고 해당지역으로 이사를 하거나, 그렇지 못한 가정에게는 질 높은 교육기회가 상대적으로 주어지기 어려운 경우도 존재하죠. 결과적으로 사교육 시장이 커지고, 더불어 학부모의 경제적 부담, 그리고 준비하는 학생들의 정서적 스트레스로 연결되는 분위기입니다.


Captu44re.PNG


위에 언급한 영국의 그래머 스쿨 입시경쟁의 풍경들은, 사실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합니다. 자타공인 사교육 1등 국가, 한국과 비교하면 오히려 '순한 맛'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AI, 로보틱스 등 직업의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속에서 우리는 여전히 '좋은 학교'라는 오래된 나침반을 따라 움직입니다. 그래머 스쿨이 있는 학군지에는 오늘도 과외 시간에 맞춰 바삐 학원으로 향하는 아이들과, 열심히 입시 전략을 짜는 학부모들이 분주히 살아갑니다. 결국, 시대는 바뀌어도 입시는 여전히 '가족 단위 그리고 글로벌적인 현상'입니다. 그리고 그 풍경은, 영국에서도 한국에서도, 놀랍도록 비슷합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프랑스와 영국: 휴가의 온도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