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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많은 지구종을 위하여

서평: <씨앗을 뿌리는 사람의 우화>

by 무순

이 글은 아래 책에 대한 서평이다

: 옥타비아 버틀러. (2022[1993]). 씨앗을 뿌리는 사람의 우화. 장성주 옮김. 비체.


1.


국제 NGO IDMC(Internal Displacement Monitoring Centre, 국내 실향민 모니터링센터)는 매년 “국내 실향민에 관한 글로벌 보고서(Global Report on Internal Displacement, GRID)”를 발표하고 있다. GRID 2024에 따르면, 2023년 한 해 동안 재난으로 발생한 국내 실향민은 약 2,640만 명에 이른다.1) 이 수치는 전쟁으로 발생한 국내 실향민 수인 2,050만 명보다도 많은 수치이다. 세계은행이 내놓은 World Deveopment Report(세계개발보고서) 2023에 따르면, 세계 인구의 40%는 기후 변화에 강력하게 노출된 장소에 살고 있다.2) 가이아는 이제 “평화가 아닌 칼을 주러 온다.”3)


인간으로 가득 메워진 가이아(대지)는 더 이상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상징하지 않는다. 오히려 가뭄과 홍수로, 태풍과 해일로, 지진과 산불로, 생명이 아닌 죽음으로 인간을 위협한다. 그러나 인간은 한 손에는 경제, 한 손에는 과학기술을 들고 대지의 자손들을 위협한다. 혹자가 말하듯이, 우리는 “여섯 번째 대멸종의 시대”로 진입하고 있다.


우리는 어떻게 평화를 전쟁으로, 생명을 죽음으로, 젖과 꿀을 칼로 바꾸고 있는가? 물론 우리는 경제와 성장이란 이름 아래 칼을 휘두른다. 나무를 베고, 강줄기를 바꾸고, 바다를 메운다. 아니다, 경제와 성장은 오히려 도구이다. 우리는 자유와 해방이란 이름 아래 그 모든 것을 해왔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게 너무 많은 자유를 부여하고, 너무나 많은 족쇄를 풀어버린 탓에 우리가 언제나 타자에 의존한다는 사실마저 잊어버렸다. 우리는 언제나 “타자로서의 존재(Being-as-other)”이다.4)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언제나 식민주의자였다. 그러나 더 이상 빈 영토는 없다(사실은 언제나 없었다). 우리는 식민화를 멈춰야 할까? 하지만 그 순간 자유와 해방도 멈추게 되는 건 아닐까?



2.


씨앗을 뿌리는 사람의 우화(이하 우화)는 주인공 로런 오야 올라미나가 디스토피아 세계에서 고군분투하는 내용이다. 황폐해진 세상, 살기 위해 서로를 약탈하고 사람들, 쾌락을 위해 살인하고 방화하는 마약중독자들, 강간당하는 여성들, 굶주림과 고통, 독자들은 로런과 같은 초공감증후군을 겪지 않더라도 디스토피아 세계의 고통을 피부로 느낄 수 있다.


웃기게도(?), 이 무너져 내리는 세상에조차 정부와 자본은 돌아간다. 물론 정부는 이미 또 다른 기업에 불과하다. 기업은 안전한 주거지와 헐값의 임금을 대가로 사람들을 끌어모은다. 사람들은 약탈과 생존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 기꺼이 자유를 헌납한다. 하지만 이것은 정말로 미래의 디스토피아인가? 어쩐지 낯설지 않은 광경이다.


작중 인물들은 언제나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한 걸음 앞이 낭떠러지인 세상에서 어찌 안 그렇겠는가? 울타리를 넘어 외부로 나갈 것인가? 북쪽으로 향할 것인가? 머물 것인가? 총을 쏠 것인가? 타자를 우리로 받아들일 것인가? 인물들은 매 순간 생존을 걸고 선택한다.


버틀러가 창조한 디스토피아는 가이아와 마찬가지로 칼, 아니 총과 화염을 가지고 온다. 우화는 오지 않은 미래이지만, 사실은 과거이자 현재이다. 우화는 존재와 생존을 다룬다.



3.


로런은 초공감증후군을 겪는 소녀이다. 그 덕분에 로런은 타인이 느끼는 신체적 고통(과 느낄 기회가 거의 없는 쾌락)을 똑같이 느낀다. 목사이자 교수인 아버지가 일군 공동체에서 로런은 언젠가 그곳을 떠날 준비를 한다. 아버지와 달리 로런은 스스로 발견한 신을 믿는다. 로런의 신은 “변화”이며, 우리는 지구종(Earthseed)이다.


그러나 로런이 스스로 공동체를 벗어나기도 전에 파국은 찾아온다. 로런보다 먼저 공동체를 벗어난 남동생은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고, 아버지는 어느 날 실종된다. 일부 주민은 기업 도시로 떠나간다. 곧 약탈자들이 공동체를 침략한다. 공동체는 살해당하고, 약탈당하고, 불타오른다. 로런은 가까스로 살아남는다.


로런은 살아남은 다른 두 사람과 함께 북쪽을 향한다. 로런은 숨겨왔던 초공감증후군과 지구종을 그들에게 공유한다. 북쪽을 향하는 동안 로런은 변화한다(그리고 일행들도 마찬가지로 변화한다). 로런에게 지구종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신념이 된다. 그리고 지구종 공동체를 만들겠다는 사명을 스스로 부여한다.


로런은 새로 일행이 된 반콜레와 사랑에 빠진다. 반콜레는 사유지를 갖고 있는 남자이며, 그곳에는 그의 여동생 가족이 살고 있다. 반콜레는 로런과 일행들을 그곳에 받아들이기로 한다. 죽음의 고비를 넘어 그들은 마침내 새로운 보금자리에 도착한다. 로런은 그곳에서 새로운 지구종 공동체를 세우기로 한다.



4.


우화는 정말로 우화일 뿐일까? 하지만 우화의 세계는 상상된 미래가 아닌 과거이자 현재로 느껴진다. 몇 가지 질문이 떠오른다. 우리는 약탈자인가? 우화 속 약탈자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다른 존재들을 약탈/의존하며 살아간다. 의존인가, 아니면 약탈인가? 노동자들을 사실상 노예화하는 기만적인 자본은 과연 디스토피아 세계의 전유물인가? 아니면 과거이자 현재인가?


버틀러는 로런의 입을 통해 지구종을 전파한다. 로런은 말한다: “하느님은 변화다. 그밖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은 우리 안에서, 서로에게서, 운명에서 찾아야 한다.”(433) 수십 년간 우리는 우상을 파괴해 왔다: 진리, 정상성, 규범 등. 로런은 우상이 파괴된 자리에 지구종이라는 새로운 우상을 세운다. 그러나 새로운 우상은 절대자가 아닌 변화하고 변질되는 우리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렇지만 세계를 불태우는 마약중독자들은 사실 우리가 아닌가? 불에 취해 쾌락 속에 불에 뛰어드는 마약중독자들처럼 우리는 끝없이 화석 연료를 불태운다. 탄소에 중독된 우리들은 더 많은 탄소를 만들기 위해 또다시 불을 붙인다.


우화가 그려낸 각자도생의 세계는 지금 우리의 세계와 크게 다르지 않다. 자유와 해방을 외쳐온 우리들이 잃어버린 단어는 ‘의존’이다. 우리는 의존하는 법을 잃어버렸다. 우리는 공동체라기보다 각자도생을 위해 파괴하고 약탈하는 기생종에 가깝다. 우리는 다시 지구종이 될 수 있을까?


그러나 로런은 대지를 보기보다 우주를 본다. 그녀는 다른 행성에 지구종의 씨를 뿌리기를 원한다. 이 순간 지구종은 오직 인간이라는 협소한 종으로 한정된다. 그리고 협소한 지구종은 다시 한번 자유와 해방을 염원한다: 지구 너머로.


하지만 우리는 지구종이다. 화성종도, 토성종도 아닌. 그리고 지구종은 단지 인간만으로 좁혀질 수 없다. 수많은 비인간종이 우리와 공생한다. 우리는 그들에게 의존한다. 의존은 인간의 자유와 해방을 가로막는다. 그러나 의존은 지구종에게 자유와 해방을 선물한다. 우리는 과잉 인간이다. 우리는 우리으로 세상을 채울 수 있다고 믿었다. 우리는 세계에서 우리 자신을 내쫓을 수 있을까? 그리고 더 많은 지구종을 위해 그 세계를 내어줄 수 있을까?



1) IDMC. (2024). Global Report on Internal Displacement. https://www.internal-displacement.org/global-report/grid2024.


2) World Bank. (2023). World Development Report 2023: Migrants, Refugees, and Societies. https://openknowledge.worldbank.org/entities/publication/5e5ac9f1-71ee-4734-825e-60966658395f.


3) Bruno Latour. (2017). Facing Gaia: Eight Lectures on the New Climate Change. Catherine Porter(trans.) Polity.


4) 브뤼노 라투르. (2023[2012]). 존재양식의 탐구: 근대인의 인류학. 황장진 옮김. 사월의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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