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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는 진보가 아닌 다양성의 증가다

서평: <풀하우스>

by 무순

이 글은 아래 책에 대한 서평이다.

: 스티븐 제이 굴드. (2002[1996]). 풀하우스. 이명희 옮김. 사이언스북스.



1.


진화론이 인류 역사에 미친 영향력은 두말하면 입이 아프다. 생명, 특히 인류에 대한 심오한 의미를 지닌 진화론이 어떻게 단순히 과학적으로만 해석될 수 있었겠는가? 인간은 다른 생명보다 더 우월할까? 더 중요하게는, 어떤 인간종은 다른 인간종보다 우월할까? 요컨대, 과학으로서 진화론은 차별을 정당화할 수 있을까?


인간은 역사를 통해 자기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만들어 왔다. 소위 세 가지 불연속이 그 예외성을 부정해 왔지만, 그럼에도 역사적 관성은 여전히 강력하게 작용한다. 덕분에 우리들은 진화론이 명백히 진화와 진보의 동일성을 거부함에도 불구하고 진화를 진보로서 정당화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사실은 다윈조차 그 간극을 메우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우리는 진보에의 믿음이 단순히 믿음에 그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소위 사회진화론은 제국 열강의 식민 지배를 정당해 왔다. (비록 그때 발원하지는 않았을지라도) 제국(주의)의 확장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 인종차별은 지금까지도 수많은 폭력과 갈등을 살찌운다. 인류의 예외성도 마찬가지이다. 진보와 오해되는 진화는 인류가 다른 종을 지배할 수 있다는 과학적 근거를 제공한다. 그 결과는 여섯 번째 대멸종이라는 거대한 죽음의 물결을 만들고 있다.


진화의 오해를 풀면 우리는 마침내 오만함을 버리고 겸손해질 수 있을까? 글쎄, 진화와 진보의 결합이 드디어 풀어지더라도, 여전히 우리는 다른 방식으로 인류의 예외성을 옹호하지 않을까? 그렇지만 부정적 전망이 진화와 진보의 디커플링(decoupling)을 부정하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시작할 수 있을까?



2.


풀하우스는 진화에 대한 오해, 즉 진화와 진보를 동일시하는 잘못된 견해를 교정하고자 한다. 풀하우스에 따르면, 진화는 “위나 아래로 움직여 가는 어떤 것이 아니라 시스템 전체의 변이 정도가 변하는 것”이다(10). 요컨대, 진화는 진보와 관련이 없다.


그렇지만 진보를 어떻게 부정할 수 있을까? 생명체들은 지금까지 더 복잡해지고, 더 똑똑해지고, 더 커지지 않았던가? 지구의 운명을 결정할 힘을 가진 우리 인간이야말로 그 증거가 아닌가? 풀하우스는 이 같은 변화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방향성에도 불구하고 그 변화는 분명히 무작위적이다. 풀하우스는 통계에 의존해 이 복잡성을 설명한다.


핵심은 다음과 같다: “다양한 개체들에 의해 이루어진 전체가 자연의 참모습”이다(13-14). 말하자면, 생명 전체가 본질이지, 그중 어떤 종, 대상, 값이 그 전체의 본질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풀하우스는 후자와 같은 플라톤적 견해(즉, 본질이 있다는 견해)를 다윈의 진화론과 대비한다.


풀하우스는 우리 인간의 예외성을 잘라낸다. 그러나 탈예외성은 결코 탈낭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풀하우스는 (통계적 벽을 넘는) 초월을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과정은 도전적이고 낭만적으로 그려진다. 풀하우스는 결코 인간적임을 빼앗아 가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를 더욱 인간적으로 만든다.



3.


풀하우스는 진화론에 대한 통념과 오류를 지적하면서 시작한다. 우리는 생명의 역사를 그리면서 자주 전체 시스템을 놓친다. 말하자면, 전체 중 일부를 선택하거나 추출하여, 그것이 전체의 본질이라고 말한다. 인간을 정점으로 하는 진화의 역사는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만약 생명의 역사가 실제로 이렇다면, 진화는 실제로 진보를 의미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풀하우스는 다윈 혁명이 여전히 완수되지 않았다고 평가한다. 즉, 너무 많은 사람, 심지어 과학자들조차 때때로 진화를 오해한다.


풀하우스는 경향성을 주의 깊게 분석한다. 진보라는 경향성이 존재하는가? 그렇다면 경향성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어떻게 경향성을 발견할 수 있는가? 풀하우스는 경향성을 해석하는 오류들을 지적한다. 첫 번째, 종종 사람들은 확률적 우연을 경향으로 이해한다. 낮은 확률을 일어날 수 없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즉, (아주 낮은 확률로) 일어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두 번째, 잘못된 인과관계를 설정하는 오류이다. 요컨대,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지만 둘 사이에는 어떤 인과관계도 없을 수 있다.2) 이 같은 오류들은 플라톤으로부터 물려받은 "변이를 물화하는 오류"를 저지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요컨대, 전체 분포에서 어떤 한 값을 정해서 그것을 전체 분포의 본질로 여기는 잘못된 믿음이다. 평균값이나 예외적인 값을 잡아 전체의 본질로 여기는 태도가 바로 이러한 오류에 속한다.


풀하우스는 기울어진 분포 곡선을 그린다. 좌우 대칭을 이룬 정규 분포 곡선이 있다. 그러나 분포 곡선은 대부분 한쪽으로 기울어진다. 즉, 변이는 확산된다. 하지만 한쪽에 벽이 있다면 어떨까? 요컨대, 더 값이 작아질 수 없는 또는 더 값이 커질 수 없는 경계가 있다면?


풀하우스는 후자로부터 시작한다. 풀하우스는 생명이나 진화와는 상당히 거리가 멀어 보이는 4할 타자 이야기를 통해 오른쪽으로 기울어진 분포 곡선을 다룬다. 왜 현대 야구에는 4할 타자가 나타나지 않을까? 타자의 수준이 과거보다 떨어졌기 때문인가? 풀하우스의 답은 오히려 그 반대이다. 4할 타자가 나타나지 않는 이유는 오히려 전체로서 야구의 질적 수준이 오히려 향상되었기 때문이다. 왜 그러한가?


풀하우스에 따르면, 규칙 제정자들은 지금까지 규칙을 바꿔감으로써 극단적인 변이값들을 제거해 왔다. 따라서 전체 타율의 평균값은 가능한 한 일관되게 유지되어왔다. 그런데 조사된 값을 보면, 평균값이 대개 일정할 뿐 아니라 그 아래 값들이 대개 높아져 왔음을 알 수 있다. 요컨대, 극단적으로 낮은 값들은 많이 사라졌고, 많은 타자의 타율이 평균값 근처에서 형성된다. 평균값이 일정하고 그 아래 타율들이 높아진다면, 바대로 평균값보다 높은 타율들을 평균값 근처로 딸려 내려와야 한다.


따라서 현대 야구의 분포 곡선을 보면, 극단적 변이들이 줄어들고 야구 선수들의 타율은 평균값 근처로 몰리게 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분포 곡선의 오른쪽 벽을 볼 수 있다. 즉, 4할 타자가 나오지 않는 이유는 타자의 질적 수준이 떨어졌기 때문이 아니다. 4할이 분포 곡선의 오른쪽 벽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전체를 기준으로 분포 곡선을 해석한다면, 타자들의 질적 수준은 향상되었다.


물론 어떻게 타자들의 수준만 향상되겠는가? 투수와 야수들, 그리고 그들을 뒷받침하는 다양한 요소들도 향상되었다. 말하자면, 평균 아래 변이는 값이 증가한 반면 극단적으로 오른쪽에 있는 변이의 값은 줄어든다. 즉, 4할 타자가 나오지 않는 이유는 타자의 질적 수준이 하락했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 즉 야구 전체의 수준이 향상되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왼쪽에 벽이 있다면 어떨까? 예를 들어, 질병의 치유 기간을 보라(굴드의 개인적 사례). 암 환자가 암에 걸리자마자 사망한다면, 그 값은 0이다. 반면, 암에 걸린 환자는 언제 죽을지 모른다. 심지어 예상을 깨고 계속 살아남을 수도 있다. 요컨대, 오른쪽 값은 열린 상태가 된다.


핵심은 여기에 있다. 만약 왼쪽에 벽이 있다면, 그 값은 반드시 오른쪽으로 진행하게 된다. 풀하우스는 주정뱅이를 예시로 든다. 왼쪽이 벽으로 막힌 주정뱅이가 왼쪽 또는 오른쪽으로만 길을 간다고 생각해 보자. 한쪽이 막혀 있기 때문에 어느 쪽으로 향하든 결국은 벽이 없은 오른쪽으로 가게 될 것이다.


생명이 바로 그러하다. 생명의 크기나 복잡성에는 더 낮아질 수 없는 한계가 있다. 즉, 생명 전체의 분포 곡선에는 왼쪽 벽이 있다. 따라서 무작위 확률로 진화가 이뤄지더라도, 생명은 결국 더 커지고 복잡해지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여기에서 풀하우스는 무작위 확률이 하나의 경향으로 나타날 수 있음을 성공적으로 보여준다. 따라서 진보적 경향은 없다. 무작위적 변화가 있을 뿐이다.


오히려 풀하우스는 가장 작은 존재들, 즉 박테리아에 초점을 맞춘다. 박테리아의 수와 다양성을 보라. 만약 지구의 지배종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박테리아뿐이다. 즉, 한 값을 물화하지 않고 전체 시스템(분포 곡선)을 읽는다면, 우리는 왼쪽 벽 근처에서 진정으로 지배적일 수 있는 변이들을 발견할 것이다. 인간은 곡선 오른쪽에 위치한 소수일 뿐이다.



4.


풀하우스는 통계에 근거해 진화에 대한 오해를 손쉽게 풀어낸다. 풀하우스는 그동안의 어떤 노력보다도 쉽고 간결하게 진화와 진보를 디커플링한다. 책을 세심히 읽은 독자라면, 누구도 풀하우스의 주장을 납득하게 될 것이다.


풀하우스는 누군가에게 인간의 예외성을 무너뜨리기 위한 이단적 책으로 읽힐 수도 있지만, 내 생각에는 그렇지 않다. 풀하우스가 말하듯이, 생명의 역사를 다시 시작한다면, 인간이란 종은 탄생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무작위 확률에서 태어난 매우 예외적인 종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우리는 실제로 예외적이다. 다만, 다른 종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특별할 뿐이다.


한 가지 우려는 풀하우스가 시스템으로서 생명을 주의 깊게 드러냄에도 불구하고, 생명을 다소 수동적으로 만드는 듯 보인다는 사실이다. 진화는 단순히 무작위적 변화일 뿐인가? 생명들은 환경을 바꾸고 환경은 생명을 바꾼다. 생명은 수동적으로 변화에 순응하거나 도태되는 존재가 아니라 능동적으로 변화를 만들 수 있는 존재이다. 풀하우스의 저자가 이 문장을 부정하리라고 생각되지는 않지만, 시스템으로서 생명의 능동성, 자발성, 행위성, 주체성은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을까?



5.

개념어들

- 중심 경향성을 나타내는 척도로서 세 가지가 제시된다.

①평균값: 자료 전체의 합을 자료의 개수로 나눈 값

②최빈값: 가장 많은 빈도로 나타나는 값

③중간값: 통계집단의 변량을 크기의 순서로 늘어 놓았을 때, 중앙에 위치하는 값



1) 풀하우스, p.33-35; 브루스 매즐리시. 네 번째 불연속: 인간과 기계의 공진화. 김희봉 옮김. 사이언스북스.


2) 예를 들어, 여름날 아이스크림 판매량이 증가한다고 해서, 아이스크림 판매량과 강우량 사이에 어떤 인과관계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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