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도 못하고 끝난 결혼 10
현재는 주말에 그냥 강원도에서 쉬고 싶다며 주말에 서울에 오지 않겠다고 했다. 그 주말도 그 여자와 함께하기 위해서였겠지. 불륜 사실을 알고 있다는 말은 전화나 메시지로 주고받기엔 너무 무거운 주제이기에 직접 만나서 얘기하고 싶었다. 그가 못 온다던 그 주 금요일, 상간녀와 통화를 끝내자마자 현재에게 연락했다.
"너 나한테 할 말 있을 것 같은데."
"...자기 생각은 뭐야? 자기가 지금 나한테 물어보는 게 뭐야?"
그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그리고 모든 걸 들킨 사람 치고는 전혀 미안함이 없었다.
"왜 모른척해? 내가 언제까지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
"자기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런 거 아닌데. 자기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모르겠는데, 오늘 만나서 나한테 뭔 얘기를 하려고 한거야?"
뻔뻔한 건 상간녀가 아니라 현재였다.
"나 다 알고 있어, 너 맨날 나한테 거짓말한 거. 난 오늘 이거 얼굴 보고 얘기하고 싶어. 근데 넌 당연히 이번 주말에도 바쁘겠지?"
"그런 거 아니야... 이번 주는 진짜 그냥 쉬려고 한 거였어."
"무슨 생각으로 그 짓거리하면서 나를 거기로 데려가려고 했는지도 궁금하고. 언제까지 그러려고 했어?"
"그런 거 아니야 자기야."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나랑 결혼을 하고 신혼여행 간 거야? 내가 그렇게 우스워 보였어? 즐거웠니?"
"그런 거 아니야 진짜..."
아니긴 뭐가 아니라는 걸까. 그런 거 아니란 말은 바람피우는 남자들의 무슨 레퍼토리 같은 건가 보다.
"근데 다 알고 있었는데 지금 얘기하는 이유가 뭐야?"
미안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그의 태도에 말문이 막혔다. 소시오패스 같았다.
"이제 준비가 다 돼서."
현재는 자기의 행동에 따라 그 준비와 결정이 바뀔 수도 있냐고 물었다. 이제 그 여자애가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해 뭐든 할 것이었다.
그러면서 자기를 한 번만 더 믿으라면 믿을 수 있겠냐고 했다. 다 순간적이었던 거고, 나랑 헤어진다고 해도 그 여자랑 뭘 다시 시작해 볼 생각도 없었단다. 그리고 계속 마음 다잡고 있었다고. 내가 저 말을, 자기를 믿을 거라고 생각한 걸까? 그는 통화 끝에 당장 서울로 오겠다고 했다. 그런데 전화를 끊고 생각해 보니, 그는 통화 내내 나에게 미안하다는 말은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집 근처 카페에서 만난 현재는 역시 사과하러 온 게 아니었다. 내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가 궁금해서 그걸 떠보려고, 혹은 내가 그 둘에게 법적으로 어떤 대응을 할지 모르니 어떻게든 살 궁리를 하기 위해 내 반응을 보러 온 모양이었다. 운전하는 길에 그 여자애한테 연락이 와서 둘의 사이는 다 끝냈다고 했다. 난 그걸 믿을 수도 없고, 당장 상간소송을 하겠다고 하자 그는 한 번만 자기를 봐서 참아달라며 나에게 빌었다. 널 봐서 봐주는 건 아니지만 합의로 다 덮고 마무리하겠다는 하는 나에게 그는 또 한 번 빌었다. 그냥 그런 거 없이 넘어가 주면 안 되겠냐며. 도대체 널 어딜 봐서 봐줘야 하는 걸까. 그는 합의금 3천을 부르는 나를 합의 무마를 위해 설득하다가, 나중에는 자기가 그 3천만 원을 상간녀에게 도와주겠다는 설득을 하기 시작했다.
"선민아, 제발... 나를 봐서 한 번만 참아줘."
"너 걔랑 그렇게까지 깊은 사이 아니라며. 다 끝났다며. 근데 그 돈을 왜 네가 도와줘?"
"어차피 끝낼 건데, 이렇게 끝나면 내 마음에 계속 찝찝함이 남아 있을 것 같아서 그래. 걔도 나 때문에 이렇게 된 거잖아."
"너 혼자 바람피웠어? 너는 너대로 죗값을 치르고, 걔도 걔대로 대가를 받아야지. 이런 식이면 합의도 없어. 소송하면 그만이야. 나 더 할 말도 없다. 그냥 집에 갈래."
원래 유책 배우자와 상간녀가 끝난 사이인지 아닌지는 소송을 가봐야 안다고 한다. 그런데 소송이 아닌 합의 얘기를 꺼낸 것만으로도, 현재의 반응은 너무나 투명했다. 걔를 보호해 주고 싶어서 안달이 난 게 보여서 안쓰럽기까지 했다. 오는 길에 전화로 헤어졌다고? 그것도 말도 안되는 얘기고, 만약에 진짜 끝난 사이라면 이렇게까지 그 여자애를 도와줄 이유가 없지. 끝낸 게 아니라, 당장 서울로 달려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나를 설득해서 널 지켜 주겠다고 했을 것이다. 한 시간 넘게 나에게 매달리던 그는 결국 그 길로 다시 강원도로 돌아갔다.
그는 새벽까지 나에게 전화를 걸어 합의금에 대한 문제를 언급했다. 3천 전부를 도와주겠다고 했다가 2천, 안되면 천만 원이라도 도와주면 안 되겠냐고. 난 단 한 푼도 보태주지 말라고 했고,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사실 내가 어떤 말을 하든 그 돈은 현재의 주머니에서 나올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과는 별개로, 저렇게 당당하게 돈을 상간녀에게 주겠다고 하는 그의 태도가 문제였다. 게다가 합의금을 도와준다면 다시는 둘이 연락하지 않기로 한 합의 자체가 깨지는 건데. 그걸 빌미로 다시 자연스럽게 연락을 하려는 건가 싶기까지 했다.
현재 말로는 그 여자애가 사회 초년생이라 모아놓은 돈도 없고, 집에서 그렇게 큰돈을 갑자기 도움 받을 수도 없는 처지란다. 내 생각엔 서른 살은 사회 초년생이라기엔 많은 나이인 것 같은데. 그리고 서로의 집 사정까지 잘 아는 사이구나. 그렇게 기댈 데가 없으면 그런 짓은 안 했어야 하는 거 아닐까. 내가 그런 사정까지 봐줘야 하는 거니.
사실 현재에게 이 모든 걸 말하기까지 망설였던 건, 그에 대한 마음이 남아있었기에 외도 사실을 안다고 해버리면 나를 영영 떠날까 봐 두렵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그렇게 궁금했던 그의 반응을 확인하니 상황이 또렷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나에게 미안한 게 아니라 그 여자에게 미안해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