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도 못하고 끝난 결혼 11
현재는 바로 다음날 다시 나를 찾아왔다. 같이 저녁을 먹고 숙소를 잡아 들어갔는데, 나는 그가 내 핸드폰에 무슨 증거가 있는지 털어볼까 봐 한숨도 자지 못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그는 잠만 잘 잤고 내 몸엔 손끝 하나 대지 않았다. 굳이 하루만에 왜 서울까지 또 달려온 건지 궁금해하고 있는 내게 그는 이튿날 뜻밖의 질문을 했다.
"근데 합의하는 거면, 증거 자료는 어떻게 폐기되는 거야?"
아 그게 궁금했구나? 너네 둘 뒤탈이 무서운 거니.
"내가 알아서 할게. 합의하면 소송 못 거니까 이 자료는 어차피 쓸모도 없고, 나도 이거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아. 제일 먼저 지워버리고 싶은 건 나야."
그가 정말 무엇을 위해서 또 서울로 무거운 발걸음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내가 갖고 있는 증거를 확인하러 온 것도 아니고, 합의금 문제로 더 설득하러 온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내가 보고 싶어 온 것도 아닐 테니.
난 일단 현재와 함께 모은 돈을 확실히 내 돈으로 해 둬야겠다고 생각했다. 뒤로 숨겨둔 게 얼마나 더 있을지는 모르지만 내가 아는 그의 재산은, 내 전세 보증금에 보태준 돈과 1년간 같이 모은 적금, 같이 묶어둔 군인예금이 전부였다. 결혼 얘기가 오간 후에는 줄곧 같이 돈을 모아 왔었기 때문이다. 그중 군인예금을 제외하고는 다 이미 내 통장에 꽂혀있었다.
"자기야, 나 위자료로 나한테 있는 돈 다 줘. 전세금이랑 우리 토스로 모은 적금. 그렇게 할 수 있어?"
"그 돈 다 주면?"
"다 못주면 자길 못 믿지. 나랑 다시 잘해보겠다며?"
"그래... 그렇게 해. 내가 보낸 게 다 하면 6천쯤 되려나?"
"응 그 정도 되겠지."
"그래, 다 가져."
그는 나와는 달리 돈에 욕심이 없었나 보다. 아니면 내 입막음 비용쯤으로 생각한 것일려나?
진짜 본심이 궁금했다.
"자기 생각이 듣고 싶어. 나랑 진짜로 살고 싶은 건지."
"진짜야. 그게 아니면 자기 보러 왜 갔겠어."
"나는 네가 발등에 불이 떨어져서 그런 거 같거든. 맨날 그렇게 바쁘다면서 안 오더니."
"어차피 이렇게 됐으니까 하는 말인데, 진짜 그냥 한눈 팔려서 그런 거야. 지금은 끝난 사이야. 나 정말 만나는 동안 그렇게 편하게 만난 거 아니야."
불륜을 편하게 하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니? 어떻게 나한테 둘이 편하게 만난 거 아니라는 개소리를 할 수 있을까. 본인이 무슨 말을 내뱉고 있는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계속 자길 믿어 달라기에, 카톡 내역과 네이버 계정 비밀번호를 요구했다. 그는 이전 기록을 싹 지워버리고는 계정을 공유했다. 그러면 무슨 의미가 있지? 그는 이제 앞으로가 중요하지 과거가 뭐가 중요하냐며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댔다. 부부라면 통장내역이든 결제내역이든 다 보여줄 수 있어야 하는 게 맞지 않나? 그러나 그는 개인적인 시시콜콜한 것까지 전부 다 공개하고 싶지 않다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외도 말고도 그동안 내가 몰라야만 할 구린 과거가 생각보다 많았나 보다. 내가 얘를 너무 믿어왔던 것이다.
"너는 그렇게 내 뒤통수를 쳐 놓고 나한테 그렇게 미안한 거 같지가 않아."
"미안해. 너무 미안한데 나도 지금 내가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어. 그리고 내가 지금 돈이든 계정이든 다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하고 있잖아. 비번을 안 준 것도 아니고."
"난 너의 진심이 느껴지지가 않거든."
"내가 어떻게 해 줄까? 나도 하루하루 생각에 생각을 하고 있고 너한테 미안한 마음뿐이야. 앞으로 어떻게 해야 될지 고민하고 있어. 당장 내 마음 알아달라는 것도 아니야. 그리고 진짜 끝난 사이라고 여기랑은."
이렇게 걸리지 않았어도 결국은 나한테 돌아왔을 거라는 현재의 말은 진짜일까? 어차피 오래 못 갈 사이였다고, 지금이라도 자기가 나를 다 책임질 수 있게 해달라고 했다. 내가 계속 못 믿겠다고 하니 그럼 돈도 다 가지고 자기 옷도 벗기라며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란다. 내 마음 풀리는 대로 하라며.
나는 여전히 이 사람의 진심을 알 수 없었다. 그가 내어준 카카오톡과 네이버의 지워진 기록들도, 단 하루 만에 그 여자와 헤어졌다는 말도, 나에게 진심으로 미안하고 다시 잘해보자는 말도 다 나를 혼란스럽게만 했다. 그렇게 그의 말에 속아놓고도 또 그의 말에 흔들리다니.
현재가 어디까지 나를 속이고 있는지, 속으로 무슨 계산을 하고 있는지 알아차리기엔 난 그에 비해 너무 어리고 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