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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넨 인간이 아니구나.

시작도 못하고 끝난 결혼 8

by 임선민

며칠 후 현재는 서울로 왔다. 그날 새벽 나는 마지막으로 판도라의 상자를 한 번 더 열어보기로 했다. 현재의 네이버 클라우드에는 그간 둘이 나눈 카카오톡 대화내용과 주고받은 사진들이 저장되어 있었다. 딴에는 이게 엄청나게 치밀한 방법이라 생각했을 것이리라.


그들의 연락은 10월, 현재의 생일부터 시작되었다. 현재는 생일 전날에 회사 사람들과 1박 2일로 속초에 놀러 갔었다. 그 회사 동료가 다름 아닌 상간녀였다. 그리고 그날을 기점으로 둘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놀라운 사실은, 그때가 우리 결혼식 불과 2주 전이라는 것이다. 어떻게 바람을 피우는 와중에 결혼식을 진행하고 신혼여행까지 갈 생각을 한 걸까?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가족들을 다 불러놓고 인사를 하고 아무렇지 않게 행동한 거지? 뻔뻔스럽기 그지없었다. 혼인신고까지 한 마당에 무를 자신도 능력도 없었던 거겠지.


현재는 11월쯤 원주의 다른 부대로 비행을 갔다가 거기 주무관이 선물했다며 '평~생 안전비행'이라고 손글씨가 적힌 코팅된 네잎클로버를 내게 자랑한 적이 있다. 우습게도 난 그에게 그걸 부적처럼 지니고 다니라고 했었다. 헬기를 조종하는 그의 업무엔 항상 위험이 뒤따랐고, 난 그가 하늘에 있을 때마다 현재가 오늘도 안전하게 비행을 마치게 해달라고 기도하곤 했으니까. 저걸 준 그분도 좋은 마음에서 좋은 의미로 써준 거라고 생각했고. 그런데 그 주무관은 다른 부대 사람이 아닌 바로 상간녀였다.


신혼여행에서도 둘은 끊임없이 연락을 주고받고 있었다. 왜 난 눈치채지 못했을까. 별똥별이 떨어지던 날 밤, 현재는 별을 보며 그 여자에게 연락했다.

"여기는 오늘 별이 많이 보여. 별보다 더 예쁜 수정아, 널 생각하며 소원을 빌었어. 너에게 이런 상황을 겪게 해서, 너를 너무 좋아해서 너무 사랑해서 미안해. 너가 나에게 보여준 사랑이 과분하다는 걸 알면서도 염치없는 소원을 빌고 있는 나를 이해해 줘."

나와 현재는 그날 같은 하늘을 보며 다른 소원을 빌고 있었나 보다. 그의 염치없는 소원은 내가 아닌 수정이와 평생 함께 하고픈 것이었을 테고.


“내 사랑 수정아. 나보다 훨씬 속이 깊고 따뜻한 니가 어떤 마음으로 나에게 잘 다녀오라고 인사를 했는지 감히 내가 가늠할 수 없지만 그 마음이 자기를 너무 힘들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지금도 앞으로도 너만을 사랑해. “

그 여자애는 마음은 아프지만 어쩔 수 없이 마치 자기가 우리의 신혼여행을 보내준 것처럼 속 깊고 아량이 넓은 사람처럼 행동했나 보다. 스스로가 대단한 희생을 한 것처럼. 그리고 현재는 지금도, 앞으로도 내가 아니라 그녀를 사랑할 것이라 고백하고 있었다.


나와 같이 있든 없든 매 순간 현재는 내가 아닌 수정이와 함께였다. 싱가폴의 호텔에서 내가 화장실을 간 사이 현재는 로비에서 엽서에 그 여자에게 사랑한다는 편지를 써 보냈다. 너와 함께 왔으면 어땠을까 생각했다면서. 아무리 사랑에 빠졌기로서니, 사람으로서 이렇게까지 악할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정도로 나를 기만하고 있었을 줄은 몰랐기에.


둘의 대화를 보면서 그간 내가 뭔가 이상하다 느꼈던 순간들이 퍼즐처럼 맞춰지기 시작했다. 이 대위 아내를 위한 향수도, 신혼여행에서의 미피 인형도, 어울리지 않는 공주 거울도 모두 수정이를 위한 것이었겠구나. 부쩍 옷차림에 신경을 쓰길래 내가 골라준 신발과 옷도 다 내가 아닌 수정이에게 잘 보이기 위해 산 것이었구나. 차라리 말을 꺼내지나 말지. 나한테 하나하나 다 밑밥을 깔고 있었던 게 더 화가 났다. 일부러 티를 내고 싶었던 건가? 내가 알아서 떨어져 나가 주길 바란 건가?


내 예상과는 달리 그 수정이란 여자는 현재가 결혼한 사실 모두 알고 만난 것이었다. 내 얼굴로 되어있는 현재의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을 보며 불쾌하다는 언급을 하기도 했다. 그래, 물론 불쾌하셨겠지. 그런데 거기에 한 술 더 뜬 건 현재였다.

"자기한테 사랑한다고 하면서 다른 여자 사진 있는 게 싫어서 멀티 프로필을 써봤어."

나보고 다른 여자란다. 넌 누구랑 결혼을 한 거니.


현재는 평생 마음속에 간직할 수정이에게, 다시 태어난다면 그때도 꼭 너를 다시 찾을 거라고 했다. 죽어서도 사랑하겠다며. 나한테 사주던 것들을 그대로 선물했고 나한테 했던 말들, 행동들 모두를 그대로 그 여자에게 하고 있었다. 내가 사랑했던 남자가 이렇게 가벼운 사람이었다니. 대상만 바뀐 채로 복사 붙여 넣기 할 수 있는 깃털처럼 가벼운 사랑을 받고 있었구나 내가.


꽤나 웃긴 건, 그 와중에 둘은 군 소속이기에 불륜 사실이 발각되면 징계를 받을까봐 걱정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자기야 나 지금 충격받았어. 군법 교육 내용 중에 품위유지의무 위반에 불륜이 있더라?"

"5만 가지를 위반하더라도 널 사랑할 거야. 난 개기는 거 전문."

"기본 감봉에서 시작해서 대체로 무거운 처벌이 나온다는데?"

"여보는 안 다치게 내가 지켜줄게."


모든 것을 다 확인하고 나니 오히려 피가 차갑게 식고 마음이 차분해졌다. 일말의 양심도 죄책감도 없는 사람 같지 않은 것들. 너네한테 과연 품위란 게 있을까? 네가, 그 사랑하는 수정이를 어떻게 지켜줄 수 있는지 어디 한번 지켜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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