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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상현 Jul 20. 2023

[세계여행] D+18 69호수

어딜 찍어도 작품, 그러나 장염으로 최악의 마무리

파론호수 바로 다음날 69호수로 향하려면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나야 했기에 일찍 잠을 청해보려 했다. 그런데 방 바로 앞에 호스텔 공용공간이 있고 투숙객과 스태프들이 늦게까지 떠드는 바람에 잠들기가 굉장히 힘들었다. 전날에는 야간버스를 타고 넘어와 워낙 피곤했기에 9시부터 잠들고 호스텔 방에 사람들이 들어오는지도 모르고 잤는데 (비교적 잠귀가 예민한 나에게는 정말 희귀한 일이다), 이 날은 이 일의 여파인지 중간에도 몇 번 깨서 결과적으로는 푹 잔 시간은 3시간여밖에 되지 않았던 것 같다. 뭐 이런 게 불만이면 호텔방 예약하면 간단하게 해결되지만 거지여행자는 그냥 소음을 즐기며 잠들려 노력해야 한다. 출발 후 버스에서도 계속 자려고 시도했으나 역시 움직이는 차에서 잘 못 자는 나는 잠들지 못했다. 가뜩이나 다들 힘들다고 하는 69호수 트래킹을 이런 컨디션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 상당히 부담스러웠다. 



69호수로 향하는 길에는 어제도 보았던 페루 최고봉 와스카란 산이 보인다. 사진을 찍은 포인트도 상당히 고도가 높아서 별거 아닌 산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정상의 고도가 해발 6700m가 훌쩍 넘는다. 투어 일정에 아침이 포함되어 있어 산골마을 어딘가 식당에 정차했다. 일단 새벽에 산골이니 엄청나게 추운데 야외테이블에서 아침을 먹는다는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고, 또 투어에 포함된 아침인 만큼 엉성한 퀄리티에 비해 가격도 너무 높았다. 그래도 기본 아침메뉴에 고산병에 도움이 된다는 코카차를 시켜 마셨다. 파론호수에서 약간의 고산증세가 온 터라 걱정이 되어 식사 후 한국에서 챙겨간 고산병 약도 처음으로 먹었다. 



식사 후 근처에 있는 호수에 잠깐 들르는데 여기 물 색깔도 파론호수 못지않게 특이하다. 실제로 볼 때는 못 느꼈는데 사진으로 보니 크로마키로 산 아랫부분을 잘라놓은 듯 한 모습이다.



여행사 직원이 얘기하기로는 69호수 트래킹은 경주를 보는 것 같다고 했다. 사실 각자 페이스에 맞춰 올라가고 먼저 도착하면 그만큼 호수를 더 즐길 수 있기 때문에 다들 최대한 빨리 올라가려고 하는 것은 맞는 것 같다. 그래도 고도가 워낙 높아 빨리 가겠다는 마음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트래킹 시작점부터는 완만한 평야가 한동안 이어지지만 결국에는 저기 멀리 보이는 설산 바로 밑까지 올라가야 69호수를 마주할 수 있다. 빙하 녹은 물이 흐르고 옆에서 소들이 풀을 뜯고 있는 모습을 보자니 천국의 이미지를 이런 데서 가져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대가 서서히 높아지면서 멀리 작게 꼭대기만 보이던 설산의 아랫부분까지 보이기 시작하며 더욱더 풍경에 압도당한다. 특히 암벽 여기저기서 떨어지는 폭포들이 경치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준다. 



폭포가 시작되는 부분 정도의 높이까지 올라가면 여기가 끝인가 하는 느낌이 들지만 이제 반정도밖에 오지 않았다. 여기에는 가이드가 ‘consolation lake’라고 표현한 작은 호수가 하나 있는데 이름이 ‘위로’인 이유는 69호수까지 가지 못한 등산객들이 여기서 위로를 받으라고 그렇게 지어졌다고 한다. 호수 뒤로는 이렇게 높은 지대에 있을 거라고 생각지도 못한 넓은 평야가 다시 펼쳐지고, 그곳에서는 어디서 왔을지 모를 소들이 풀을 뜯고 있다.



특이한 모양의 선인장을 지나 가파른 오르막을 한참 오르다 보면 저기 멀리 새파란 호수가 보이기 시작한다. 구름 한 점 없는 날씨에 새파란 하늘까지 더해져 물은 더욱더 파랗게 보이고, 호수와 만년설이 반사하는 햇빛의 강렬함에 선글라스를 끼지 않고서는 몇 분 이상 풍경을 볼 수도 없을 정도다. 코카차 덕분인지 고산병약 덕분인지 어제와는 달리 아무런 고산증세도 없었고 남들이 왜들 그렇게 다 힘들다고 하는지 모를 정도로 생각보다 무난하게 올라온 느낌이다. 딱 보람을 느낄 정도의 힘듦이 아니었나 싶다.


하산 출발 시간까지 1시간 여가 남았기 때문에 호수 사진이나 슬슬 찍어가며 멍하니 있고 싶었는데 한 미국 여행객이 말을 걸었다. 군인이었다길래 군대토크나 좀 하다 자기가 예전에 사진 작업을 많이 했다고 사진을 찍어주자고 얘기했다. 아마 애초부터 사진 찍어줄 사람이 필요해서 접근한 것 같다. 외국애들답지 않게 꽤나 열정적으로 사진 구도도 정해주고 포즈에도 진심인데 정말 이런 말 하기 그렇지만 사진을 너무 못 찍는다. 사진 못 찍는 나도 최대한 카메라를 위로하고 전경이 담기게 하면 기본적인 결과물들은 만들어 낼 수 있는데 자꾸 바닥 시점으로 찍어야 한다면서 카메라를 내리고 사진 가득 사람만 찍어놔서 체형도 기형적이고 배경도 의미 없게 찍는다. 외국인과 한국인들의 사진의 차이는 이것 같다. 한국인들은 예쁜 배경 속의 사람을 찍고 싶어 하고 외국인들은 배경이 뭐든 그냥 사람을 찍는데만 신경 쓴다. 그러니 배경이 뭐던 간에 사람만 쓸데없이 크게 나온다. 


슬슬 지치는데 사진에 진심인 친구라 계속 서로 찍어주다 보니 어느새 하산시간이 되었다. 정말 오랜만에 풍경이 너무 좋아 떠나기 싫은 느낌이 들었다. 너무나 아름답지만 살면서 아마도 다시는 올 일 없는 곳이기에 더 미련이 남지 않았나 싶다. 내려갈 때는 역시 훨씬 덜 힘들어서 아까 지나온 길인데도 훨씬 풍경을 즐길 수 있었다. 오히려 저 미국인 친구는 좀 힘들어하던데 나는 정말 가벼운 발걸음으로 하산했다. 올라갈 때 많이 못 찍었던 풍경 사진도 많이 찍으며 69호수 트래킹을 마무리했다. 


고생 안 하면 풍경도 예쁘게 안 보이는 변태에게 딱 적당한 수준의 고생이었던 것 같다. 역시 단체투어라 호수 자체에 있는 시간이 적어서 아쉬웠고 혼자 멍하니 즐길 수 있는 시간이 더 많았다면 좋았을 뻔했다. 그래도 트래킹 코스가 호수 못지않게 예뻐서 만족도는 최상까지는 아니어도 상당히 좋았다. 그리고 어쩌다 유명해진지는 모르겠지만 69호수에 도전하는 한국인들이 그렇게 많다는데 내 그룹에 한 명도 없던 건 좀 놀랐다.


다음 날은 오랜만에 휴식일로 정하고 체크아웃하고 떠돌기보다는 누워서 쉬고 싶었기에 호스텔을 하루 연장했다. 다음날 야간버스로 파라카스로 이동할 계획을 세우고 다음날 할 일이 필요했기에 파스토루리 빙하 투어를 예약했다. 여기부터 실수였다. 그냥 뭐가 어떻게 되던 이 날 와라즈를 떴어야 했다. 호스텔에서 쉬다 점심을 먹고 야간버스표를 사고 또 쉬다 저녁을 먹으러 나갔다. 시내를 한 바퀴 돌다 그냥 호스텔 근처에 있는 식당에 들어가 볶음밥과 감자튀김, 소시지가 같이 나오는 메뉴를 시켰다. 이 근방에 있는 식당들이 다 길에서 스피커를 틀어놓고 호객행위를 시끄럽게 하는 터라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냥 귀찮아서 들어갔다. 그런데 먹을 때부터 뭔가 느낌이 썩 편하지는 않았다. 몇 술을 뜨지 않았을 때부터 이상하게 배가 많이 부른 느낌이었고 결국에 감자튀김은 조금 남겼지만 다 먹었을 때는 속이 많이 더부룩했다. 숙소에 들어와서 잠들 때까지는 크게 불편함을 못 느끼다 중간에 깼을 때 확실하게 체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새벽부터는 설사, 미열을 동반한 장염증세가 시작되었다. 작년에 간장게장을 한 번 잘못 먹고 하루종일 장염으로 고생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그때 이후로 간장게장 사진만 봐도 메슥거리고 지금은 길을 지나가다 남미식 볶음밥과 소시지 냄새만 맡아도 속이 좋지 않다.



계속 설사가 지속되었지만 아침에 컨디션이 조금 괜찮아진 것 같아서 빙하투어에 나섰다. 미친 짓이다. 그냥 숙소에서 쉬어도 나아질까 말까 한 상황에서 하루종일 버스 타고 해발 5000m로 올라가는 투어에 참가하다니. 버스가 스팟에 정차할 때마다 화장실로 달려가고 체기로 입맛은 없어서 하루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하니 몸에 에너지가 남아날 리가 없다. 포토스팟에서 살짝 걸어 내려가고 올라오는데만 해도 죽을 것 같았고 창문 밖으로 보이는 엄청난 경치도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사진도 겨우겨우 찍었고 당시에는 풍경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는데 지금 다시 보니 멋진 풍경은 맞다.



결국 빙하로 올라가는 지점에서 다들 하차할 때 나는 몸이 좋지 않아 버스에 남아있겠다고 했다. 투어비, 국립공원 입장료 다 내놓고 빙하는 보지도 못하고 끙끙대고 있는 생쇼를 자청했다. 파스토루리 빙하 투어는 고도가 높지만 가는 길이 완만해 와라즈 트래킹 중 가장 난이도가 낮은 편에 속한다. 사진에 보이는 하얀 부분이 빙하인데 한눈에 봐도 거리가 그리 멀지 않은 것이 보인다. 그래도 그 당시 몸상태로는 도저히 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버스에는 나 말고도 현지인 할머니가 한 분 남았다. 굉장히 말이 많으신 분이었다. 얼마 알아듣지 못했지만 가족들과 같이 오셨는데 뭔지 자식자랑을 엄청 하셨고 본인은 예전에 와봐서 또 볼 필요 없어서 안 올라가시고 버스에 남아계신다고 했다. 내가 혼자 고통받고 있는 모습을 보니 고산병이라 생각하셨는지 전 세계 할머니들의 공통인 듯한 각종 민간요법을 나에게 시전 하셨다. 가방에서 호랑이 연고 같은 것을 꺼내시더니 코와 이마에 바르고 나중에는 조금 찍어서 먹으라고까지 하셨다. 거절하기가 뭔가 민망한 분위기라 그냥 시키는 대로 했다. 조금 있다 다른 할머니들도 오더니 왜 가지고 계신지 모를 손소독제 같은 알코올을 주시며 역시 코로 들이마시고 살짝 찍어 먹으라고 하니 또 순순히 시키는 대로 했다. 아마 고산병에 효과가 있다고 여겨지는 민간요법인 듯하다. 내가 고산병이 아니라 어제 먹은 음식이 잘못된 것 같다고 설명했고 알아들으신 것 같았는데 계속 권하시니 그냥 포기하고 주시는 거 다 먹고 하라는 거 다 했다. 빙하투어를 끝내고 할머니 손녀분인지 뭔지 모를 젊은 친척 여성분이 역시 고산병이라고 생각하셨는지 코카차, 코카잎, 코카사탕 등 코카 종합세트를 주셨다. 이것 또한 너무 감사하지만 나는 그냥 장염이었다.


돌아오는 길에도 들르는 곳마다 화장실로 달려갔다. 배가 아프다고 했을 때 현지인 할머니가 와라즈에 돌아가면 닭 수프를 먹으라고 하셔서 닭 수프를 시켰지만 역시 몇 입 못 먹고 다 남겼다. 도저히 들어가지가 않았다. 아파서 버스 취소하고 호스텔을 하루 더 연장할까 생각도 했지만 그냥 숙소로 돌아와 짐을 챙겨 리마행 야간버스를 탔다. 여기도 중간중간 들를 수 있는 모든 화장실에 들른 것 같다. 온몸의 수분이 다 빠져나가는 느낌이었고 물 마시는 것조차 더부룩해 에너지는 없으니 여행 중 가장 힘든 시간이었다. 이렇게 와라즈에서의 여행이 장염과 함께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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