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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상현 Jul 15. 2023

[세계여행] D+15 와라즈, 파론호수

마음이 편안해지는 도시

치클라요, 이 망할 도시는 끝까지 나를 곱게 보내주지 않는다. 다음 행선지를 페루 고산 트래킹의 베이스캠프 격인 와라즈로 정하고 여유 있게 체크아웃 시간에 맞춰서 경유지인 트루히요행 버스를 타고 치클라요를 뜨기로 했다. 아침을 먹고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정말 아무 생각도 없이 첫날 도착했던 버스 터미널로 걸어갔다. 가는 길에 모토택시 흥정이 붙길래 얼마냐고 물어봐서 4솔이라기에 그냥 보냈다. 일반적인 가격인 것 같았지만 그냥 한 번 거절해 보고 싶었다. 두 번째로 붙는 툭툭 기사가 5솔을 부르길래 3솔이면 간다고 하니 4솔을 불렀다. 됐다고 하니 다시 붙잡고 3솔에 가는 것으로 합의를 봤다. 그런데 목적지인 터미널을 얘기해 주어도 기사가 한 번에 어디인지를 파악하지 못했다. 이 때라도 이상함을 눈치챘어야 했다. 모래먼지 날리는 치클라요의 외곽을 달려 터미널에 도착하니 그곳 택시기사들이 늘 그렇듯 에서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어디로 가냐고 묻기에 터미널 직원인 줄 알고 트루히요로 간다고 하니 여기가 아니라 시내에 있는 다른 터미널로 가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알고 보니 여기는 에콰도르에서 내려오는 국제선 버스만 서는 정류장이라고 한다. 기사가 10솔에 가주겠다는 말을 너무 비싸다고 하며 일단 튕기고 터미널 안으로 들어와 직원에게도 물어보니 택시기사가 얘기했던 터미널로 가는 것이 맞다고 했다. 그리고 외국인인 내가 호구 잡힐 것이 걱정됐는지 그곳까지 가는데 10솔 이상 주지 말라고 조언도 해 주었다. 


아까 10솔이 비싸다고 거절한 터라 살짝 민망하긴 했지만 아까 그 택시기사에게 다른 터미널로 가자고 하고 출발했다. 애초에 숙소에서 그렇게 먼 거리가 아니었던 터라 조금만 조사하고 나왔으면 걸어가고 왕복 모토택시비도 아꼈을 텐데 한심한 짓을 벌였다. 그래도 버스를 예매해 놓지 않아서 다행이다. 오토바이 뒤에 달린 모토택시는 매연까지 내뿜어서 모래먼지와 번갈아가며 들이마시느라 고통스러웠다. 마지막까지 임팩트는 확실한 치클라요다.



페루에서는 터미널에서 버스표를 구매할 때 좌석을 선택할 수 있는데 정신없이 아무 자리나 고르다 보니 평소에는 절대 안 앉는 복도자리에 앉았다. 창밖을 보는데 시판 갈 때 봤던 사막과 돌산의 조합이 몇 시간 내내 펼쳐졌다. 마치 배틀그라운드 미라마 맵 같은 지형이었다. 이곳에 오기 전에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풍경이기에 복도 좌석에서 슬쩍슬쩍 보다 나중에는 그냥 빈 창가 좌석으로 자리를 옮겨 멍하니 바라봤다. 


트루히요에서 와라즈로 가려면 내린 곳과는 또 다른 터미널로 이동해야 했다. 물론 이 정보도 내린 다음에 터미널에서 서성대다 와라즈행 버스가 안 보여서 검색해서 알아냈다. 걸어가기에는 좀 부담스러운 거리라 가격도 얼마 안 하길래 11솔정도에 우버를 불러 이동했다. 출발 전에 버스 앱으로 봤을 때는 분명 4자리가 남아있던 터라 별생각 없었는데 터미널에 도착해 앱을 다시 열어보니 한 자리밖에 남아있지 않아 마음이 급해졌다. 일단 핸드폰으로 마지막 남은 자리 결제창을 띄워 예약을 걸어놓고 터미널 직원에게 물어보니 내가 본 차보다 15분 정도 늦게 출발하는 15솔 비싼 좌석을 띄워주었다. 이 좌석도 그 버스의 마지막 자리였다. 여기서 그냥 됐다 하고 핸드폰으로 예약하거나, 핸드폰으로 결제창을 닫아 예약상태를 해제하고 다시 봐달라고 얘기하면 됐을 텐데 얼타느라 그냥 띄워준 좌석을 결제했다. 한국 돈으로 하면 그렇게 큰 차이도 아니고 버스 등급이 달라서 더 비싼 좌석이라 더 편하게 온 것이라 믿는 게 속이 편할 것 같다.


이미 해가 거의 진 상황이지만 어디선가 트루히요가 매우 안전한 도시라고 읽은 기억이 있어 큰 부담 없이 저녁 식당을 찾아 걸아 다녀보니 얼마 안 가 대형 쇼핑몰이 하나 나왔다. 안에 영화관, 브랜드 매장, 푸드코트 등이 있는 상당히 큰 몰이었는데 이런 데서 밥을 사 먹으면 뭔가 지는 느낌이 들어 다시 밖으로 나가 오늘도 역시 현지인 식당에서 닭튀김을 사 먹고 쇼핑몰로 돌아와 공짜 와이파이를 즐기며 밀렸던 사회주의 유토피아 글을 마무리했다. 8시가 넘어 해가 완전히 지고 버스정류장으로 15분여간 걸어가는데 몰 근처라 그런지, 트루히요가 정말 안전한 도시라 그런지 아이를 동반한 가족들이나 여자 혼자도 걸어 다니는 사람들이 많았다. 처음 몰로 향할 때 비어있던 식당들도 오히려 이 시간이 되니 훨씬 많이 차 있었다. 굳이 밤에 위험한 동네를 찾아가지만 않으면 역시 남미도 다 사람 사는 곳이기에 사람들이 가진 이미지같이 무법천지는 아니다. 키토에서는 해 지기 전에 숙소로 복귀해 나갈 생각도 안 했는데 안전하다는 바뇨스와 쿠엥카, 그리고 이곳 트루히요에서 밤에 돌아다니며 서서히 긴장김이 떨어지고, 이렇게 남미에 익숙해지고 있다.


페루 버스가 또 하나 신기한 점은 마치 비행기를 타는 것 같이 수하물을 받고 간이게이트를 통과해서 버스에 탄다는 것이다. 또, 출발 시간이 임박하면 예약자 중 도착하지 않은 인원들 이름도 불러준다. 고작 버스인데 뭐 저렇게까지 하나 싶기도 했다. 어쨌든 이렇게 트루히요에서 밤 10시가 다 되어 출발하고 다음날 6시 정도에 도착하는 야간버스를 타고 와라즈로 향한다. 좌석은 많이 젖혀지고 생각보다 편하지만 차에서 잘 못 자는 터라 중간에 여러 번 깨기도 했다.



와라즈에서 처음으로 느낀 것은 엄청난 추위였다. 다시 고산으로 올라왔고 시간도 해가 막 뜨던 새벽이기에 급하게 배낭에서 옷을 주섬주섬 꺼내 입어야 했다. 호스텔 체크인 시간까지 아직 많이 남았기에 짐을 미리 맡겨두고 와이파이를 조금 사용하다 동네 한 바퀴 산책을 했다. 치클라요에 있다 와서 그런지 도시가 너무나 평화롭다. 시장 쪽으로 가면 남미 특유의 활기참이 가득하지만 치클라요처럼 정신없고 무질서가 판치는 느낌은 아니다. 길을 걸을 때 멀리 도시를 감싸는 설산이 보이고 산간지방이라 전통 복장을 하고 돌아다니는 현지인들도 많이 보인다. 그리고 날씨가 너무 좋다. 정말 구름 한 점 없고 덥지도 않은 날씨라 다음날부터 진행하는 트래킹을 기대하게 만들었다.


야간버스의 여파가 있던 터라 체크인을 하고 잠시 휴식을 취한 후 호수투어도 예약할 겸 시내를 또 한 바퀴 돌았다. 묵고 있는 호스텔에서도 예약할 수 있었지만 로비에 주인이 안 보이길래 그냥 겸사겸사해서 나갔다. 대충 검색해 평점이 나쁘지 않은 한국인들이 많이 간다는 한 여행사에 들어가 설명을 들었다. 굉장히 프로페셔널하게 투어상품 외에도 혼자 할 수 있는 트래킹이나 다른 옵션들을 많이 알려주었다. 사실 사람들이 많이 하는 파론호수나 69호수 투어는 여행사 자체 상품이 아니라 와라즈 전체 여행사에서 연합해서 한 번에 같이 진행하는 프로그램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투어사 자체 코스들도 소개해 줬는데 솔깃했지만 결정적으로 가격이 너무 비싸서 포기했다. 초저예산 여행에 트래킹 하나에 200달러씩 쓸 여유는 없다. 1시간 정도를 굉장히 전문적이고 영어도 능숙하던 직원과 농담 따먹기도 하며 재밌게 상담시간을 보내고 결국은 그냥 남들 다 예약하는 파론, 69호수 투어만 예약하고 나왔다. 시내에서 투어 중에 먹을 간식과 물을 사고 호스텔에서 일찍 잠들며 와라즈의 첫날이 끝났다.


다음 날 파론호수 투어를 위해 아침을 먹으려 호스텔 로비에 내려오니 상당히 오랜만에 보는 누가 봐도 한국인인 것 같은 여행자 2명이 있었다. 나는 보통 이럴 때 굳이 한국인인 척하지 않기에 잠자코 내 아침을 열심히 먹었다. 나중에 들어보니 오히려 옆에 있던 스위스 친구들과 말을 트게 되어서 독일어로 신나게 떠들고 있었으니 내가 한국인이라고는 짐작도 못 했다고 한다. 그러다 한 분이 아침 먹은 접시 처리를 고민하길래 그냥 한국말로 알려드리니 두 분 다 상당히 놀라셨다. 하긴 언어도 언어지만 행색이나 머리스타일도 딱히 신경 안 쓰다 보니 한국인 같지 않다는 말은 늘 자주 듣는다. 마침 같은 파론호수로 향해 키토 이후에 정말 오랜만에 한국인 동행이 생겼다.



버스에서 오랜만에 한국말로 신나게 떠들다 보니 버스는 산비탈을 타고 천천히 4시간여를 달려 파론호수에 도착했다. 호수까지는 걸을 것도 없이 바로 앞에 주차장에서 내려준다. 가이드가 시간을 계속 강조하는데 호수에서는 총 2시간을 보낼 예정이라 시간이 짧으니 도착 후 바로 전망대로 올라가라고 얘기한다. 경치와 물 색은 듣던 대로 아름다웠다. 조금 느리던 동행을 기다리느라 천천히 전망대로 올라가니 처음으로 고산 증세가 나타났다. 해발 4000m 킬로토아에서도 큰 증상이 없었기에 자신만만해하고 있었는데 4300m쯤에 위치한 전망대로 가파른 돌길을 걸어 오르다 보니 귀 쪽에 강한 압력과 그로 인한 살짝의 두통까지 느껴졌다. 그래도 조금 시간이 지나니 사라지긴 했다. 또 하나 파론호수의 치명적인 단점은 파리가 너무 많다. 해발 4300m에서 파리가 설치는 것도 골 때리는데 얘네들이 사람들에게 계속 달라붙고 심지어 누구는 물리기까지 했다고 한다. 



전망대에서 보는 물 색은 아래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하늘색 물감을 풀어놓은 듯했다. 색깔이 불투명하니 물의 흔들림도 거의 보이지 않아 마치 정지된 모습을 보는 듯했다. 동행 한 명이 두통 때문에 쉬는 사이 열심히 기념사진을 남겼다. 역시 한국인들은 사진에 진심이고 확실히 사진을 잘 찍기는 한다. 나는 평소에 내가 나오는 사진을 많이 찍는 편은 아니라 상당히 어색했지만 동행이 포즈까지 디렉팅 해주며 좋은 사진들을 남겨주었다. 키토에서부터 느꼈지만 내 핸드폰 카메라가 맑은 하늘의 색을 기가 막히게 담아낸다. 육안으로 보는 것보다 카메라의 결과물이 훨씬 파랗고 선명하게 나온다. 오죽하면 아이폰을 쓰던 동행이 내 카메라로 찍어달라고 부탁할 정도였다. 군대에서 원래 핸드폰이 깨져서 급하게 산 중고 저가형 갤럭시가 여기서 빛을 발할 줄은 몰랐다.


워낙 천천히 올라오고 사진도 오래 찍어서 시간이 많이 지나 가이드가 내려갈 시간이라고 재촉했다. 동행들이 서로 사진을 찍는 사이 먼저 내려가고 있자는 생각에 내리막길로 들어섰는데 생각보다 너무 가파르고 미끄러웠다. 올라올 때는 분명히 이런 느낌이 아니었다고 생각이 드는 찰나 다른 길이 보였다. 지그재그로 완만하게 돌아서 내려가야 하는 길을 수직으로 내려가는 길로 잘못 들어선 것이었다. 결국 네 발로 미끄러지다시피 사서 고생을 하며 나름 지름길로 내려왔다. 이래서 앞에 누구를 보내고 뒤따라가야 한다. 내 덕에 동행들은 정상적인 길로 내려왔다. 동행들을 기다리며 천천히 내려오니 이미 출발할 시간이 다 되어 호수 아래 부분에는 가까이 가지 못했다. 


돌아가는 길에 식당에 들러 원래는 먹지 않으려던 점심을 먹고 중간에 와인테이스팅을 위해 다른 마을에도 들렀다. 와인도 모를뿐더러 그냥 귀찮아서 뒤에 서있기만 했다. 와라즈로 돌아오니 이미 해가 진 7시쯤이었다. 간단하게 저녁을 먹으려 현지 컵라면을 샀는데 맛없음의 신세계를 경험했다. 동행들은 당일 도시이동을 하기에 인사를 하고 하루를 마무리했다.


결론적으로 파론호수 투어는 비추다. 차 타는 시간만 많고 정작 호수에는 2시간밖에 머무르지 않아 뭐가 예뻤던 것 같은데 그냥 지나간 느낌이다. 가는 과정도 아무 고생 없이 호수 바로 앞에 내려주니 숟가락으로 그냥 떠먹여 주는 느낌이라 누군 좋아할 수도 있지만 나는 별로였다. 여행지에서 고생을 해야 보람을 느끼는 변태 같은 병에 걸렸나 보다. 분명 호수의 물 색, 그리고 호수를 둘러싼 설산은 절경이 맞는데 뭔가 여운이 남지 않는다. 아침에 일찍 출발하거나, 쓸데없는 점심시간이나 와인테이스팅 같은 것들을 빼 버리고 호수를 정말 즐길 수 있는 시간을 오래 주면 훨씬 보람 있다는 느낌이 들 것 같다. 이래서 자유여행이 좋지만 파론호수는 대중교통으로 갈 수 있는 방법이 아예 없기에 모든 여행자들이 울며 겨자 먹기로 단체투어를 이용하고 있다. 나에게는 차라리 오랜만에 한국사람들과 떠드는 게 훨씬 재미있었던 투어였다. 정말 예쁜 사진 한 장 건지려 가는 사람들에게는 쉽고 편한 가성비투어 느낌이겠지만 나에게는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지는 않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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