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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상현 Jul 11. 2023

노력 없이 '재능 탓'만 하는 MZ세대?

'재능 탓'에서 사회주의 유토피아를 끌어내다

이 이야기는 내가 대학교를 들어가는 과정부터 시작해야겠다. 나는 정치학이 하고 싶었고, 경제학도 같이 공부하고 싶었다. 어차피 대학교가 평준화되어 있는 독일이기에 큰 생각 없이 정치+경제 조합이 가능했던 프랑크푸르트, 뮌헨,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3곳에 지원을 했고 합격 통보를 받았다. 이 셋 중 뮌헨은 도시 자체가 너무 비싸고 입학 전에 추가시험을 요구했고 (그 당시에는 '감히 니들이 뭔데 나보고 추가시험 보러 뮌헨까지 내려오라는 거야'라는 생각이 강했다), 하이델베르크는 너무 시골이라 그냥 적당히 프랑크푸르트를 골랐다.


그런데 독일 대학교는 비록 평준화는 되어있을지언정 각 학교마다 방법론적 전통이 강하다. 정치학부를 예로 들면 만하임과 콘스탄즈는 통계적 방법을 통한 실증연구가 주를 이루고 베를린 자유대학의 경우에는 68 운동의 영향으로 좌파적 정치철학에 몰두하는 것 등이다. 내가 입학할 때까지만 해도 몰랐지만 프랑크푸르트의 정치학과는 '프랑크푸르트 학파'라 불리는 대륙철학 기반의 마르크스주의적, 유물론적 사회철학의 전통을 잇는데 대단한 자부심을 느낀다. 원래도 막연히 나 자신이 반자본주의적이고 진보적이라 생각했던 나는 처음으로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글들을 접하고 시원한 감정도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사회 모든 문제의 원인을 자본주의로 몰고 가는 이론적 체계가 다소 억지스럽게 느껴졌다.


그러던 와중에 롤스의 정의론 전부를 다루는 수업을 듣게 되었다. 롤스의 정의론은 20세기 정치철학의 가장 중요한 저서답게 방대한 주제를 다루지만 분배의 정의와 관련된 부분만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원칙적으로 사회의 제도로 인한 자원과 재화의 불평등은 모든 개인이 누리는 자유와 기회의 평등의 가치를 침해해서는 안되고, 사회제도는 불평등이 더 가지지 못 한 자에게 이익이 될 때만 정당화된다. 사실 이 두 번째 부분이 골 때리는 부분이다. 쉬운 예를 들자면 개인 a와 b가 모두 1만 원을 가지고 있었다고 가정하자. 만약 어떠한 사회제도가 a의 재산 5천 원을 b에게 재분배해 a가 5천 원을, b가 1만 5천 원을 갖게 되었다면 이 제도는 불합리다. 재분배가 더 가지지 못한 a에게 해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다른 사회제도가 b에게 99만 원의 추가이익을 가능케 하면서 a에게 1만 원을 더 쥐어준다고 가정하자. a는 2만 원을, b는 100만 원을 소유하게 된다. 이 제도는 롤스에 의하면 정의롭다 (물론 자유와 기회의 평등이 유지된다는 조건 아래에서이다). 불평등이 a에게도 1만 원의 이득이라는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나는 본능적으로 이 결론을 거부했다. 롤스의 성격상 그랬을 리는 없지만 결론적으로 이것은 마치 가지지 못한 자에게 빵조가리를 조금 던져주고 그래도 전보단 나으니 불평하지 말라는 냉소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내 학부 졸업논문은 롤스에 대한 신랄한 비판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내 논문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사상가는 G. A. 코헨이라는 캐나다 철학자로 분석적 마르크스주의의 대가로 일컬어진다. 대륙비판철학의 심장 프랑크푸르트에서 어쩌다 보니 나는 분석철학의 대가를 추종하게 된 것이다.


너무 학문적으로 깊이 들어가지 않는 선에서 내가 롤스를 비판한 내용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롤스가 약자에게 해가 되는 불평등을 거부하는 이유는 그가 개개인의 능력은 '자연적 복권(natural lottery)'을 통해 타고나는 것이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임의적 (morally arbitrary)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공부를 못 하게 태어난 a가 그 이유만으로 단지 운 좋게 공부를 잘하게 태어난 b보다 훨씬 불행하게 사는 것은 정의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b는 본인의 능력을 발휘해 부를 축적하되, 그 행위가 a에게도 이득이 되어야 한다(더 자세하게 얘기하자면 이것은 b의 개인적 의무가 아니라 사회제도가 그런 식으로 만들어져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a와 b의 능력 차이가 롤스의 주장처럼 단지 운에 의한 것이라면 아무리 불평등이 모두에게 도움이 되어도 그것은 여전히 도덕적으로 임의적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2:100의 분배를 포기하고 1:1의 원시적 공산주의 사회로 돌아가야 하는 것일까? 코헨은 이 문제를 이렇게 해결한다. 완벽히 정의로운 사회에서는 운 좋은 b가 자발적으로 51:51의 분배를 제안한다. 그는 본인의 능력으로 파이를 키우고, 동시의 본인의 성취가 단지 운에 의한 것임을 인정해 공정한 분배를 추구한다. 이것이 사회주의적 분배의 정의다.


지금 우리 사회의 기성매체, 인터넷 포럼, 심지어 MZ세대 자신들마저도 자조적으로 MZ세대의 나약함이나 무책임함을 들먹이고 있다. 이 중 한 가지 자주 보이는 비판이 MZ는 본인들의 노력도 없이 능력차이를 단지 타고나는 재능 차이로 규정지어버리며 계층이동의 의지조차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렇다. 우리 사회, 그리고 특히 젊은 세대는 노력이 모든 것을 해결해준다는 허상에서 서서히 벗어나고 있다. 아직도 노력이라는 이름의 만능치료제를 믿기에는 우리는 너무 많은 반례들을 보아왔다. 부모를 잘못 만나 달동네에 살며 학교도 생계 때문에 그만두고 하루종일 봉제공장에서 일을 하면서도 겨우겨우 입에 풀칠이나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재벌집에서 태어나 하고 싶은 취미 다 누리고 깜방도 몇 번 왔다 갔다 하면서도 빌딩 월세 받아먹으며 평생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들도 있다. 누가 감히 이들 앞에서 당신들의 차이는 노력의 차이라는 말을 들먹일 수 있는가. 노력이 아니라 출생의 복권이 그들의 삶을 결정짓는다.


또 냉정하게 바라보면 노력도 한계가 있다. 개인별로 최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넘어설 수 없는 타고나는 재능의 영역이 있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손흥민이 될 수는 없고 손흥민이 아무리 노력해도 임재범처럼 노래를 부를 수는 없다. 예체능 분야에서는 이런 한계를 쉽게도 인정하고 범접할 수 없는 재능에 대한 찬사를 보내면서 왜 학업에 부진한 학생이나 가난한 자들에게는 노력이 미비하다 규정지어 버리고 그것이 그들을 공격하는 칼날로 돌아오는가.


말을 꺼낸 김에 더욱더 냉정해져 보자. 노력도 어느 정도는 타고나는 재능이다. 노력은 집중력, 인내력, 의지와 끈기 등 개인이 타고나는 성격과 능력의 산물이다. 어떤 사람들은 태어나기를 인내와 집중에 유리하게 태어나고 다른 누구는 그렇지 못하다. 재능과 노력을 완전히 분리할 수는 없다. 노력도 재능이다. 또, 누구나 한 가지 재능씩은 있다는 것도 거짓말이다. 이것은 가난한 자들을 위로하기 위해 '너도 재능이 있어. 단지 아직 찾지 못했을 뿐이야' 같은 듣기만 좋은 위로거리를 만들어주지만 현실이 이래야 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 모든 부분에 평균 이상의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있듯이 모든 부분에 평균 이하의 재능을 가진 사람들도 분명히 존재한다.


그래서 나는 젊은 세대의 '재능 탓'은 사회발전의 중요한 단계라고 생각한다. 노력이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믿었던 과거에는 불평등에 대한 사회의 개입에 정당성이 부족했다. 네가 못 사는 건 네가 노력을 안 했기 때문이고 따라서 너는 사회의 보조를 받을 가치가 없는 사람이다. 똑같이 재벌들이 본인들의 노력으로 일구어낸 부를 세금으로 거두는 건 국가의 정당성 없는 착취에 불과하다. 반대로 우리가 어쩔 수 없는 재능의 영역을 인정하는 순간 비로소 사회의 개입에 정당성이 부여된다. 운 좋게 좋은 머리를 가지고 태어나 학교에서 늘 1등만 해서 변호사가 되어 연봉 몇 억씩 버는 사람의 부를 운 나쁘게 머리가 나쁘게 태어나 막노동을 하면서도 가끔 밥을 굶어야 하는 사람에게 나눠줄 윤리적 정당성이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재능 을 시작한 것은 좋지만 이것이 개인이나 세대의 무력감으로 남아 사회의 불평등을 고착화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책임을 일깨우는 폭탄이 되어야 한다. '재능 탓'은 모두가 적당히 노력하면서 다 같이 잘 사는 사회주의 유토피아를 향한 첫 발이다.


한 가지 문제가 남았다. 자유주의자들이 늘 사회주의의 고질적 문제라고 얘기하는 '모두의 적당한 노력'을 어떻게 이끌어 낼 것인가 하는 것이다. 코헨은 이 문제를 동일시급이라는 해법으로 간단하게 해결한다. 앞서 진정 정의로운 사회에서는 모두가 개인의 능력이 운에 기초한 것을 인정하기에 동일임금을 받을 것이라 했다. 그럼 돈을 더 벌고 싶은 사람은 근로의욕을 잃고 아무 직업이나 선택해 무력감을 느끼며 남들과 같은 임금을 받으며 일생을 낭비해야 하는가? 아니다. 모두는 본인이 하고 싶은, 또는 본인이 사회에 가장 잘 기여할 수 있는 직업을 자발적으로 선택하고, 만약 더 많은 돈이 벌고 싶다면 직업 선택이 아니라 노동시간 연장을 통해서 이를 이룬다. 이런 기본적인 전제가 충족된 사회는 단순히 좋은 머리로 돈만 벌기 위해 의대, 법대에 진학하고 사명감 없는 의료기술자, 법 기술자가 엘리트 계층을 차지하는 천박한 사회가 아니라 모두가 사회적 필요와 개인의 선택을 적절히 조화시켜 평등의 이상을 실현시키는 사회이다.


부르주아 자유주의자들은 몇 문단 전부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겠지만 여기까지 동의하며 따라온 평등주의자들도 다음 질문을 하는 것이 당연하다. 다 좋은데 그래서 뭐 어쩌라고. 이건 이상적인 사회일 뿐이고 현실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공상일 뿐이지 않느냐고. 한 때 철학은 명석한 사람들의 유토피아들로 넘쳐났지만 언제부턴가 유토피아를 '공상', '망상', 또 공산주의 유토피아 같은 경우 현실 공산주의가 발생시킨 '만악의 근원'으로 치부하고 있다. 그렇지만 유토피아가 단순한 공상적 유희에 지나지는 않는다. 나는 사회주의 유토피아를 종교에 비교한다. 예를 들어 기독교 신자들은 천국이라는 이상향을 갖고 살지만 당장 내일 그것이 현실화될 것이라 믿지 않는다. 진정한 기독교인은 꿈꾸는 천국의 사회에서 사랑이나 형제애 같은 '좋은' 원칙들을 유추해 내고 현생을 이런 '좋은' 원칙들을 바탕으로 살아가려 노력한다. 사회주의 유토피아 또한 마찬가지이다. 진정한 사회주의자들은 하나의, 또는 각자의 유토피아들을 가지고 있지만 사람들이 준비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내 유토피아를 실현시키려 누군가를 억압하는 혁명을 일으키려 들지 않는다. 기독교인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위와 같은 유토피아에서 계층의 이익을 넘어선 평등성, 상호성, 존엄성과 같은 원칙들을 유추하고 그를 토대로 현실사회의 부조리를 발견한다. 이러한 부조리를 하나하나 공론화시키고 다른 이들의 공감을 얻어 고쳐 나가면 어쩌면 영원히 도달할 수 없을지 모를 코헨의 유토피아에 최소한 몇 발자국이라도 더 다가설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그 몇 발자국이 반대로 가는 것보다는 낫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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