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상현 Jul 10. 2023

[세계여행] D+12 치클라요

기 빨리는 도시, 기 빨리는 사람들, 그래도 여행은 이런 재미가 아닐까

에콰도르에서 페루로 넘어오면서 고산에서 사막으로 지대가 바뀌었기에 가장 빨리 느껴지는 차이는 더위와 악취였다. 고산지역은 아무리 우리나라에 비해 질서가 부족해도 매연 뿜는 차만 지나가지 않으면 공기도 쾌적하고 날씨도 시원했는데 페루 치클라요는 정돈된 중심 거리를 조금만 벗어나면 사방에 쓰레기 냄새가 진동하고 모래먼지가 날린다. 아마 내가 지금 것 방문한 곳 가운데 가장 개발도상국 같은 느낌을 주는 곳일 것이다. 버스에서 점심시간이 다 되어 내려서 정류장 옆 쇼핑몰에 들러 페루 솔을 출금하고 현지번호를 만들었다. 에콰도르에서는 보이지 않던 툭툭을 타고 숙소로 이동할까 생각했지만 뭔가 애매해서 그냥 숙소까지 걸어갔다. 슬슬 에콰도르 고산 도시들이 반복되고 지루해질 쯤에 완전히 새로운 스타일의 도시였고 첫인상은 그리 좋지 않았다. 중동을 아직 가 보지는 않았지만 이런 느낌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에콰도르-페루 육로국경을 넘는 여행자들은 대부분 치클라요에 머물지 않고 바로 트루히요를 거쳐 와라즈로 넘어간다. 그래도 나는 여행 일정이 여유 있고 치클라요 근처 유적지들이 관람하기 나쁘지 않다는 글들을 읽어 구경도 하고 쉬기도 할 겸 2박을 하기로 결정했다. 그래도 도시에 큰 기대가 없던 건 사실이다. 



첫날에는 간단히 시내 구경만 했다. 도시는 관공서와 성당이 들어선 중심 광장만 깔끔하게 정비된 느낌이고 나머지 큰 거리는 혼란스러움의 극치였다. 당연히 보행자 신호는 없었고 자동차 신호마저도 없는 거리도 많았다. 인도에는 음식과 물건을 파는 노점상과 잡상인이 가득했다. 갓 태어난 강아지를 파는 상인들, 벤치에서 카드 치는 할아버지들, 뜬금없이 길거리에서 눈썹 메이크업을 해주는 사람들, 대왕소라만 한 살아있는 달팽이를 잔뜩 쌓아놓고 이상한 약과 함께 판매하는 상인들, 0.5 솔을 내고 체중계를 사용하게 해주는 상인 (남미는 집에 체중계가 잘 없어 이런 식으로 거리에서 체중계를 이용한다는 글을 어디선가 읽은 것 같다), 그리고 해 질 녘에 스멀스멀 거리로 나오는 성매매 종사자들까지 온갖 사람들이 길 위에서 그들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이런 정신없으면서도 재밌는 거리를 더 가까이서 자세하게 사진으로 남기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시장에서도 그렇고 길 위에서 재미있는 상황을 마주칠 때 늘 같은 고민을 하게 된다. 내가 이 상황에 카메라를 들이밀어도 될까? 대부분의 경우에는 티 나지 않게 조용히 멀리서 촬영하거나 아예 사진을 찍지 않게 된다. 이 사람들의 치열한 생업이 나에게는 재미있는 구경거리에 불과하다는 뭔가 불편한 감정이 들기 때문이다. 사실 사진은 고사하고 그들을 누가 봐도 관광객인 내가 지켜보는 것도 실례인 느낌이다. 입장 바꿔놓고 생각해 보면 우리보다 훨씬 잘 사는 한국말도 잘 못 하는 외국인이 갑자기 일터에 들이닥쳐서 재미있는 경험이라며 돈을 벌기 위해 하기 싫은 일 하는 나를 지켜보고 사진을 찍는다면 불쾌하지 않겠는가? 어쩌면 이런 장면은 조용히 눈으로만 담아두고 시간이 지나면 잊어버리는 것이 순리에 맞지 않을까 싶다.


다음 날에는 시판(Sipán) 지역에서 발굴된 모체(Moche) 문명의 유적이 전시된 박물관들을 찾아가 보기로 했다. 첫 번째로는 치클라요 서북쪽에 위치한 람바예케의 박물관 한 곳(Museo Tumbas Reales de Sipán)을 찾아갔다. 여기는 정규 버스가 다니지 않아 지역 간 이동을 할 때는 봉고차나 승용차에 여러 사람이 모여서 이동하는 콤비나 콜렉티보라는 교통수단을 이용하는데 정류장과 노선이 대부분 명확하게 표시되어 있지 않아서 처음 찾아오는 여행자들이 꽤나 애를 먹을 법하다. 원래 호텔 프런트에서 람바예케로 가는 콜렉티보가 서는 위치를 물어보고 천천히 아침을 먹고 출발하려 했는데 직원분께서 너무나 친절하게도 콜렉티보 정류장까지 10여분을 같이 걸어 데려다주셔서 바로 콤비버스에 탑승해 람바예케로 향했다. 이렇게 긴 거리를 직접 데려다 주실 줄은 몰랐는데 고마운 일이다. 뜻밖의 호의에 박물관 관람이 끝날 때까지 공복으로 돌아다녔다. 



정신없고 덜컹거리는 봉고차에서 20여 분간 타고 정신없는 시장을 지나 박물관에 도착해 2시간 정도 관람을 했다. 박물관의 소장품은 대부분 시판 무덤들의 부장품이었다. 드문드문 있는 영어 설명들과 짧은 스페인어 실력으로도 어느 정도는 맥락을 파악할 수 있어 쿠스코의 푸마풍고 박물관보다는 훨씬 재미있었다. 점심을 먹고 돌아오는 길에는 봉고차가 아닌 승용차 콜렉티보를 이용해 치클라요로 돌아왔다. 버스보다는 쾌적했지만 가운데 자리가 걸려 끼어 타느라 고생 좀 했다.



치클라요로 돌아오니 1시 30분 정도밖에 되지 않아 시간이 약간은 애매했지만 치클라요 동쪽에 있는 유물이 발굴된 시판으로 가보기로 했다. 근처 다른 터미널에서 박물관 이름을 얘기하니 몇십대의 콜렉티보 중 하나로 안내해 주었다. 이 봉고차들은 손님들이 다 차야 출발하기 때문에 20분여를 무더위 속에서 기다렸다. 6시쯤 어두워지기 전에 숙소로 돌아와야 하고 날도 너무 더워서 이렇게까지 하면서 가야 하나 싶었지만 시판으로 가는 풍경을 보며 안 왔으면 후회할 뻔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넓게 뻗은 사막 군데군데 나무가 자라고 멀리 뒤에는 돌산이 보이는데 마치 화성의 지형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콜렉티보에서는 목적지를 얘기해 줘야 하는데 박물관이 경로에서 약간 벗어나 있어 기사가 도로 한가운데에 내려주는 바람에 20여분을 걸었다. 애초에 거의 대부분 투어로 오고 대중교통을 타고 오는 여행자는 거의 없는 곳인 것 같았다. 



박물관 자체는 람바예케의 박물관과 겹치는 부분이 많아서 크게 흥미롭지는 않았지만 무덤들이 발굴된 곳을 직접 볼 수 있었다. 언듯 보면 자연적 지형인 것 같지만 인공적으로 지어진 피라미드라고 한다. 생각보다 빨리 관람을 마치고 치클라요행 콜렉티보가 출발하는 마을로 향하려 툭툭를 어디서 잡아야 하나 어리바리하면서 주위를 서성거릴 때 한 사람이 친한 척을 하며 말을 걸었다. 근처 식당에서 나온 중년 아저씨가 사진을 찍어달라고 하는 것 같았다. 사진을 찍고 무슨 가게 홍보 영상 같은 것도 찍고 여기저기 불려 다니면서 이 사람 저 사람이랑 사진을 찍었다. 식당 주인과 그들의 가족인 것 같았다. 인싸들 사이에서 억지웃음 짓고 있는 아싸의 모습이다.



이것저것 말을 시키니 짧은 스페인어로 나름 대답하려고 노력했다. 아주머니들이 혼자 다니면 나쁜 사람들이 붙는다고 여기 같은 시골에서는 괜찮은데 치클라요 같은 도시로 들어가면 소지품을 조심하라고, 해 지기 전에 빨리 들어가라고 걱정해 주었다. 사진을 너무 많이 찍어 슬슬 귀찮아지기 시작했다. 여기서 나도 기회를 엿봤다. 가게 주인이 맥주 한 잔 하라고 해서 맥주는 됐고 콜라가 보이길래 콜라를 사겠다고 했다. 분위기가 좋아서 그냥 공짜로 줄 것 같았다. 얼마냐고 물어보니 역시 친구라 공짜로 주겠다고 했다. 감사히 받아먹었다. 또 하나의 기회를 포착했다. 치클라요 가는 콜렉티보 타려면 어디로 가야 하냐고 했다. 그랬더니 가족 중 한 명이 자기가 태워 주겠다며 오토바이 뒤에 태워 근처 마을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이것도 날름 받아먹었다. 오토바이를 처음 타 봤는데 자전거랑은 또 다르게 시원한 느낌이었다. 이것도 사실 이렇게 될 걸 예상하고 물어보긴 했지만 고마운 일이었다. 그래도 사진을 하도 많이 찍어서 음료수랑 차비 안 드린 게 별로 미안하지 않았다.


돌아오는 승용차 콜렉티보에서도 좁게 끼여 오느라 살짝 고생했지만 봉고차보다는 훨씬 빨리 30분 정도만에 치클라요로 돌아왔다. 오토바이 태워준 한 명이 본인은 변호사라며 연락하라고 명함을 줘서 여행지 추천이나 받을까 아까 태워줘서 고마웠다고 문자를 보냈다. 예쁘고 안 유명한 여행지를 추천해 달라는 말에 처음 들어보는 타라포토라는 아마존 도시를 추천해 주었다. 그리고 마침 자기가 내일 거기 가는데 같이 가자길래 나는 이미 와라즈 가는 티켓을 사서 (사실 안 끊었지만) 안된다고 했다. 이름이 특이해서 구글에 검색해 보니 법 전공생은 맞는데 예전에 공무원에게 뇌물을 먹이려 했던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았다는 기사가 있었다.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부담스럽기도 하고 특히 남미인만큼 모르는 사람은 안 쫓아간다. 


의외로 박물관 자체보다는 처음 이용하는 콜렉티보, 그리고 기 빨리는 인싸들과의 만남 속에서 소소한 이득 챙기기가 재미있었던 치클라요 여행이었다. 이제 다시 산으로 올라갈 때다.

작가의 이전글 [세계여행] D+10 바뇨스, 쿠엥카, 페루 국경이동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