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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상현 Jul 28. 2023

[세계여행] D+28 마추픽추

마추픽추보다 더 값졌던 마추픽추 가는 길

페루여행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은 단연 마추픽추다. 취향에 따라 와라즈나 리마를 스킵했다는 사람들은 봤어도 페루에 와서 마추픽추를 들르지 않았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런데 솔직히 나는 정말 내가 마추픽추를 가고 싶은 것인지, 아니면 남들이 다 가니까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가는지에 대해 확신이 없었다. 나는 잉카 역사에도, 보여주기식 유명 여행지 인증샷에도 딱히 관심이 없다. 또, 쿠스코행 기차 대신 버스를, 마추픽추 아랫마을에서는 버스 대신 도보 등산을 선택하며 최저가로 간 마추픽추 여행임에도 입장료와 기타 비용이 너무 비싼 터라 3박 4일 동안 쓴 금액이 거의 에콰도르에서 열흘동안 쓴 금액과 맞먹었다. 과연 이 정도의 값어치를 하는 여행지인지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한 채 투어를 예약하는 순간에는 모두가 가니까 여기까지 왔는데 나도 가야겠다는 의무감이 더 컸던 것 같다. 3박 4일간의 여정이 다 끝난 후 지금 기록의 순간에는 그 답을 조금은 찾은 것 같다.


4일 동안의 잉카정글트레일을 위해 아침 6시 30분에 호스텔 앞에서 픽업 밴에 탑승했다. 투어를 같이 가는 멤버들이 거의 모두 스페인어 원어민이라 버스에서부터 얘기를 하고 있었지만 언어실력이 미천한 나는 잠자코 구석에 찌그러져 있었다. 잠시 들른 휴게소에서 칠레 친구들과 말을 텄지만 버스에 타 있는 내내 언어장벽 때문에 지루한 여행이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솔직히 영어라도 능숙한 외국인 관광객 그룹에 들어가고 싶은 생각이 컸다. 그 사이 버스는 첫 액티비티 장소에 도착하고 있었다.



쿠스코에서 3시간여를 달려 설산이 보이는 해발 4000m 지점으로 올라와 첫 번째 액티비티인 산악자전거를 탈 준비를 시작했다. 약 2시간여 동안 50km 정도의 내리막을 달려 해발 1900m까지 내려가는 코스였다. 경사가 꽤 있는 산길이고 차가 다니는 길이여서 그런지 조금은 우습게 보일 정도로 굉장히 많은 보호장비들을 착용했다. 출발지가 워낙 고산인지라 패딩까지 입었는데도 내리막을 달리기 시작하니 상당히 추웠다. 학생 때는 자전거를 많이 탔지만 최근 3년여간 한 번도 타지 않았고 얼마 전 바뇨스에서 처음으로 다시 타서 경사가 가파르고 커브길이 많은 산길에 긴장을 많이 했다. 사실 자전거는 몸으로 타야 하는데 팔로만 조종하려다 보니 처음에는 속도를 많이 줄였다. 나중에는 그래도 긴장이 풀렸지만 끝까지 왼쪽 커브를 돌 때는 생각보다 몸이 잘 안 움직였다. 엄청 빠르지는 않았지만 나름 속도감을 즐기면서 내려왔다. 계속 브레이크를 잡고 손목에 힘을 주고 타니 막판에는 손목이 많이 뻐근했다. 2시간여를 달려 낮은 고도의 정글지역까지 내려왔을 때는 온도가 달라졌음이 확연히 느껴져서 바로 보호장구와 겉옷을 벗어던져야 했다.



점심을 먹을 때는 다들 스페인어로 떠들어서 다시 정말 재미가 없어졌다. 그 후 두 번째 액티비티인 래프팅을 하러 강으로 내려갔다. 생각보다 물살이 많이 빨라 보였지만 왠지 겁은 나지 않았다. 정말 젖고 싶지 않았는데 초반부터 옆 보트에서 노로 물을 뿌려서 그냥 포기하고 즐겼다. 다들 래프팅이 처음이라 솔직히 호흡을 맞춰서 노를 저은 것 같지는 않은데 물살도 세고 가이드가 뒤에서 조종을 잘해서 보트는 앞으로 잘 갔다. 중간지점에 멈춰서 물살이 완만한 곳으로 이동해 수영도 하고 폭포물도 맞고 다이빙도 했다. 원래 액티비티도 싫어하고 젖는 것도 정말 싫어해서 이런 것들은 절대 안 하는데 그냥 하다 보니 신이 났는지 아님 무슨 생각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모든 걸 재밌게 즐겼다. 다이빙하는 과정에서 선글라스를 벗을지 말지 고민하다 그냥 쓴 채로 뛰었는데 물에서 올라오니 세상이 밝은걸 보고 잃어버렸음을 직감했다. 그래도 안경이 안 없어진 게 다행이다.


래프팅 중간중간에 동행들과도 얘기할 시간이 많았고 미천한 스페인어로 질문에 답하려 노력하며 조금은 더 친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래프팅 가이드가 본인은 원래 케추아어 원어민이고 스페인어를 한지는 8년밖에 되지 않았다고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본 투어 가이드도 비슷한 경우였고 케추아어 원어민들끼리는 남다른 유대감이 있는 듯했다. 케추아어 원어민들은 본인들이 잉카의 후예라는 점에 상당한 자부심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고 잘은 모르지만 나 같으면 먹고살기 위해 정복자의 언어인 스페인어를 배우면서 조금의 씁쓸함을 느꼈을 것 같다.



첫날부터 액티비티가 너무 재미있어서 투어가 가성비를 충분히 충족한다고 느껴졌다. 래프팅 후에 다른 그룹에서 독일인 2명이 합류했다. 나 말고도 스페인어를 못 하는 친구들이 늘었고 가뜩이나 독일인들이라 얘기하면서 덜 심심할 것 같아 좋았다. 첫날 숙소로 향하려 해가 졌음에도 1시간가량 야간산행을 해 현지인이 운영하는 산장에 도착했다. 완전히 산속에 고립된 곳이라 와이파이도 없고 온수도 안 나오고 모기도 많았다. 저녁을 먹을 때에도 스페인어로 계속 스페인어로 얘기하는 탓에 나와 독일인 2명은 심심하게 듣기평가하는 느낌으로 앉아있었다. 그래도 가이드가 얘기해 준 몇 가지 이야기들은 기억에 남는다. 이를테면 페루의 빈부격차 문제라던지, 정글에 사는 사람들이 교육이나 의료시스템의 수혜를 받기 힘들다는 얘기였다. 관광객들에게는 얼마 되지 않는 돈이지만 현지인들에게는 굉장히 큰돈이 될 수 있기에 가이드도 일부러 산 아래 마을에 있는 호스텔보다 이런 현지인들이 운영하는 숙소로 투어그룹을 데려오는 듯했다.



다음 날 아침에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커피를 만드는 것을 시연했지만 커피에 관심이 없어 딱히 재미있지는 않았다. 2일 차는 하루종일 걷는 일정이라 가장 힘들다고 하는데 이미 트래킹을 많이 했었고 중간에 많이 쉬어서 그다지 힘들게 느껴지지 않았다. 경치도 나쁘지는 않았지만 다른 곳에 비해서 그렇게 뛰어나다고 느껴지지도 않아서 왜 적지 않은 사람들이 2일 차를 건너뛰는 3일짜리 투어를 신청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래도 걸으며 독일, 칠레 친구들과 얘기도 많이 하며 친해졌다. 특히 칠레 친구들은 원래도 외향적인 친구들이고 한국인과 얘기해 본 것이 처음이라며 이것저것 궁금한 것들을 물어봐서 금방 어색하지 않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


중간에 독일 친구가 개에 물리는 사고가 있었다. 갑자기 앞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리고 다급하게 뛰어오길래 처음에는 그냥 도망 왔나 보다 했는데 알고 보니 당황해서 뛰기 시작하니 개들이 쫓아오면서 3번 물었다고 했다. 떠돌이 개면 광견병의 위험이 있어서 다들 당황했는데 가이드가 개 주인을 찾아서 예방접종 맞은 내역을 확인했다고 한다. 저 말도 100퍼센트 신뢰가 가지는 않았지만 당장 치료할 수 있는 수단도 없어서 그냥 다음 마을까지 걸어가야 했다. 나중에 막상 마을에 도착했을 때에도 특별한 증상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마땅한 치료는 받지 못했다.


저녁때까지 걷다 온천에 도착해서 물에 들어갔는데 한국인들이 느끼기에는 너무나 미지근한 온도였다. 다른 사람들은 그래도 좋아했는데 솔직히 조금은 짜증이 날 정도의 온도였다. 2일 차 숙소로 이동해 저녁을 먹고 다들 술 한잔 하러 간다길래 따라나섰는데 자리가 생각보다 많이 재미없었다. 물론 나랑 독일 친구들이 좀 진지하고 재미없는 성격들인 것은 맞는데 조금 더 나이가 어린 칠레 친구들이 놀면서 하는 조금은 민망하고 노골적인 대화와는 핀트 자체가 맞지 않는 느낌이었다. 또 카드게임을 하려고 해도 독일애들은 룰에 집착하고 칠레 애들은 어차피 술 마시면서 하는 건데 그게 뭐가 중요하냐는 식이었다. 숙소에서 독일 친구는 칠레 애들이 너무 애들 같았다고 했고 나중에 칠레 애들한테 물어보니 걔들은 독일 애들이 그냥 재미가 없었다고 했다. 나는 독일 친구들과도 칠레 친구들과도 따로 있으면 다른 느낌으로 재미있었는데 다 같이 한 자리에 붙여놓은 이 자리는 정말 최악이었다.



3일 차가 되어 아침에 짐을 싸는데 모자가 또 없어졌다. 아마 전 날 온천에서 마을로 이동하는 버스에 두고 내린 듯했다. 가이드에게 얘기하니 이미 누가 집어갔을 거라고 포기하라고 했다. 모자를 원래 안 써 버릇 하니 자꾸 잃어버리는 것 같다. 3일 차 액티비티의 시작은 집라인이었다. 원래 이런 것도 무서워서 절대 안 하지만 뭔가 자연스럽게 다 도전해 보는 것에 익숙해진 듯했다. 또 같은 그룹에 있던 은퇴한 우루과이 할아버지가 모든 액티비티에 다 참여를 하는 모습이 조금은 나에게 무언의 압박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역시 처음에는 좀 많이 무서웠지만 서너 번쯤 되니까 그래도 좀 적응이 되어 거리낌 없이 탈 수 있었다. 그래도 몸에 힘이 많이 들어가고 다리가 후들후들거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나와 칠레 친구들이 마추픽추 티켓이 없어서 이른 점심을 먹고 그룹과는 떨어져 먼저 마추픽추 아랫마을인 아구아스 칼리엔테스로 향했다. 첫 사진에 뒷 배경 산이 마추픽추 산이다. 철길을 따라서 2-3시간 정도가 걸리는 평지 길을 쭉 걸어가는 코스인데 풍경도 좋았지만 너무 재미있게 떠들면서 가느라 별로 기억에 남지는 않는다. 여행지에서 만난 외국 친구들은 아는 사람들도 겹치지 않고 사실상 다시 볼 일이 없어 오히려 솔직한 얘기를 하기가 훨씬 편하다. 첫날 언어의 장벽으로 혼자 지루해하던 게 불과 이틀 전인데 이제는 정말 친한 친구와 얘기하며 걷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칠레 친구들이 영어가 가능했기 때문인 것도 있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걷다 보니 금방 마을에 도착하고 마추픽추 표를 구하기 위해 매표소로 향했는데 오픈시간 전임에도 사람들이 한가득 서있었다. 우리는 다음날 버스를 타고 쿠스코로 돌아와야 해서 무조건 오전 티켓을 구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역시 3시간여를 기다려서 매표소에 들어왔을 때 오전표는 모두 매진이었다. 여행사도, 가이드도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일찍 가서 줄을 서면 무조건 오전표를 구할 수 있을 것이라 했지만 막상 일이 이렇게 되니 아무런 대책도 없었다. 특히 여행사들은 고객들만 모아서 수수료를 받고 투어는 자체진행이 아닌 하청업체에게 넘기는 형태라 아무리 현란한 말로 홍보를 해도 아무 의미 없다. 결국에는 그냥 우리끼리 대책을 찾아 오전티켓이 있던 마추픽추+마추픽추 산 티켓을 지비로 50솔정도를 더 주고 구매했다. 칠레 친구들은 원래 학생할인이 돼야 하고 여행사에서도 문제없다고 했는데 현장에서 학생증에 만료일이 없다는 이유로 학생티켓 발급을 거부해서 일반티켓을 끊느라 거의 파산했다. 앞에 개물림 사고도 그렇고 티켓발권도 여행사가 말로만 떠들어대고 막상 문제가 발생하니 우리끼리 해결해야 해서 상당히 짜증이 났다.



오후에는 마을을 구경하고 저녁을 먹고 독일인들과 술 한잔 하다 피곤해서 먼저 숙소로 돌아가는데 산책하고 있던 칠레 친구들을 만나서 산책을 하다 호스텔 로비에서 떠들었다. 역시 에너지가 넘치는 친구들이라 별 얘기 안 하는데도 재밌었다. 어릴 때부터 친구라는데 둘이 너무 잘 맞는 모습을 보면서 나까지 흐뭇해지는 느낌이다. 이들 말고도 독일 친구들은 형제인데 형제가 같이 여행을 다닌다는 게 정말 사이가 좋은 것 같았다. 나 같으면 혈육과는 절대 어디 같이 안 간다. 우루과이 할아버지는 그 나이에도 모든 프로그램에 다 참여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사람 자체가 지난 시대의 느낌이 많이 나지만 배움이 깊고 예의 바른 신사의 모습이었다. 나도, 칠레 친구들도 존경스럽고 나이가 들면 저렇게 되고 싶다는 얘기를 종종 했다. 뭐 하던 분인지 직업이 궁금해 물어봤는데 얘기를 계속 돌려서 아마 얘기해주고 싶지 않은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우리 투어의 가이드는 몇십 번째 똑같은 코스를 지나는 것일 텐데 그럼에도 열정적인 설명과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어 주었다. 단지 돈을 벌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페루의 문화와 유적들을 진심으로 좋아하는 것이 느껴졌다. 이렇게 투어의 마지막 밤은 첫날의 어색함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마무리되고 있었다.


마지막 날 마추픽추로 향하기 위해 새벽 5시부터 일어나서 길을 나섰다. 마을에서 마추픽추로 올라가는 버스비가 아까웠던 나와 독일, 칠레 친구들은 1시간 30분 정도 산길을 걸어서 올라가기로 했다. 원래 호스텔에서 아침 대신 간식을 준비해 주기로 했는데 이것도 뭔가 잘못되어 아무것도 받지 못했다. 독일 친구들이 본인들 호스텔에서 빵을 몇 개 가지고 나와 이거라도 나눠먹었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킬로토아의 악몽이 되살아날 뻔했다.



마추픽추의 지형은 마치 평지에 바위산을 여러 개 박아놓은 듯 한 모습으로 이 산을 오르려면 정말 가파른 길을 올라야 한다. 새벽이라 해가 뜨지 않아서 그나마 덥지는 않았지만 우리끼리 계속 올라가기가 이렇게 힘든 곳에 도시를 만들다니 정말 미친놈들이라고 얘기하며 걸어갔다. 마추픽추에 도착해 기다리고 있던 가이드와 유적지에 들어서자 서서히 해가 뜨기 시작했다.



몇 년 전 마추픽추에 일방통행 루트가 여러 개 생겨서 비교적 별로인 3, 4번 루트를 구경한 여행자들은 왜 같은 돈을 내고 제대로 구경을 못 하냐고 아직까지도 불만이 많은 상황이다. 나와 칠레 친구들은 3번 루트 표를 가지고 있었지만 마추픽추 산이 포함되어 있는 표라 1, 2번 루트 입구로 입장이 가능했고 가이드와 함께여서 가장 좋다는 2번 루트로 관람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전망대에 올라오니 사진에서만 보던 마추픽추의 풍경이 펼쳐졌다.


마추픽추 유적에는 설명이 적힌 판이 하나도 없어서 사전조사가 없이 혼자 가면 솔직히 아무것도 모를 텐데 가이드가 전망대에서 1시간 정도 대략적인 설명을 해 주어서 그나마 뭔가를 알고 보는 느낌이 들었다. 기억에 남는 설명을 기록하자면 마추픽추에는 약 400명 정도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고 잉카인들은 문자로 기록을 남기지 않았기에 이 도시의 실제 이름은 아무도 모른다고 한다. 1900년대 초반에 도시를 처음 발굴한 학자가 미라, 침구류, 요리기구는 물론이고 금이나 은으로 된 조형물 또한 많이 찾아냈다고 하는데 상당수의 유물은 미국의 예일대학교로 옮겨졌고 금과 은은 행방이 묘연해 그 고고학자의 가족들만 알 것이라고 한다. 공교롭게도 그의 가문은 지금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가문 중 하나라고 한다. 잉카 도시들 사이에는 소식을 전하는 연락망이 있었는데 각 메신저들이 약 2km 정도를 이어서 전력으로 뛰어 메시지를 전달해 마추픽추에서 쿠스코까지 불과 6-7시간 만에 도달할 수 있었다고 한다. 스페인군이 침략했을 때 잉카인들은 마추픽추를 보호하기 위해 본인들이 만들어 놓은 도시 간 길을 스스로 끊어버렸다고 한다. 그 덕에 마추픽추는 스페인군에게 발견되지 않았고 지금까지 남아있을 수 있었다.


독일 친구들은 기차를 타고 쿠스코로 돌아가서 티켓에 포함된 와이나픽추를 구경하러 먼저 떠나고 돈이 없는 나와 칠레 친구들은 2시에 버스를 타려면 아무리 늦어도 11시에는 다시 내려가야 했기에 산을 포기하고 도시만 돌아보았다. 그래도 시간에 쫓기는 느낌이 있었지만 나름 즐겁게 도시를 둘러보았다. 얘네들이 한 명은 쿠스코에서 핸드폰을 잃어버렸고 한 명은 카메라가 별로라고 해서 내 핸드폰으로 계속 사진을 찍어줘야 했다. 덕분에 반대로 내 사진도 많이 찍어줬다. 가이드와는 전망대에서 헤어진 터라 도시로 내려와서는 다른 투어그룹들 가이드 설명을 슬쩍슬쩍 훔쳐 들으며 돌아다녔다.


얼른 시간에 맞춰 유적지를 나온 후 다시 산길을 내려가 철길을 2시간 반동안 걸어 버스가 있는 지점까지 돌아갔다. 아침부터 등산한 피로가 쌓여서 너무 힘들었지만 돈 없이 여행하려면 뭐 어쩌겠는가. 2시에 탄 버스는 4일 동안 트래킹한 코스를 반대로 돌아갔다. 사실 마추픽추와 쿠스코 간의 거리는 100km도 채 되지 않는데 교각이나 터널 같은 교통 인프라가 워낙 안 되어 있다 보니 좁은 산길을 굽이굽이 돌아 저녁 9시가 되어서야 쿠스코에 도착했다. 남미를 버스로 여행하면서 계속 느끼는 것은 교통인프라가 경제발전에 얼마나 중요한지이다. 도시 간 이동이 이렇게 어려우니 물류, 인력의 교류도 원활하지 못해 도시의 지역색은 강하지만 규모의 경제를 이루기가 어려워진다. 우리나라가 그렇게 산이 많은데도 고속도로, 교각, 터널로 이동이 수월한 점이 경제발전에 매우 중요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전에 칠레 친구들과 무슨 얘기를 하다 내가 클럽을 가 본 적이 없다고 하니 이 날 본인들이 쿠스코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이기도 하니 나에게 같이 가자고 계속 얘기를 했는데 본인들도 피곤했는지 숙소에 도착하고 연락이 없었다. 나는 가자고 해도 어차피 안 갈거였어서 연락이 없어 내심 좋았다.


마추픽추는 기본적으로 멋지긴 했지만 내가 원래 로망이 있는 곳도 아니었고 나에게는 숨이 막힐 정도의 아름다움은 아니었다. 그래도 이 여행이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은 이유는 마추픽추 자체가 아니라 그곳으로 향하는 처음에는 어색했고, 때로는 고생스러웠던 여정이 돌아보면 너무나 좋았기 때문이다. 겁이 많아 도전하지 못했던 이런저런 액티비티들을 경험하며 처음 느껴보는 재미를 찾았고, 칠레와 독일 친구들은 겨우 4일 동안 봤고 아마도 평생 다시 볼 일이 없겠지만 때때로 이 여행을 회상하면 좋은 친구들로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쿠스코에서 바로 버스를 타고 오직 마추픽추만 보러 갔으면 그저 그랬을 여행이 지금까지 남미 여행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여행으로 남은 건 마추픽추가 아니라 마추픽추로 가는 길이 값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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