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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상현 Aug 01. 2023

[세계여행] D+34 비니쿤카, 성스러운 계곡

페루 여행의 마지막

마추픽추를 다녀온 다음날은 특별한 일정 없이 필요한 물건을 사고 쉬면서 시간을 보냈다. 투어 중에 잃어버린 모자와 선글라스를 사고 건조해 입술이 너무 아파 립밤을 구매했다. 머리가 지저분해 길을 걷다 현지 미용실에서 2000원도 되지 않는 가격에 스포츠머리로 이발도 했다. 저녁때는 와카치나에서 만났던 한국 부부분을 다시 만나 여행 후 처음으로 한식을 먹었다. 현지식보다 그렇게까지 맛있다고 느끼지 못하는 걸 보니 확실히 나는 여행하는데 한식이 필요하지 않은 것 같다. 장기여행을 하기에는 굉장히 큰 장점이다. 음식 맛을 떠나서 또다시 밥을 사주셔서 너무 감사한 마음이었다.



다음 날은 호스텔을 통해 성스러운 계곡 투어를 예약해 놨다. 그런데 픽업시간이 1시간이 지났는데도 차가 오지 않아 호스텔에 문자를 남기고 방으로 돌아왔다. 숙소 스탭이 자기 탓도 아닌데 계속 사과를 하면서 문제해결을 위해 노력해 봤지만 밤새 파산이라도 하고 어디로 날랐는지 며칠이 지난 지금까지 여행사는 연락을 받지 않는다고 한다. 호스텔에서 그 회사를 앞으로는 쓰지 않겠다며 예약을 다른 날로 바꿔주고 가맹점 사우나 이용권을 공짜로 줬다. 사실 그동안 피로가 많이 쌓이고 이 날은 두통도 심했는데 쉬는 것은 나쁘지 않았지만 쿠스코에서 버리는 날이 생각보다 너무 많아지고 있다. 오전에는 기념품으로 남들 다 사는 알파카 인형을 사고 오후에는 팔자에도 없는 사우나를 했다. 한국에서도 사우나나 찜질방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마지막으로 간 지가 몇 년 전이고 외국에서는 처음 가보는데 지난번 온천과 마찬가지로 상당히 미지근한 온도였다. 나쁘지는 않았는데 그렇다고 내 돈 내고 다시 할 것 같지는 않다.


하루가 지나 일명 무지개산으로 알려진 비니쿤카 투어날이다. 또 픽업차량이 안 와서 1시간가량 기다리다 숙소에 전화하니 걱정하지 말라고 금방 올 거라고 했다. 잠시 후 승용차가 한 대 와서 나를 태우더니 구도심 반대쪽에 서 있던 버스로 데려갔다. 이 망할 투어사들 픽업이 늦으면 늦는다고 전화라도 해 줬으면 좋겠다. 비니쿤카는 약 해발 5000m에 위치하고 있는데 가는 길부터 정말 추웠다. 내복을 입지 않은 것을 뼈저리게 후회했다. 또 고산병이 걱정되어 아침식사 간에 코카차도 마시고 고산병약도 먹었다. 고산병약을 복용하게 되면 이뇨작용이 활발해지는데 이것 때문에 비니쿤카로 향하는 버스에서 좀 많이 고생했다. 중간에 입장 티켓 검사하는 곳에서 말하고 버스에서 내려 해결했는데 좀만 더 늦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 고산병약은 버스에서 내리고 화장실이 많을 때 먹는 것이 좋겠다.



비니쿤카는 약 10년 전부터 관광지로 개발되기 시작해 지금은 쿠스코에서 사람들이 마추픽추 다음으로 많이 찾는 곳이라고 한다. 약 1시간 반정도 걸어 올라가야 하는데 경치는 멋지지만 사람이 정말 많았다. 오르막이 짧고 굵어서 비교적 난이도가 쉬워 생각보다 많이 한산했던 와라즈 호수 트래킹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남녀노소 관광객이 가득했다. 체력이 부족한 사람들을 위해서 걷는 대신 마지막 오르막 전까지 돈을 내고 말을 탈 수도 있는데 고산이라 걸어서도 숨이 차는 여기를 몰이꾼들이 한 명이라고 더 태우겠다고 말을 끌고 뛰어다닌다. 



산이 정면으로 보이는 곳으로 올라오니 사람들이 더욱더 많아진다. 산을 보러 온 건지 사람을 보러 온 건지 모를 정도다. 산 바로 앞의 사진포인트에는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다. 나도 내 그룹보다 훨씬 빨랐기에 올라오자마자 20분여간 기다려서 사진을 찍었다. 비니쿤카는 실제보다 사진이 훨씬 예쁘다는 소리가 많은데 이 날 날씨가 좋아서 그런지 나는 실제도 나쁘지 않았다. 가이드에게도 같은 말을 하니 보정이 너무 많아서 그렇긴 한데 자기는 보정도 사진촬영의 일부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리고 그런 사진들이 SNS에 올라가며 관광객이 많아져서 좋다고. 일리 있는 말이다.



비니쿤카 반대편에 있는 저 설산은 잉카인들이 신성하게 생각했던 산으로 예전에는 아이들을 데려가 제물로 바친 곳이라고도 한다. 아이들이 고산을 올라서 힘든 상태에서 코카잎으로 환각상태에 빠트려 아마 고통 없이 죽었을 것이라고. 좀 더 높은 사람이 적은 곳으로 올라가 투어그룹의 콜롬비아 커플과 사진을 찍어주며 시간을 보냈다. 산 한쪽에는 야생 알파카들이 풀을 뜯고 다른 쪽에는 기념사진용 알파카들이 돈을 벌어주고 또 다른 쪽에서는 알파카 고기를 팔고 있었다. 콜롬비아 커플이 알파카 고기를 사 먹으면서 한 점 줘서 처음으로 먹어봤다. 맛은 그냥 무지하게 질긴 소고기 맛이었다. 전에 어떤 여행유튜버가 여기서 알파카 고기를 먹고 배탈이 난 영상을 본 기억이 스쳐갔다. 산을 내려오는 길에는 영어를 배운 지 4개월밖에 되지 않았다는 가이드와 스페인어로 떠들었다. 설명도 듣고 궁금한 것도 이것저것 물어봤는데 스페인어로 이 정도 말이 된다는 게 뿌듯했다. 


점심을 먹고 돌아오는데 고산병약 부작용인지 버스 좌석이 너무 좁아서 그런지 얼굴과 팔다리가 저렸다. 저녁은 귀찮아서 그냥 길거리 팝콘에 마트에서 파는 맥주 한 캔을 하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비니쿤카는 69호수 정도로 절경은 아니지만 투어도 그렇게 비싸지 않고 오후 4시 30분 정도면 쿠스코로 돌아오기에 그냥 한 번 가 보기에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주의할 점은 고도가 높아 기온도 낮고 바람도 굉장히 많이 불어서 방한도구를 꼭 지참해야 한다. 또 올라가고 내려오는 길에 흙먼지가 많이 날려서 먼지를 뒤집어쓸 각오도 해야 한다. 대충 경량패딩 하나만 들고 간 나는 이 날 이후 계속 코를 훌쩍이고 있다.


다음 날은 어쩌다 보니 또 휴식일이다. 내일 성스러운 계곡 투어를 마지막으로 쿠스코를 떠나 볼리비아 코파카바나로 향하기로 결정해서 아침에 터미널로 가 버스티켓을 구매하고 몇 번째인지 모를 중앙광장과 전망대를 또 올랐다. 사실 이 날이 페루 독립기념일 연휴 기간이라 혹시 시내에 퍼레이드나 재미있는 일이 있을까 싶어 비워놨는데 생각보다 퍼레이드 규모도 작고 별 것 없었다. 숙소로 돌아오기 전 산 페드로 시장에 들러 주스를 마시며 계속 말을 걸어주는 가게 주인과 스페인어 프리토킹 시간을 가졌다. 



페루에서 마지막 날은 며칠 전 못 했던 성스러운 계곡 투어로 마무리했다. 픽업 공지는 아침 6시였지만 6시 30분 정도에 여행사 직원으로 보이는 사람이 와서 중앙광장 쪽으로 데려가더니 출발하는 버스들 사이 이곳저곳을 기웃대다가 7시 30분이 다 돼서야 출발할 수 있었다. 남들은 투어 하면서 한국사람들이나 미국, 유럽사람들 많이 만난다는데 나는 왜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하는 투어마다 현지인들 사이에 홀로 낀 외국인이다. 이번에도 역시 나 빼고 15명 정도 전부가 페루인이었다. 성스러운 계곡 투어는 쿠스코 주변 잉카 마을들에 흩어져 있는 유적들을 하루종일 돌아다니며 구경하는 프로그램이다. 첫 번째로 방문한 마을은 친체로라는 곳으로 잉카 시대 때는 15000명 정도가 살던 큰 도시였다고 한다. 스페인이 도시를 파괴한 후 남아있던 잉카 건축물의 초석 위에 교회와 건물들이 지어졌다고 한다. 한쪽에서는 할머니들이 감자를 말리고 있었는데 추운 바람을 쐬며 만들어진 말린 감자는 약 40년 정도 보관이 가능하다고 한다.



다음은 친체로 근처 작업장에서 자연적인 염료를 이용한 천연염색 시연을 관람했다. 내용은 별 것 없고 가이드가 버스에서 내리기 전에 염색장에서 파는 기념품은 외국인들 바가지 가격이니까 사지 말라고 한 것이 기억에 남는다. 



다음 코스는 살리네라스 염전이다. 예전에 세계테마기행에서 보고 나름 기대가 있던 곳이다. 산에서 나오는 소금물을 수로로 모든 염전에 골고루 공급하는 시스템을 갖고 있는데 가문이 얼마나 오래되었는지에 따라서 소유한 염전의 개수가 다르다고 하다. 염전을 사고파는 행위는 금지되어 있고 수확한 소금은 협동조합에만 팔 수 있다고 한다. 염전이 흙색에 가까운 곳은 이미 소금 채취가 마무리되어 흙바닥이 보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세계테마기행에 나왔을 때만 해도 방문객이 그렇게 많지 않아 염전으로도 들어가 볼 수 있던 것 같은데 지금은 멀리서만 볼 수 있고 사람들도 너무 많았다. 또 염전에서 일하고 계신 분들을 관광객 몇백 명이 전망대에서 동물원에 동물 보듯이 지켜보는 모습이 조금 불편하게 느껴졌다.



다음은 모라이 유적으로 기록이 없어 목적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연구결과 약 6000종의 식물의 흔적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농경지이거나 작물 재배 실험실로 추정한다고 한다. 층마다 기온이 달라 다양한 곳에서 자라는 식물들을 키울 수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그 후로 종교적 장소로 추정되는 오얀따이땀보 유적과 농경지와 주거지가 어우러져 있는 피삭 유적도 방문했다. 글이 급하게 진행되는 느낌일지 모르겠는데 실제 투어가 그랬다. 한참 차 타고 달려서 도착하면 10분 설명 듣고 나가고 다시 차 타고를 몇 번 반복하는 느낌이었다. 마지막 피삭은 입장시간 종료가 임박한 상태에서 도착해서 정말 들어가서 사진만 찍고 나왔다.


물론 랜덤으로 걸리는 가이드 역량에 따라 다를 수도 있겠지만 나는 성스러운 계곡 투어는 정말 별로였다. 70솔짜리 비싼 통합 입장권 사서 각 유적지에서 사진 찍고 5분 설명 듣고 나오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다. 그리고 잉카유적 자체도 기록이 전무하기에 다 돌무더기 보고 추정한 거에 불과해서 유적관광하는 재미도 별로 없다. 마추픽추에서 가이드 쓰고 잉카 역사에 대해 전반적으로 설명을 들으면 성스러운 계곡은 굳이 올 필요가 없을 것 같다. 거기에 더해서 쿠스코에 온 관광객들은 거의 다 하는 투어이다 보니 밴이 30-40대가 같이 다녀서 도착하는 유적지마다 사람들이 무지하게 많다. 평소에 자유여행만 해서 투어 여행, 패키지여행의 단점이 궁금한 사람에게는 적나라한 경험을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투어를 마치고 호스텔에서 짐을 챙겨 생각보다 정말 오래 머물렀던 쿠스코를 떠난다. 택시비 좀 아끼겠다고 터미널까지 걸어가는데 개들이 길을 막고 짖어서 좀 무서웠는데 그냥 지나갔다. 터미널에서 조금 쉬다 짐을 맡기러 카운터로 갔는데 직원이 내 10시 40분 버스는 전산오류로 잘못 나온 거고 10시 정각 버스를 타라고 했다. 일찍 도착하고 일찍 물어봤기에 다행이지 버스를 놓칠 뻔했다. 티켓 자체도 어디 길거리 상인한테 산 것도 아니고 자기들이 어제 나한테 팔아놓고서 무슨 경우인지 모르겠다. 어쨌든 야간버스를 타고 자고 일어나니 국경도시인 푸노에 도착했다. 이틀 전 표 팔 때, 어제 짐 부칠 때 분명히 몇 번이나 직행버스라고 해놓고 푸노 와서는 버스를 갈아타라고 했다. 새로운 버스에 탑승해 볼리비아 국경에 도착했다. 이미그레이션은 뭐 물어보지도 않고 도장만 찍어주고 끝났다. 다이렉트 버스라더니 우리가 타고 온 버스는 국경 자체를 넘지도 않고 버스회사 직원은 볼리비아 쪽에 있는 미니밴에 탑승하라고 안내한다. 뭐 사람 차면 출발하는 버스라 오래 안 기다려도 돼서 나쁘지는 않은데 왜 굳이 거짓말을 하는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이렇게 약 3주간의 페루여행이 끝났다. 대혼란의 도시 치클라요부터 시작해서 와라즈, 파라카스, 와카치나를 거쳐 쿠스코까지 정말 볼 것도, 할 것도 많았고 일정상 이키토스, 리마, 아레키파 등 스킵한 도시도 꽤 있었다. 그중 많은 곳은 투어가 없이는 방문이 불가능하고 마추픽추 같은 메이저 관광지는 입장료도 비싸서 초저가 가성비 여행자인 나도 어느 정도 지출은 감수해야 했다. 솔직히 살면서 페루에 다시 올 일이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젊고 체력 넘쳐서 많이 걸어 다닐 수 있을 때 꼭 한 번은 들를만한 여행지인 것은 확실하다. 개인적으로는 정말 본격적으로 엉망진창 스페인어를 자신감 있게 뱉을 수 있게 된 곳이었고 사진첩에 그림 같은 사진들도 여럿 남겨준 나라였다. 다음 여정은 볼리비아로 개인적으로 기대하고 있는 대도시 라파즈와 남미여행자의 필수코스 우유니사막이 기다리고 있다. 그전에 먼저 티티카카 호수변의 코파카바나에서부터 여정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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