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상현 Aug 03. 2023

[세계여행] D+35 코파카바나, 태양의 섬

마음이 편안해지는 볼리비아의 처음


볼리비아에 넘어왔으니 기본적으로 해야 하는 일부터 해결했다. 호텔 체크인을 하고 친구와 전화로 콜롬비아 여행일정을 조율한 뒤 야간버스를 타느라 못 한 식사를 위해 다른 것 다 제쳐두고 송어구이부터 먹으러 갔다. 유명하다는 포장마차를 찾아 항구 쪽으로 나가는데 도시 자체는 한적해서 몰락한 유원지 느낌이지만 역시 날씨가 좋아서 새파란 티티카카 호수에 떠 있는 하얀 배들이 평화로운 느낌을 준다. 송어구이는 확실히 다른 도시에서 먹은 것보다 크기도 훨씬 크고 맛도 있었다. 5000원도 되지 않는 25볼밖에 안 하는 가격에 만족감은 더욱 올라갔다. 밥을 먹고 마을로 향하는 길에 예전 세계테마기행에서 보았던 새 차를 축복하는 의식을 구경했다. 볼리비아 사람들은 새 차를 구매하면 사진과 같은 식으로 장식을 하고 보닛을 열어서 무사고를 기원하는 의식을 한다는 내용이었다. 


시내로 이동해 가지고 있던 달러 현금을 환전하는데 공식 환율보다 더 좋은 1달러당 7볼을 제안하여 처음에는 약간 혼란스러웠다. 역시 볼리비아도 통화 약세로 인해 달러를 선호하다 보니 벌어지는 일인 듯싶다. 유심도 시내에 있는 entel 공식 대리점에서 싼 가격에 빠르게 구매했다. 시내는 정말 작고 관광객이 볼만한 것도 전혀 없었다. 코파카바나에는 도미토리가 많지 않고 싱글룸 가격도 저렴한 편이어서 오랜만에 개인실을 예약했다. 혼자 편하게 쉬다가 일몰 조금 전에 맞춰 전망대에 올라갔다.



전망대는 누가 봐도 전망대라는 느낌으로 우뚝 솟아있는데 올라가는 길이 짧지만 상당한 난이도를 자랑한다. 기본적으로 4000m에 가까운 고도에 짧긴 하지만 경사 자체만 놓고 봤을 때는 킬로토아 막판 못지않다. 그래도 그동안 고산에서의 혹독한 트래킹으로 훈련이 되어있었기에 빨리 올라왔지만 아무리 뷰가 좋아도 쿠스코 전망대처럼 계속 다시 올라가지는 못 할 것 같다. 끝이 보이지 않는 티티카카 호수의 수평선으로 지는 해의 모습을 한 시간가량 지켜보며 멍하니 시간을 보냈다. 코파카바나 마을과 항구도 해가 져감에 따라 실시간으로 색감이 바뀌어갔다. 원래 이런 곳에서는 소리도 풍경의 일부라고 생각해 일부러라도 음악을 듣지 않는 편인데 이 날은 좋아하는 음악이 너무 듣고 싶어 이어폰을 꼈다. 위수와 유다빈밴드의 음악이 일몰의 훌륭한 bgm이 되어주었다. 해가 완전히 넘어가고 호수 반대편 마을을 보니 티티카카호와는 전혀 다른 사막도시의 모습이 펼쳐졌다. 사진에는 작게 나오지만 실제로는 달과 황량한 산이 정말 크게 보여 방금까지 보던 호수에 접한 도시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대조를 이뤘다.


전망대가 원래 어떤 용도로 지어진지는 모르겠는데 올라가는 길과 산 꼭대기에 누군가를 기리는 듯하는 십자가가 가득했다. 페루에서 볼리비아로 넘어오자마자 가장 먼저 느껴졌던 것은 사람들의 일상에 종교가 차지하는 비중이 훨씬 커 보인다는 것이다. 새 차를 축복하는 의식도 그렇고 전망대에서도 한쪽에서는 어떤 의미가 있는지 모를 십자가를 만지며 무엇인가를 비는 줄이 길게 늘어섰고, 다른 한쪽에서는 어떤 의식인지 모를 무언가를 태우는 전통의상을 입은 할머니들이 가득했다. 전망대에서 내려오는 많은 사람들도 마주치는 십자가에 돌을 던지며 성호를 긋고 소원을 빌었다. 이런 분위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거대한 호수와 맞닿아 있는 조용한 마을 코파카바나는 확실히 편안한 인상을 주었다. 저녁으로 또 송어구이를 먹고 볼리비아에서의 첫날을 마무리했다.


다음날은 티티카카호 위에 위치한 태양의 섬에 들어가 보기로 했다. 태양의 섬은 잉카인들에게 신성하게 여겨지는 섬으로 곳곳에 잉카유적이 위치하고 있다. 2019년에 한국인 여행객이 사체로 발견되어 우리나라 외교부에서 아직까지도 출국권고인 적색경보를 유지하고 있는 지역이지만 이 사건 이후에도 다녀왔다는 후기들이 차고 넘치고 외국 관광객도 많은 곳이라 큰 고민 없이 태양의 섬으로 향하는 배를 예매했다. 외교부의 공식 입장이니 내가 뭐라고 하기는 그렇지만 솔직히 한 번 사건 때문에 경보를 발령시키고 업데이트를 하지 않은 느낌이다. 배에 오르기 전 아침거리를 찾아 동네를 헤매다가 현지인들이 많이 식사를 하고 있는 수프집에 들어가 아침메뉴로 파는 수프를 먹었는데 감동적인 맛이었다. 설렁탕, 도가니탕, 삼계탕을 섞은 맛으로 수프가 흔한 남미에서도 단연 으뜸이었다. 15볼이라는 가격도 감동적이었다.



태양의 섬으로 향하려면 코파카바나에서 배에 올라 티티카카 호수를 2시간 정도 가로질러 가야 한다. 배에 일찍 탑승해 루프탑에 앉을 수 있었는데 해가 구름 사이로 들어갈 때마다 춥고 나무로 된 간이 벤치라 자리가 불편했다. 그래도 호수와 섬이 어우러진 뷰는 감상할 가치가 충분했다. 태양의 섬에는 북쪽과 남쪽에 각각 하나씩의 항구가 있는데 나는 북항에 내려서 섬을 가로질러 걸어 남항에서 돌아오는 일정을 짰다. 



솔직히 태양의 섬은 돌섬이라 나무가 많이 없고 황량한 느낌으로 섬 자체가 아름답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대신 섬을 둘러싸고 있는 티티카카 호수와 그 너머에 솟은 설산을 보며 걷는데 의미가 있다. 트래킹 코스는 생각보다 오르락내리락이 심했다. 전 날 잠을 푹 자지 못 했고 점심 먹기가 애매해 2시 넘어서까지 트래킹을 하다 보니 체력이 조금 떨어진 탓에 필요 이상으로 힘들었던 것 같다. 길은 제주도 올레길 느낌도 있고 강화도 느낌도 있으면서 나같이 조금은 힘든 상태에서 경치를 봐야 만족감을 느끼는 변태들에게 딱 맞는 코스였다. 섬에서 불편하거나 위험한 느낌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지금까지 남미에서 갔던 곳 중에 가장 조용하고 평화로운 곳이었다. 9월에 유럽으로 넘어가는 것 이후로는 여행일정을 정해놓은 것이 전무한데 태양의 섬을 걸으며 산티아고 순례길이나 걸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순례길은 지금까지 아예 관심이 없었는데 이유는 아직까지도 그냥 막연히 한국사람 많은 유럽 관광지가 싫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런데 유럽에서 순례길만큼 마음껏 걸을 수 있는 코스도 드물기에 고민이 된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프랑스길 말고 포루투갈길로 가는 방법이 있을 것 같은데 아직은 더 생각이 필요할 것 같다. 


코파카바나와 태양의 섬은 페루에서의 바쁜 여행을 마치고 볼리비아로 넘어가며 편안한 마음을 회복하기에 너무 좋은 곳이었다. 많이들 쿠스코에서 라파즈로 바로 넘어가는데 시간 여유만 있다면 딱 이틀 쉬기 좋은 곳인 것 같다. 솔직히 여행자가 그 이상 할 것은 없다. 다음 행선지는 개인적으로 기대를 많이 갖고 있는 볼리비아의 실질적 수도 라파즈다. 남미여행에서 거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대도시의 혼란스러움과 에너지를 느끼기를 기대하고 있다. 기대가 많으면 실망하기 마련이지만 어떻게 될지 두고 볼 일이다.

작가의 이전글 [세계여행] D+34 비니쿤카, 성스러운 계곡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