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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상현 Aug 12. 2023

[세계여행] D+38 라파즈

남미에서 기대하던 대도시


아침 일찍부터 전날 맛있게 먹었던 수프집에서 식사를 하고 라파즈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아침의 티티카카 호수를 계속 바라보며 가는 길은 좋았지만 버스 창문 고정장치가 고장 나서 추운 바람을 막기 위해 몇 분에 한 번씩 수동으로 창문을 닫아주어야 했다. 한 시간 정도 달리던 버스가 갑자기 한 마을에 서더니 사람들이 내리기 시작했다. 조금 후에는 경찰이 탑승해서 여권검사를 하길래 그냥 으레 있는 검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검사 후 버스에서 내려서 보트를 탑승하라는 얘기를 들었다. 사실 라파즈로 가는 버스만 예약하고 아무런 정보도 알아보지 않아서 모르고 있었는데 코파카바나에서 라파즈로 향하는 버스는 중간에 한번 바지선에 실려 티티카카 호수를 건너야 했다. 덕분에 뜻밖에 작은 보트에 올라 마지막으로 티티카카 호수를 가로지르게 되었다. 



이후 라파즈로 두 시간여를 더 달렸다. 이 주 주말이 볼리비아의 독립기념일이라 지나가는 작은 마을들에서도 길을 막고 조그마한 퍼레이드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라파즈로 들어서는 초입부터는 축제의 규모가 훨씬 커졌다. 라파즈가 계곡 사이에 들어선 도시라 시내로 들어서려면 가파른 경사를 내려와야 하는데 미디어에서 보던 것처럼 계곡 전체에 낮은 건물들이 가득 들어서 있었다. 버스에서 보는 라파즈의 첫 느낌은 확실히 사람 많은 대도시의 느낌이었는데 그렇게까지 무질서한 느낌은 아니었다. 빽빽한 도시와 그 뒤로 멀리 보이는 설산이 내가 가지고 있던 남미 대도시의 느낌과 잘 들어맞았다.



버스에서 내려서 숙소로 걸어가는데 한 현지 식당 앞에 순대처럼 보이는 음식 사진이 붙어있어서 마침 점심시간이라 무작정 시도해 보았다. Tripa rellena라는 음식이었는데 약간 찹쌀순대 같은 느낌으로 돼지고기 내장에 쌀과 내장 부속을 넣어 튀긴 요리인 것 같았다. 맛은 쌀 알갱이가 조금 딱딱하고 짜서 순대만큼은 아니었지만 나쁘지 않았다. 



숙소에 도착해서 체크인을 한 후 안 그래도 라파즈에서 꼭 하고 싶었던 워킹투어가 30분 후에 시작하길래 바로 신청을 하고 피곤함을 누르며 미팅포인트로 향했다. 마녀시장에서 시작해 중앙시장, 스페인 양식의 구도심, 국회와 대통령궁이 위치한 중앙광장, 산 페드로 교도소를 거치며 라파즈와 볼리비아에 대한 전반적인 설명을 들었다. 하루에 대통령이 여섯 번 바뀐 적이 있을 정도로 혼란스러웠던 볼리비아의 정치, 식민시대 이후 수많은 전쟁을 치르며 영토를 빼앗겨온 역사, 전통신앙과 가톨릭이 결합된 복잡한 문화에 대한 내용이 주를 이뤘다. 다른 도시는 도시투어를 할 만큼 크지도 않았고 시간도 애매해서 워킹투어에 참여하지 않았는데 역시 설명을 들으며 도시구경을 하니 확실히 보이는 것도 많고 재미있는 시간이었다. 참가비와 가이드 팁을 따로 받아서 생각한 것보다는 비쌌지만 그래도 충분히 참가할만한 가치가 있었다. 밤에 케이블카를 탈까 고민하다 너무 피곤했기에 쉬러 숙소 쪽으로 돌아와서 바로 옆에 있던 인도음식점에서 저녁을 먹었는데 지금 것 먹었던 인도음식 중 가장 맛이 없었다. 역시 남미에서는 괜히 다른 나라 음식을 시도하기보다는 그냥 현지 음식점이 저렴하고 맛도 기본은 하는 것 같다.



다음날은 오전에 라파즈 외곽에 위치한 달의 계곡을 가려는 계획을 세웠다. 투어 없이 대중교통으로 갈 생각이라 인터넷으로 정보를 찾아보니 산프란시스코 광장에서 가는 버스가 있다고 했다. 그러나 독립기념일이 점점 다가오면서 이 날은 학생들의 퍼레이드로 인해 광장 앞 메인 도로가 폐쇄되어 있었다. 바로 옆 도로로 버스가 우회할 것 같다는 생각에 20분 정도 서서 기다렸지만 버스는 오지 않았다. 기왕 이렇게 된 거 퍼레이드 행렬을 따라 내려가보면 통제가 풀리는 어딘가에서 버스를 찾을 수 있겠지 하는 생각으로 쉬엄쉬엄 축제구경도 하면서 걸었다. 학교별로 복장을 맞춰 입고 발을 맞춰 걷는데 보통은 각 학교의 기수가 앞장서고 그 뒤로는 기악대, 학생, 교직원 순으로 지나가는 듯했다. 길을 따라 몇 킬로미터를 쭉 내려가니 교육부 고위공무원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앉아있는 단상이 있고 그곳이 퍼레이드의 최종 목적지인 듯했다. 정말 라파즈 내의 모든 학교가 참가한 건지 몇 시간 동안 퍼레이드가 끝도 없이 이어졌다. 이 메인도로 이외에도 도시 곳곳에서 고등학교 졸업반으로 보이는 학생들부터 어린 초등학생들까지 유니폼을 맞춰 입고 평일임에도 학교 대신 도로를 가득 메웠다. 학생들이라 전문적이거나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괜히 나도 신나고 들뜨는 기분이었다. 볼리비아 사람들이 독립기념일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가 느껴지면서도 평일에 나한테 저런 옷 입혀놓고 사람들 많은 거리에서 행진하라고 했으면 하기 싫었을 것 같기는 하다. 실제로 정말 하기 싫어 보이는 아이들도 더러 있었다. 



오전 내내 퍼레이드를 구경하다 끝내 버스를 찾지 못해 케이블카나 타고 도시를 돌 생각으로 시내 정류장으로 향했다. 계곡에 위치한 라파즈는 워낙 동네 간 고도차가 심하다 보니 케이블카를 대중교통으로 도입했다. 덕분에 관광객들도 저렴한 요금으로 케이블카를 타고 도시 전경을 구경할 수 있다. 처음에는 표를 사는 방법이 생소해서 조금 헤맸지만 그냥 창구에 가서 표를 몇 장 달라고 하면 되는 간단한 방식이었다. 정류장에는 생각보다 사람들이 많아서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지만 케이블카 하나에 8명 정도가 탈 수 있어서 굉장히 빠른 속도로 앞으로 이동했다. 케이블카는 관광용이 아닌 대중교통이라 그런지 생각보다 빠른 속도로 이동했다. 발 밑으로는 우리나라 달동네는 저리 가라 할 정도의 경사에 집들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차로 올라가려면 경사도 급하고 굽이굽이 돌아가느라 한참 걸릴 거리를 케이블카로 금방 올라가는 것을 보며 정말 좋은 아이디어를 실현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 워킹투어 가이드가 추천해 준 루트대로 도시를 한 바퀴 돌았는데 높은 곳에서 본 전경도, 집들과 가까운 곳에서 본 달동네의 모습도 라파즈 사람들에게는 치열한 삶의 현장이겠지만 나에게는 너무 아름답게 느껴졌다.


한 시간이 넘게 케이블카를 타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이 날의 퍼레이드는 끝나있었고 도로통제도 풀려있었다. 혹시나 하고 길을 걸으며 버스 번호들을 유심히 보니 아침에 찾던 902번이 보여 얼떨결에 콜렉티보를 세우고 달의 계곡으로 향했다. 봉고차 정도의 사이즈에 사람들을 가득 채워서 운행하는 로컬버스였는데 앞 좌석에 기사와 조수석 사이 자리에 앉게 되었다. 달의 계곡으로 향하는 길에는 말로만 듣던 라파즈의 교통체증을 체험했다. 오전에 퍼레이드를 따라서 걸어 내려온 길을 차로 통과하는데 비슷한 시간이 걸렸다. 또 바로 기사 옆자리에서 운전하는 모습을 지켜보니 역시 클락션은 모든 상황에 울려대니 쉴 틈이 없고 과감하게 도로 중간에서 유턴을 한다던가 하는 게 정말 남미 로컬 느낌이 가득했다. 라파즈는 광역권 인구가 200만 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데도 도시가 계속 이어져서 대도시의 느낌이 났다. 달의 계곡은 외곽의 조금 한적한 동네에 있는데 이곳으로 향하는 길에는 널찍한 정원을 가진 집들이 여유 있게 위치한 부촌으로 보이는 동네도 있었다. 케이블카에서 본 달동네의 빽빽한 모습과 대조를 이루는 모습이었다.



달의 계곡은 오후 늦게 가서 그런지 사람도 많이 없었고 규모도 그리 크지 않았다. 라파즈가 위치한 계곡은 지반이 대부분 암석이 아니라 진흙인데 이것이 풍화작용을 거쳐 사진과 같이 이색적인 지형을 만들어 낸 것이라고 한다. 실제로 보면 엄청나게 신기하는 느낌은 아닌데 산책하는 코스도 짧고 평탄해서 그냥 라파즈에 온 김에 한번 정도 갈 만한 정도다. 1시간 정도 여유 있게 관람을 마치고 시내로 돌아가는 버스를 기다렸다. 콜렉티보는 좌석이 가득 차면 정류장에 정차하지 않아서 30분 정도동안 4-5대의 버스를 보내고 겨우 다음 버스에 올라탈 수 있었다. 시내로 돌아와 길거리에서 파는 햄버거로 요기를 하고 우유니의 추위에 대비해 장갑과 목도리를 샀다. 아직 배가 덜 차서 엠빠나다와 오렌지주스를 사들고 숙소로 돌아와 식당에서 호스텔 친구들과 얘기하는데 어쩌다 유럽 친구들과 정치 얘기가 시작되어서 12시까지 떠들다 잠들었다. 프랑스에서 온 한 친구가 환경문제나 기타 사회문제에 대해서 굉장히 이상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는데 나는 평소에는 이상적인 얘기를 많이 하다가도 그런 사람을 만나면 굉장히 현실적으로 변하기 때문에 때로는 마치 내가 보수적 입장을 대변하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그래도 원래 상대방의 입장에 극단적인 반론을 제기하는 게 내가 생각하는 방식이고 환경, 경제, 마약, 이민문제등 재미있는 얘기가 많이 나와서 오랜만에 머리를 굴리는 느낌이라 좋았다.



원래 볼리비아에서는 코파카바나, 라파즈, 우유니 이렇게 세 곳만 여행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코파카바나에서 넘어올 때 숙소 예약을 2박만 했고 라파즈 2일 차에 생각보다 많은 것을 해서 다음날 아침에 숙소를 연장하고 너무 좋았던 라파즈에 더 머무를지, 아니면 포토시로 이동할지 어려운 고민을 했다. 체크아웃 시간 직전까지 고민하다 라파즈가 너무 좋지만 관광객으로서 할만한 것들은 웬만큼 다 했다는 생각이 들어 포토시로 가기로 마음을 정했다. 체크아웃을 하고 짐을 맡기고 오늘도 거리 가득한 퍼레이드 행렬을 보며 먼저 버스터미널로 향했다. 포토시로 가는 버스를 알아보면서 버스회사들을 돌아다니니 다 같은 가격을 불렀고, 알고 보니 노선별로 최저가격과 최고가격이 정찰제로 정해져 있었다. 버스표를 구매하고 또다시 퍼레이드를 구경했다. 오늘은 단상 중앙에 중요해 보이는데 옷은 운동복을 걸친 아저씨가 서 있었는데 검색해 보니 라파즈의 시장이었다. 나름 친근하게 아이들한테도 계속 손을 흔들어주는 모습이었다. 한참 퍼레이드를 구경하고 도시를 여기저기 걸어 다니고 또 케이블카에 탑승해 이번에는 다른 노선으로 도시를 한 바퀴 돌았다. 그냥 거리를 걸어 다니고 케이블카를 타면 어디서든 보이는 산 위의 빽빽한 갈색 집들과 사람이 가득한 정신없는 도시가 너무 좋았다. 몇 시간이 지났는데도 퍼레이드는 계속되고 있었고 라파즈 시장은 역시 다른 데 가고 없었다. 



갑자기 결정된 라파즈의 마지막 날이라 아직 보지 못한 야경을 보러 낄리낄리 전망대로 올라갔는데 우리나라 트로트와 비슷한 약간은 촌스러운 음악에 맞춰 뮤직비디오를 찍고 있었다. 전망대 여기저기 이동하면서 꽤 오랫동안 찍어서 어차피 일몰까지 시간도 많겠다 자리 잡고 앉아서 도시의 경치와 함께 촬영현장을 구경했다. 



해가 져가면서 전망대에서 보는 도시의 색깔이 계속 달라졌고 해가 진 후에는 정말 화려한 야경이 펼쳐졌다.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라파즈 시내의 모습은 약간 남산에서 바라보는 을지로 쪽 느낌도 있었다. 대도시와 야경을 좋아하는 나에게는 완벽한 조합이었다. 사실 밤에 케이블카를 타지 못한 것이 좀 아쉬웠는데 전망대에서 보는 풍경으로 충분히 상쇄가 가능할 것 같았다. 전망대에서 페루에서 만났던 한국 부부분을 오랜만에 만나서 식사를 같이 하고 야간버스를 타기 위해 짐을 챙기려 부랴부랴 호스텔로 향했다. 호스텔 지하에서 짐을 챙기다 보니 익숙한 얼굴들을 보게 되었다. 한 명은 쿠스코에서 우연히 마주친 적 있던 여행유튜버인데 첫날 호스텔에서 마주쳐서 같은 숙소에 묵고 있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여행유튜버도 같이 있었는데 최근에 페루를 여행하고 있는 영상을 봐서 근처에 있는 건 알았지만 여기서 마주치니 반가웠다. 


짐 싸고 터미널로 나가는 잠깐의 시간 동안 서로 여행얘기를 했다. 두 분은 같이 와이나포토시 등반을 한다고 하는데 나는 너무 힘들다는 후기를 많이 봐서 포기한 곳이었다. 라파즈에 더 있을 줄 알고 사놨던 3L짜리 물 남은 것을 넘기고 그 와중에 정신없어서 널어놓은 속옷 빨래는 챙기는 것을 깜빡했다. 사진을 부탁해서 같이 찍고 터미널로 급하게 향했다. 밤에는 위험할 수도 있다는 길을 지나가야 하는데 버스를 놓치지 않으려니 그런 것 신경 쓸 틈도 없이 빨리 걸어서 도착했다. 


라파즈는 가뜩이나 축제 기간까지 겹쳐 내가 원래 생각하는 정신없고 활기찬 남미의 느낌이 가득해 너무 좋았지만 솔직히 여행객으로서 볼 것이 많은 도시는 아니다. 그럼에도 도시가 주는 느낌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마음 같아서는 서울에서처럼 아무 생각 없이 달동네들을 오르락내리락하고 싶었지만 윗동네일수록 치안이 좋지 않아서 포기해야 했다. 짧은 여행보다는 차라리 장기간 살아보고 싶은 느낌이 드는 도시였고 포토시로 향하는 순간까지 고민했을 만큼 떠나기 아쉬운 도시였다. 나중에 치안이 안정되고 남미까지 오는 시간이 획기적으로 줄어든다면 당연히 1순위로 다시 올 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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