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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상현 Aug 13. 2023

계급 없는 진보정치는 위선이다

문제는 소득이야, 이 바보들아

내가 만약 독일에서 선거권이 있었다면 어떤 정당에 표를 던졌을까. 예전에는 조금 달랐지만 지금은 확실하게 기권표를 던질 것 같다. 그러나 가장 좋아하는 정치인이 누구냐고 물으면 당연히 (아직까지는) 좌파당 소속의 자라 바겐크네히트(Sahra Wagenknecht)를 뽑겠다. 그녀는 독일 정치권에서 단연 문제적 인물로 뽑히지만 또 동시에 가장 높은 대중적인 인기를 구가하는 정치인 중 한 명이다. 한때 좌파당의 희망으로 여겨지며 원내대표직까지 역임했지만 당 내 노선싸움에서 패배해 당직을 내려놓고 지금은 녹색당과 좌파당 내의 라이프스타일 좌파(Lifestyle-Linke)를 신랄하게 비판하며 신당창당을 저울질하고 있다. 정치에서 아무리 소신에 기반된 발언이라 해도 내부총질은 보통 대중의 외면을 받기 십상임에도 바겐크네히트의 경우는 정반대이다. 10년 전 제1야당의 위치까지 올랐던 좌파당은 여론조사에서 원내입성을 위한 최소 정당득표율 5%도 넘기지 못하고 있는 반면에 그녀는 가장 인기 있는 정치인 조사에서 꾸준히 순위권에 들고 있다.


바겐크네히트의 비판을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높은 소득 수준과 사회적 위치를 구가하며 주로 도시에 거주하는 라이프스타일 좌파는 선민의식에 가득 차 사람들에게 '진보적'인 라이프스타일을 설교한다. 이를테면 고기를 생산하기 위해 가축을 사육하는 방식이 환경파괴적이고 비인간적이니 모두가 채식이나 친환경 육류를 소비해야 한다든지, 환경보호를 위해 국내선 저가항공을 금지해야 한다든지, 여성차별 해소를 위해 여성할당제를 도입하고 성 중립적인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는 것 말이다. 또 그녀의 지적은 라이프스타일 좌파의 해결책이 근본적인 시스템을 건드리는 것이 아니라 단지 소비재의 가격을 높여 사용자의 수를 줄이는 데에만 그친다는 것으로도 향한다.


경제학에서 가격을 인위적으로 평형가격 위로 올리면 유보가격이 낮은 사람들이 구매를 포기하기에 전체적인 수요가 줄어들게 된다. 그리고 여기서 구매자 개개인의 유보가격은 개개인의 선호(preference)에 의해 정해지므로 총수요 감소를 위한 가격정책은 국가의 임의적 배급제한 등의 강압 없이 그 목표를 이룰 수 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나는 오래전부터 이 부분이 경제학에서 가장 마음에 들지 않았다. 구매자의 유보가격은 선호도(willingness to pay) 뿐 아니라 지불능력(ability to pay)에 따라서도 좌우되기 때문이다. 한 통에 2000원 하던 우유가 5000원으로 오르면 우유를 마심으로 5000원의 만족감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돈이 있다면 5000원을 내고라도 우유를 마시고 싶지만 현재는 우유 한 통에 5000원을 지불할 수 없는 사람들 또한 구매를 포기하게 된다. 경제학의 선호와 자발성 타령은 모두가 무제한의 지불능력을 가지고 있을 때만 유효하다. 현실에서는 육류가격을 올리면 돈 없는 노동자가 육류소비를 포기해야 하고, 국내선 저가항공을 금지하면 가진 자들이 비싼 기차나 자가용을 타고 새로운 곳으로 휴가를 가는 동안 못 가진 자들은 집 근처 공원에서의 휴식에 만족해야 한다. 그들이 고기를 싫어하게 되고 휴가를 가고 싶지 않게 되어서가 아니라 '진보적'인 라이프스타일이 수반하는 비싼 가격을 지불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라이프스타일 좌파의 정체성정치도 마찬가지다. 바겐크네히트는 신좌파 정치인들이 '차별받는' 그룹을 찾아내고 그들을 대표 또는 대표하는 척하는데만 매몰되어 있으며 한 사람의 정체성만으로 그가 해도 되고 하면 안 되는 말을 규정한다고 얘기한다. 예를 들어 이민정책에 있어서 백인 노동자가 본인의 일자리를 뺏길까 하는 걱정으로 비판적은 스탠스를 취하면 바로 인종차별주의자로 몰아가고 남성이 '성 중립적 언어'의 문제점을 지적하면 남성우월주의자로 몰아가는 것 따위의 일이다. 논거의 타당성이 아니라 메신저의 아이덴티티가 메시지의 유효성을 정하는 행태는 그 자체로 민주주의에 해가 된다.


라이프스타일 좌파의 이 같은 스탠스는 어느 정도는 정치적 필요성에 반응한 결과다. 1970년대의 연속되는 경제위기와 이어지는 신자유주의 헤게모니로 인해 노동자들을 겨냥한 전통적인 사회주의 정책으로는 과반득표가 어려워지자 서구의 좌파정당들은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 등 사회적 소수자 그룹들의 인정투쟁을 대변하는 전략을 취해왔다. 그러나 전자 없는 후자는 사회의 진짜 패배자인 못 가진 자들의 물질적, 문화적 희생을 요구한다. 좌파정치의 의미를 빈자를 위한 정치에서 찾는 '올드스쿨' 좌파들에게 이는 진정한 좌파가 아니다.


위의 예시들 외에 이를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정책은 할당제다. 가장 보편적인 여성할당제를 살펴보자. 이미 많은 사람들이 지적했듯이 여성할당제는 남성들의 막연한 반감을 사고 혜택을 보는 여성들에게도 본인의 몫이 아님에도 오직 할당제로 특정한 자리까지 올라왔다는 낙인을 찍는 등 부정적인 효과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좌파적 입장에서 가장 강력한 비판들은 그 결이 조금 다르다. 첫째로 지금 시행되는 형태의 여성할당제는 이미 가진 것이 많은 '부르주아' 여성을 더 배 불리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독일의 경우같이 식시장에 상장된 대기업에 일정 비율 이상의 여성임원을 두도록 강제하면 결국 이 할당제로 이득을 보는 것은 이미 임원 자리 가까이에 간 여성들일 것이다. 아마도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좋은 교육을 받고 이미 중산층 이상의 소득을 향유하는 운 좋은 이들이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할당제의 득을 보며 임원 자리에 오르는 것이다. 성별에 상관없이 언제나 최저임금을 받으면서도 늘 해고를 두려워해야 하는 노동자들이 과연 저런 할당제가 평등한 사회로의 발전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겠는가?


더 큰 문제는 소위 진보적 정치세력이 이러한 이유로 여성할당제에 반감을 가지고 있는 가지지 못한 자들을 이성적이고 정의롭지 못한 성차별주의자로 낙인찍는다는 것에 있다. 다양한 이유로 여성할당제, 친이민정책, 탈원전정책 등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논리에 귀 기울이는 대신 그들을 성차별주의자, 인종차별주의자, 환경파괴범으로 몰아가는 유치한 프레이밍이 판치고 있다. 변화를 걱정하는 보통 사람들을 설득하기보다는 무시와 멸시로 대응하는 것이 그들이 그렇게 원하는 사회발전에 걸맞은 방식일까? 유럽, 미국, 한국 할 것 없이 자기들의 생각만 옳다고 우기는 자칭 진보주의자들의 속내는 비판을 건전하게 소화하지 못하는 전체주의적인 모습을 띄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라이프스타일 좌파가 고작 성별, 인종할당제나 탈원전 같은 피상적인 정책만을 추구하고서는 마치 사회발전을 위해 대단한 일이라도 한 듯 으스댄다는 것이다. 그런 정책으로부터 직접적인 이득을 보지 못하는 못 가진 자들은 좌파정당으로부터 외면받았다는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 중 일부분이 극우정당으로 고개를 돌리는 현상에 대한 원인을 멸시적인 태도로 이들의 부족한 교육 수준 따위의 것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꼴통들이 가득한 극우정당 보다도 이들을 설득하지 못한 기존의 좌파정당의 무능력함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해결방법은 간단하다. 좌파의 본질로 돌아가야 한다. 문제는 돈이고 돈이 계급을 만든다. 돈 많은 여성이나 흑인이 차별의 피해자라고 호소하는 세상이 아니라 그들의 피부색, 성별, 성적 정체성이 어떻든 돈 없는 사람들이 도움을 받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최저시급을 받는 백인 노동자가 이민정책으로 인한 실업을 걱정하면 그를 못 배운 인종차별주의자로 손가락질할 것이 아니라 그의 걱정을 해소해 줄 사회적 담론과 정책적 대안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환경보호라는 미명 아래 못 가진 자들의 소비를 제한할 것이 아니라 가진 자들의 책임을 상기시키고 그들의 기여를 요구해야 한다. 진보정치는 어떻게 하면 새로운 피해자 가해자 프레임을 짜 표를 얻을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빈자와 부자의 싸움에 다시 집중해야 한다. 이 사회의 진정한 패배자는 빈자들이고 진보정당은 그들의 스피커가 되어야 한다. 이 계급투쟁에 관심이 없는 라이프스타일 좌파는 바겐크네히트의 비판처럼 진정한 좌파가 아닐뿐더러 온정주의적이고 위선적이다. 예전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문제는 경제적 계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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