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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상현 Dec 05. 2023

[세계여행] D+159 아테네

아테네는 왜 갈 때마다 좋은 걸까? 

독일에서 쉬면서 그 사이 정말 할 것 많고 귀찮았던 박사과정 지원을 어느 정도 마치고 취리히에서 또 다른 통역 한 건을 뛰고 왔다. 다시 여행을 시작하기 전 전에 6년 동안 살았던 베를린도 잠깐 들렀다. 12월 이집트 여행은 전부터 계획이 되어 있었고 이동 편을 살펴보던 중 생각보다 독일에서 출발하는 항공편이 비싸서 아테네에 3박 4일을 거쳐 가는 일정을 잡았다. 아테네는 5년 전에 여행한 적이 있는데 5일의 짧은 일정이었고 관광할 장소가 많지는 않았지만 굉장히 좋은 인상을 받은 기억이 있었다. 파르테논 신전을 비롯한 주요 관광지는 지난번 여행 때 이미 들러서 이번에는 다시 시작하는 여행을 위한 몸풀기를 겸해 저번에 가지 않은 곳을 쉬엄쉬엄 돌아보는 일정을 계획했다. 


도착 당일은 오후 늦게 입국 후 호스텔 앞에서 수블라키를 사 먹고 마무리하고 둘째 날 오전에 아테네 시내 전경이 보이는 리카베투스 산에 오르기 위해 길을 나섰다. 숙소에서 한 시간 정도 걸렸는데 생각보다는 경사가 있었지만 많이 힘들지는 않았다. 산 위에는 조그맣고 예쁜 교회가 자리 잡고 있었고 사방으로 아테네를 내려다볼 수 있었다. 도시는 생각보다 빽빽하고 규모가 컸다. 구시가지의 아크로폴리스와 그 뒤로 바다까지 보였는데 아쉽게도 날씨가 흐려서 가장 예쁜 모습이 아니라 아쉬웠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상당한 양의 눈과 함께 영하로 내려갔던 독일에 있다 오니 날씨가 따뜻해서 좋았지만 언덕 위에는 바람이 많이 불어 쌀쌀했다. 



전망대에서 내려와 시내를 구경하며 쉬엄쉬엄 걷다 필로파소스 언덕에 올라 아크로폴리스를 근거리에서 다시 한번 보고 늦은 점심 겸 저녁을 먹었다. 뭘 먹을까 고민하다 구글지도에서 관광객들 보다는 현지인들이 훨씬 많은 듯 한 식당을 찾아서 그곳으로 향했다. 물론 돈만 많으면 시내에 비싼 식당에서도 맛있는 식사를 할 수 있겠지만 아테네에서 정말 일반 사람들의 음식을 먹고 싶다면 관광지에서 약간만 벗어나도 꽤 많은 괜찮은 식당들이 있다. 4시 정도로 애매한 시간임에도 안쪽 구석 자리밖에 남지 않을 정도로 현지인들이 많았다. 가지를 넣고 만든 빵, 매운 페타 치즈, 대구구이와 작은 화이트와인을 시켰는데 독일에서는 단품 메뉴 하나 가격인 12유로로 아주 맛있고 배부르게 식사를 해결할 수 있었다. 



식사 후에는 서서히 지는 해를 뒤로 하고 로만 포럼, 히드리아누스 도서관 등의 폐허와 활기찬 모나스트라키역 근처 식당가, 플라카 지구의 고즈넉하고 낭만적인 골목들을 걷다 숙소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동네 이발소가 보여서 고민하다 5유로를 주고 머리를 잘랐다. 이집트가 더 쌀 수도 있겠지만 아예 말도 안 통하는 곳에서 눈탱이 맞을 바에는 그래도 저렴한 편이고 사기는 당하지 않을 그리스에서 해결하는 게 낫다 싶었다. 파키스탄이나 방글라데시 쪽 출신으로 보이는 이발사가 바리깡이 잘 들지 않는지 계속 머리에 꾹 누르고 비벼대서 신뢰가 안 갔지만 결과물은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셋째 날에는 저번 여행 때 아쉽게 가지 못 했던 수니온 곶에 있는 포세이돈 신전을 가 보기로 했다. 숙소 앞에서 출발하는 버스를 타고 혼자 갈 수도 있었지만 막차 시간 때문에 일몰을 볼 수 없어서 10유로 정도 더 비쌌던 투어를 신청했다. 오전에는 숙소 앞에 있는 조지아식 파이 집에서 정말 맛있었던 파이를 사 먹고 또 특별한 목적지 없이 이곳저곳 걸어 다녔다. 시내가 그다지 크지 않아서 어제 갔던 곳들을 다시 걷는데도 너무 좋았다. 유럽을 돌아다니다 보면 바닷가 근처에 따뜻한 지방에서 느껴지는 특유의 여유가 있는데 아테네, 특히 관광객들이 가득한 시내에서 약간 떨어진 로컬들이 모이는 장소들이 정말 그 정점에 있는 것 같다. 10여 년째 박살 난 경제로 인해 고통받고 있는 나라라는 인식과 괴리가 있지만 적어도 내가 걸어 다닌 곳들은 사람들이 늘 죽상이고 틱틱대는 서유럽, 북유럽 국가에서는 느낄 수 없는 너무나 매력적인 분위기였다. 저번에도 비슷한 느낌을 받아서 누가 물어보면 유럽 여행지 중에는 아테네가 가장 좋았다고 말하고 다녔는데 이번에 그걸 재확인했다. 



오후 2시 30분에 투어버스에 탑승해서 아테네 남쪽으로 향했다. 1시간 정도 가이드의 배경 설명을 들으며 달려 첫 번째로 도착한 곳은 현재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극장이라는 토리코스 극장이었다. 아크로폴리스 기슭에 있는 디오니소스 극장이 먼저 지어졌지만 원래 나무로 지어진 것을 대리석으로 재건축한 것이 이곳 토리코스 극장의 완성 이후라고 한다. 이곳 유적지는 극장 외에도 고대문명이나 은광의 흔적이 있어 의미가 있는 곳이지만 경제위기 후에는 발굴도 중단되고 방치되고 있다고 한다. 유적지는 어차피 돌무더기라 별로 인상적이지 않았지만 뒤로 보이는 바다에 접한 한적한 평화로운 마을의 분위기가 좋았다. 



곧바로 포세이돈 신전으로 이동했는데 원래는 입장료가 있지만 이 날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무료입장이 가능한 날이라고 했다. 포세이돈 신전은 생각보다 규모가 많이 작았지만 바닷가 언덕에 서 있는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바다는 생각보다 거칠었고 일몰을 보려 투어를 신청했는데 해가 질 즈음 수평선에 구름이 많이 껴서 노을이 진하지 않아 아쉬웠다. 그래도 남미여행동안 파라카스에서 반나절, 칠레 안토파가스타에서 몇 십분 후에 오랜만에 실컷 바다를 보니 시원했다. 



아테네는 많은 걸 기대하고 오면 실망하기 쉬운 도시일 것이다. 유적지는 너무 오래되어 폐허 수준이라 그 명성에 비해 볼 것이 많이 없고 구시가지의 규모도 생각보다 크지 않다. 하지만 여유로운 유럽의 분위기를 느끼려면 아테네 만한 곳이 없을 거라 확신한다. 개인적으로는 21세기 정치경제학을 공부하며 그리스를 신자유주의의 최대 피해자라고 느꼈고 늘 연민과 동정심을 느끼고 있다. 또 내전과 독재를 경험하고 시니컬하게 생각하면 초라한 현대사에 대한 도피로 고대사를 동경하는 모습도 우리나라와 닮아있어 마음이 많이 가는 나라이다. 몇 년 전에 비하면 많이 좋아지긴 했지만 그리스가 빨리 경제를 회복해 국민들이 자긍심을 되찾았으면 좋겠다. 물론 그러면 물가는 많이 비싸져서 저가 여행으로 다시 가기는 힘들겠지만 그 정도는 기꺼이 감수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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