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상현 Jul 07. 2023

[세계여행] D+7 킬로토아 3일 트래킹

객기 부리다가 해발 4000m에서 탈진하다


세계여행의 시작이 에콰도르가 된 건 내가 이 나라에 딱히 로망이 있어서도 아니고 그냥 남미로 가는 가장 싼 비행기표가 여기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름 처음 들어가는 나라라고 출발 전부터 조금은 애정이 생겨 키토나 바뇨스 같이 남들 다 가는 곳 말고 색다른 곳을 경험해 보고 싶었다. 외국 유튜브와 블로그를 뒤지던 중 킬로토아 호수(Laguna Quilotoa)를 발견했고, 바로 버스를 타고 올라가서 관광만 하는 것이 아니라 3일 동안 40km여를 걸어서 올라가는 트래킹 코스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외국인들 사이에서는 그래도 꽤 알려진 코스인 듯한데 한국인이 작성한 정보는 블로그 딱 한 군데에 있는 포스트가 전부였다. 남들이 안 하는 거 좋아하는 아웃사이더 기질이 또 도져서 평소에 운동도 절대 안 하고 기초체력도 쓰레기 주제에 패기 넘치게 도전했다. 라타쿵가 호스텔 주인분의 도움을 받아 코스 설명도 듣고 오프라인 지도도 다운로드하고, 큰 가방도 호스텔에 맡기고 나름 필요한 준비를 갖췄다.



킬로토아 트래킹은 Sigchos라는 안데스 산맥의 작은 마을에서부터 시작해 매일 15km 정도를 걸어 해발 약 4000m에 있는 킬로토아 호수를 찍으며 마무리된다. 첫날은 거점이었던 라타쿵가에서 아침 8시 버스를 타고 2시간여를 꼬불꼬불한 산길을 지나 Sigchos에 도착하며 시작된다. 버스에서 보는 안데스의 풍경이 벌써부터 예술이었지만 피곤해서 조느라 제대로 감상하지는 못 했다. 어차피 3일 내내 트래킹 하면서 볼 풍경이라 딱히 후회하지는 않는다. Sigchos는 왼쪽 사진에서 보듯이 정말 별거 없는 마을이고 나는 라타쿵가에서 점심거리도 사 왔기 때문에 스킵하고 바로 트래킹 코스로 들어섰다. 마을을 가로지르고 산길을 내려가자마자 달력경치가 펼쳐진다. 사진은 평면이라 입체감이 덜하지만 실제로 보면 정말 깊은 협곡 사이사이 마을과 오솔길이 들어서 있는 모습이 장관이다. 



첫날 코스는 Sigchos에서 Isinliví라는 마을로 가는 코스인데 경험해 본 거의 모든 사람들이 난이도는 쉽다고 했다. 실제로 시작점에서 한동안은 계속 내리막이고 그 이후로도 절경이 펼쳐진 평지 코스가 길게 이어진다. 딱히 체력소모가 심하지 않았기에 중간에서 여유롭게 점심으로 싸 온 엠빠나다도 먹어주고 가는 길에 널린 가축들도 구경해 주면서 '이거 너무 쉬운 거 아냐'하는 생각도 해준다. 



트래킹 코스가 안데스 토착민들의 마을과 경작지를 가로지르기 때문에 정말 별의별 가축을 다 보고 현지인들도 정겹게 인사를 건넨다. 깎아지른듯한 지형에 차로 들어가기도 힘든 위치에 들어선 집들을 보며 도대체 이 사람들은 어떻게 식료품과 생필품을 조달할지 궁금해진다. 가는 길에 네덜란드인 1명, 그리고 처음 Sigchos로 오던 버스에서부터 있던 호주인 1명과 동선이 겹쳐 동행이 되었다. 1일 차는 대부분 쉬운 길이었지만 협곡을 타고 올라가는 40분여간의 등산이 강한 임팩트를 남겼다. 애초에 이 트래킹 자체가 매일매일 시작하는 마을에서 협곡을 내려간 다음, 다음 마을로 올라가기 위해 협곡을 올라가는 코스로 구성이 되어있다. 3일 차가 되면 협곡을 2개 가로지르고 마지막으로 화산 정상으로 올라가야 하기에 미친 오르막을 경험하게 된다. 그래도 이 사실을 모르는 1일 차의 나는 '좀 힘들긴 한데 이 정도면 뭐 껌이네'라고 생각한다. 



목적지에 거의 도착했을 무렵 현지인 할머니가 앉아계셔서 네덜란드 동행이랑 나랑 사진을 찍었는데 1달러를 요구했다. 장난인지 실제인지 몰라서 그냥 갈 길 갔는데 나중에 남미경험이 풍부한 다른 동행에게 물어보니 아마 진심이었을 것이라고 한다. 



다시 달력경치를 지나 출발 후 약 3시간 만에 도착한 Isinliví는 거주민이 30여 가구도 되어 보이지 않는 정말 작은 마을이었다. 등산객을 위한 호스텔이 딱 두 군데 있는데 나는 그중 더 유명한 곳에 묵었다. 도미토리 1박 비용이 에콰도르에서 지불한 최고가인 20불이었지만 어차피 선택지도 없고 저녁과 다음날 아침식사도 포함되어 있으며 시설도 매우 좋았기에 만족했다. 어차피 숙소에 묵는 사람들 모두 같은 킬로토아 트래킹을 하는 비슷한 나이대의 사람들이었기에 어울려 떠들면서 하루를 보냈다.



이틀차는 Isinliví에서 Chugchilán이라는 마을로 가는 4시간짜리 코스였다. 오늘은 전날 숙소에서 만난 호주, 멕시코, 스위스 동행과 함께 총 4명이 함께했다. 시작은 역시 1시간 정도 내리막을 걸어 협곡의 바닥으로 향한다. 산에서 연기가 솟는 것을 보고 아마 화전농업을 하는 것이라 짐작했다. 산 넘고 물 건너 한 채씩 서 있는 집들을 지나다 보니 좁은 내리막에 들어서는데 바닥이 진흙이다. 모르고 밟아서 신발과 바지가 진흙범벅이 된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 길 자체가 잘못 들어선 길이었다. 쭉 내려오다 보니 풀밭에 소 옆에서 앉아있던 현지인 농부가 돌아가라는 손짓을 하며 무엇인가 얘기해서 스페인어를 하는 멕시코 친구가 한참을 이야기하고 온다. 알고 보니 원래는 내리막 전에서 다른 길로 들어섰어야 하고 이 쪽 길로도 갈 수는 있지만 저 농부의 농장을 가로질러야 한다고 한다. 그런데 등산객들이 하도 펜스도 닫지 않고 다니기에 돌아가면 좋겠다고 얘기하는 것이었다. 다행히 멕시코 친구가 펜스 얌전히 잘 닫고 가겠다고 지나가게 해달라고 부탁을 해서 지나갈 수 있었다. 트래킹 코스가 현지인들의 농장과 사유지를 지나가는 것 같은데 그들에게 어떤 보상이 돌아가는지 궁금증이 드는 부분이었다. 사실 등산객들이 오지만 직접적으로 돈을 버는 사람들은 마을의 호스텔 주인들 뿐이고, 아무리 호스텔들이 버는 돈으로 마을의 기본적인 시설을 마련하는데 지원을 한다지만 위의 농부처럼 오히려 관광객들로부터 피해만 입는 것은 아닌지 싶어 마음이 불편했다.


평소에 운동을 많이 하는 동행들 페이스에 맞춰 걷다 보니 완만한 오르막 내리막 구간이었는데도 슬슬 힘에 부쳤다. 협곡을 다시 올라가야 하는 지점에 다다랐을 때는 동행들을 먼저 보내고 천천히 올라갔다. 여기가 첫 번째 고비였다. 올라가는 길에 먹을 것을 달라는 아이들 두 명을 만나서 비행기에서 받아놓고 안 먹은 과자를 주었다. 이 행동은 다음날 뼈저리게 후회하게 된다. 오르막을 정말 천천히 올라 1시간여를 더 걸었고 중간에 작은 개 한 마리가 공격하려 하기도 했다. 총 4시간여 만에 2일 차 숙소에 도착했다. 땀범벅이 되어 빠른 샤워를 하고 점심을 먹었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비가 엄청나게 쏟아지기 시작했고 오후 늦게 숙소에 전기가 나갔다. 처음에는 방 불을 끄고 유튜브로 오프라인 저장 동영상을 보고 있던 터라 정전된 것도 몰랐는데 나중에 식당으로 내려가 보니 천장에서 물이 줄줄 새고 여행객들은 어두운 식탁에 둘러앉아 얘기를 하고 있었다. 저녁식사도 급조된 다른 공간에서 촛불을 켜놓고 했고 결국 다음날 아침에 떠날 때까지 전기, 인터넷, 온수는 복구되지 않았다.



3일 차는 대망의 킬로토아 호수로 걸어 올라가는 날이다. 1일 차, 2일 차에 힘든 포인트들이 있었지만 포기할 정도는 아니었고 늘 권장 최소시간에 맞춰서 코스들을 주파했기에 별생각 없이 길을 나섰다. 숙소에 비용을 내면 점심 도시락도 준비해 주지만 동행 한 명이 '그냥 빨리 올라가면 되지'라는 마인드로 안 산다길래 나도 그냥 올라갔다. 정신 나간 생각이다. 사진에 보이는 저 봉우리 정상으로 올라가면 백두산 천지처럼 칼데라호가 펼쳐지게 된다. 사진으로도 그렇고 육안으로도 그리 멀어 보이지 않아서 금방 하겠는데 싶었지만 실제로는 해발 3100m에서 4000m 정도까지 올라가는 코스고 그 사이에 협곡 2개를 오르락내리락해야 하기에 상당히 힘든 코스였다. 



오늘도 여전히 달력경치를 지나 작은 마을들도 여럿 지나며 길을 이어갔다. 중간중간 옆이 절벽이라 걷기 무서운 좁을 길들도 지나야 했다. 에콰도르 산간 지역은 아침 날씨는 좋지만 정오가 넘어가면 구름이 산을 뒤덮기에 빨리 올라가서 호수를 봐야 한다는 생각도 있었다. 동행들은 이미 앞에 멀어진 터라 혼자 천천히 마지막 봉우리로 올라가는 급경사 코스를 올라갔다. 트래킹 3시간이 지나니 땀도 너무 많이 나고 배고 고파 탈진 상태에 들어섰다. 군대에서도 행정병으로 나름 큰 육체적 고통을 느껴본 적이 없었는데 여기서 인생 최대의 힘듦을 경험했다. 마침 중간에 동행도 너 군 전역하고 바로 와서 별로 안 힘든 것 아니냐고 얘기해서 난 실내에서 타자나 치는 행정병이라 그딴 거 모른다고 했다. 



마지막 1시간은 거의 기어 올라오다시피 하며 정상을 마주했다. 호수가 작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봉우리에서 200m 정도 아래에 있고 지름도 2km가 넘는 거대한 크기를 자랑한다. 여기서 끝났으면 좋았으련만 버스정류장이 있는 마을까지는 호수 둘레로 더 걸어가야 했다. 동행들은 아직 힘이 남았는지 둘레의 3분의 2를 도는 긴 길을 간다고 했고 나도 따라나섰다 5분 만에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혼자 짧은 길로 빠졌다. 이 코스가 그냥 석촌호수 주위 돌듯이 평지를 도는 것이 아니라 봉우리들을 오르락내리락하며 가야 하기에 이미 에너지가 다 떨어진 나는 정말 100걸음 걷고 5분 쉬는 것을 반복하며 어찌어찌 2시간 만에 마을에 도착했다. 정상에 도착하고도 한참을 더 걸어가야 하는 이 상황은 마치 신교대 때 3바퀴만 한다고 해놓고 마지막에 반바퀴 더 시킨 완전군장 행군 때 느꼈던 기분을 다시 불러일으켰다. 솔직히 그때 중대장 죽이고 싶었다. 처음 도착한 정상에 작은 매점이 있었는데 거기서라도 에너지 보충을 했어야 한다. 봉우리를 돌며 현지인 아이들이 먹을 것 없냐고 요구하는데 내가 먹을 것도 없었을뿐더러 어제 내어준 과자가 계속 생각났다. 그거라도 있었으면 이 정도로 힘들지는 않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어찌어찌 마을에 도착해 밑에서는 80 센트면 사 먹을 감자칩이랑 음료수를 2달러 주고 사 먹고 1시간가량 일행들을 기다렸다. 일행들도 모두 거의 탈진 상태였기에 식당에서 점심을 같이 먹었다. 이 때는 위 사진보다도 훨씬 시간이 지나 이미 구름과 안개가 호수 전체를 뒤덮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일찍 출발하고 일찍 도착해서 호수의 경치를 관람한 것은 잘한 일이었지만, 이 정도로 힘들지 않았다면 절경을 더 즐길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내려오는 길에는 2시간 정도 걸리는 라타쿵가행 버스를 탈 수 있었지만 가는 길에 택시기사에게 영업을 당해서 인당 5달러에 더 빠른 밴을 탔다. 그런데 이게 불법택시였는지 검문에서 걸렸는데 운전기사가 걱정하지 말고 안에 있으라고 했다. 후에 들어보니 우리가 차를 타고 호수 관광을 왔는데 차가 고장 나서 태워주는 것이라 둘러댔다고 한다. 생각보다 아무 문제 없이 금방 검문을 통과해 라타쿵가로 내려왔고, 각자 호스텔에 맡겨두었던 짐을 챙겨 당일 다음 도시인 바뇨스로 이동했다. 그 와중에 택시에 모자를 두고 내렸다. 여행 출발 전 부산에서 산 노스페이스 짝퉁 폴로넥페이스 로고가 그려진 모자였는데 중간에 들고 내려야지 생각까지 했으면서 잊어버렸다. 샌들에 이어 여행 두 번째로 없어진 물건이다. 



마지막 날 17시 이후는 차를 타면서 흔들린 수치도 포함되어 정확하지는 않지만 예상치로 3일 동안 거의 60km를 팔만 걸음으로 걸었던 미친 트래킹은 이렇게 마무리되었다. 그래도 챙겨간 등산화가 모처럼 큰 도움이 되었다. 이 등산화도 인터넷에서 3만 원대의 제품을 동대문에서 5만 5천 원 주고 샀는데, 처음에는 발에 잘 맞지 않아서 적응기간 동안 계속 물집이 생겨 그냥 운동화를 챙겨가야 하나 생각했는데 나름 저가 등산화 치고는 접지력도 나쁘지 않고 방수도 되어서 미끄럽고 질척거리고 험했던 트래킹 코스를 헤쳐 나가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총평을 하자면 경치는 너무 아름다웠지만 마지막 날이 너무 힘들었고 다시 하라고 하면 절대 안 한다. 차라리 첫날만 걸으며 협곡을 감상하고, 다음 날 마을에서 버스를 타고 일찍 호수로 올라가 호수의 경치를 즐기는 것이 나을 것 같다. 

작가의 이전글 [세계여행] D+4 라타쿵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