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도 다치지 않는 방법
대학생이 되고 나서 1년 동안은 학교를 잘 나가지 않았다. 각자의 결을 가진 애들이 왁자지껄 떠들며 자리를 지키고 있는 강의실이 싫었고 정형화되지 않은 강의 내용들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쩌다 지각하지 않은 날에는 강의실을 빠져나올 때 "그래서 알려주고 싶은 게 뭔데?" 구시렁대며 기숙사로 돌아갔다. 기숙사에 살았던 주제에, 걸어서 5분도 걸리지 않는 강의실엔 매번 늦었고 15분을 걸어야 하는 아르바이트 장소에는 정시에 출근해 부지런히 일했다.
1학년이 끝나고 나온 성적표에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 거의 뒤에서 3번째였는데, 내 뒤에 있는 애들은 찐으로 학교를 아예 안 나오거나 편입을 준비하고 있는 애들이었다. 그러니까 이렇다 할 계획도 없으면서 공부를 안 하는 애는 나뿐인 거였다. 성적에 충격받지 않을 수 있었던 건 그 당시 내가 골몰하던 생각에 완전히 꽂혀있었기 때문이다.
이상해.
내일이 기대가 되지 않아
그건 어느 밤 잠에 들기 전 기습적으로 찾아온 폭우 같은 생각이었다. 나는 내 속에 있을 누군가와 상의하고 싶었다. 왜 이런 거야? 도대체 갑자기 왜? 내 속의 또다른 나는 그냥... 자고 싶은 것 같았다. 대답은 하늘이 대신해줬다. 그해는 눈치 없게 비가 자주 왔다.
1년이 지나고 자퇴의사를 밝혔을 때 교수님은 내가 엉망으로 냈던 글에서 가능성(?)을 보았다며, 휴학을 했다가 추스르고 돌아오는 게 어떻냐고 했다. 무엇을 추슬러야 하는지, 어떻게 추슬러야 하는지도 몰랐지만 그 속에 담긴 나에 대한 작은 인정에 마음이 흔들렸다. 그리고 나는 정말 일 년 후에 다시 학교에 복학을 했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거기까지였다. 다니기로 한 이상, 나는 내가 저지른 성적을 만회해야 했다. 그래야 국가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고, 그래야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꿀 교양이고 나발이고를 따지지 않았다. 일단 한국어로 된 수업이면 오케이. 다행히 2학년 때부턴 전공수업을 들을 수 있어서 소설 수업을 들었다. (힘든 생활 속 숨통 트이는 시간이었다.) 무조건 열심히 해본다 각오하고 매일을 공부했다. 맨 앞자리에 앉아서 교수님을 쳐다봤고 조금이라도 납득이 안 되는 게 있으면 수업이 끝나고 나가려는 교수님을 붙잡아서 물었다. 본의 아니게 아주 모범생다운 태도였다.
그 학기에는 올 A+을 받고 과탑이 되었다. 그다음 학기에도 2등인가 했다. 공부에 재미를 붙였다고 생각했는데, 안타깝게도 내가 취했던 건 누군가의 기대에 부응하는 것, 인정받는 순간이었다. 나는 나야~ 를 외치며 살았지만 누구보다 다른 사람의 기분을 살피고 '흑흑 그 새낀 아까 왜 그런 말을 한 거지'라며 눈물 젖은 베개를 죽부인 삼아 잠에 들던 22살이었다.
물론 누군가의 기대에 부응하려는 마음을 가진 게 그때가 최초는 아니었을 거다. 하지만 확실히 어떤 기폭제가 되기는 했다. 내가 그리는 모습에 날 맞추는 동안 나는 한편으로 정말 그런 사람이 되어갔다. 신기했다. 동시에 나는 언젠가부터 실망에 대해 더 크게 상처 받는 사람이 되어갔다. 나에 대한 판단, 작게는 얼평부터 성격 궁예, 내 취향을 무시하는 발언들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그랬다. 나에게 거는 사람들의 기대가(관심이) 미치도록 좋았고 그걸 충족시키지 못할 때마다 내가 미치도록 싫었다.
27살이 된 지금, 여전히 그런 고질병을 안고 살아간다. 언제쯤 스스로에게 해가 되는 이 버릇을 고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못해요, 나 그거 안 되는 사람이에요. 말하는 것보다는 억지로라도 꾸역꾸역 하는 걸 택했던 젊은 날의 나에게, 조금 덜 젊어진 내가 보답을 하고 싶다. 그러니까 오늘부터는 내 알바가 아닌 거다. 기대를 한 건 너니까 실망도 네가. 내 몫의 기대와 실망은 내가.
누구도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왕이면 내가 그랬으면 좋겠다. 이건 결코 이기적인 생각이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