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코로나로 아빠를 잃었다.

by 정연하게

코로나 창궐 이후 2년여의 시간이 흐른 현재. 모든 것이 일상을 조금씩, 하지만 빠르게 되찾아 가고 있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모든 것이 딴세상의 이야기 처럼 낯설게 느껴진다.


나는 코로나로 아빠를 잃었다.



22년 8월 초. 엄마의 전화를 받았다. 아빠, 엄마 두 분 모두 코로나에 걸렸다는 거였다. 집 근처 병원에서 입원치료 중인데, 아빠는 열이 떨어지지 않아 조금 힘들어 한다고 했다. 엄마에게 아빠를 바꿔달라고 했다.


“아빠, 괜찮아? 열이 계속 난다고?”


“아빠 괜찮다. 오지마라. 오면 안돼.”


다행히 엄마는 증상이 심하지 않아 아빠를 간호 할 수 있는 컨디션은 된다고 하셨고, 내가 문병을 왔다가 행여 아이들에게 옮길수 있으니 절대 병문안은 오지 말라고, 다 낫고 격리해제 되면 그때 보면 된다고 말씀하셨다.


알겠다, 문병은 가지 않겠다라고 부모님을 안심시키고 전화를 끊었다. 부모님 보다 먼저 코로나에 한번 걸렸던 나는 이 상황을 (그때까지는)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나도 열이 났었고, 내 아이들도 며칠 열이 났다가 약을 먹고 나아졌고, 지금은 다행히 휴우증 없이 잘 지내고 있으니, 경험으로 미루어 넘겨짚은 대수롭잖음 이었다.


이삼일 후에도 아빠의 열은 떨어지지 않았다. 열이 계속 오르락 내리락을 반복했고, 숨을 쉬기가 조금씩 어려워지고 있다고 했다. 엄마는 아빠가 숨이 많이 가빠보이기도 하고, 어떨 때는 괜찮기도 하다고 했다. 평소 당뇨와 혈압, 신장이 안좋았던 아빠. 나는 ‘기저질환자는 코로나를 심하게 겪는구나’ 라며 또 어김없이 이 상황을 가볍게 여겼다. 나는 심각하지 않았다.

대체 무슨 자신감이었을까. 당연히 걱정은 됐지만 사실 속으로 나는, 일말의 의심도 없이 아빠의 회복을 믿고 있었다. 다만 이번에는 회복에 시간이 조금 더 걸릴 뿐이라며 나 스스로를 안심시켰다. 강인한 정신력과 지혜로운 판단력, 많은 인생의 굴곡에서도 포기를 모르던 아빠. 나의 아빠는 이런 코로나 따위로는 죽지 않을 거란 믿음에서 우러나온 자신감이었다.


다음 날 아빠는 대학병원 집중치료실로 이송되었다. 코로나로 인해 폐의 상당부분이 손실되어 호흡이 가빠왔고, 일반적인 산소 공급으로는 산소포화도가 잘 오르지 않는 상태라고 했다. 또한 기저질환으로 인한 합병증들이 우려되어 코로나 치료제를 쓰기도 위험하고, 만약 약을 쓴다면 합병증으로 인해 평생 신장투석을 해야할지도 모르는 상황이라고 했다. 집중 치료를 하겠지만 호전 여부는 아직 알수 없다고 했다.


면회는 철저히 차단 되었고, 간병인 교체도 불가했다. 나는 그렇게 아빠의 얼굴 한번 보지 못한 채, 전화로만 아빠의 안부를 확인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불안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호들갑을 떨면 상상하기 싫은 일들이 현실이 되어 돌아올 것 같아서 불안을 꾹 눌러 삼켰다.


집중치료실에서 영상통화로 볼때 아빠는 숨도 편하게 쉬는 것 같았고, 웃기도 하며 먹고싶은 음식도 말했다. 치료에 호전이 있나보다라며 가족들은 희망을 품었고, 나는 아빠가 먹고싶다던 음식을 정성껏 챙겨 다음날 병원으로 갔다. 어쩌면 먼 발치에서라도 아빠를 볼 수 있기를 내심 바라면서.


간호사실 호출 버튼을 누른 후 문이 열리는 그 찰나의 순간, 목을 쭉 빼고 빠르게 문 안 여기저기를 살폈다. 내가 아빠를 빨리 발견하면 잠깐이라도 아빠얼굴을 볼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마스크를 두 겹 쓰고, 손에 장갑을 낀 간호사는 재빨리 전달받은 물건을 들고 뒤돌아서 문을 닫았고, 나는 아빠를 찾지 못했다. 대신 내 손에는 아빠의 옷과 병실에서 쓰던 물건이 든 종이가방이 들려 있었다.


뒤돌아 가려다 우뚝 멈춰섰다. 이대로 그냥 갈수는 없었다. 뭐라도 해야 했다. 나는 텅 빈 복도에 서서 ‘아빠 나 왔어. 나 여기있어.’ 마음속으로 간절히 외쳤다. 내가 가져간 물건을 간호사가 전달해주면 아빠는 내가 왔다는 걸 알지도 모른다. 내가 지금 문밖에 있다는 걸 아빠가 알 수있을 때까지 복도에 서있고 싶었다. 그렇게라도 아빠와 함께하고 싶었다. 차가운 벽에 손을 얹은채 마음속으로 있는 힘껏 아빠를 부르고 또 불렀다. 이후 한참을 멍하니 다시 문이 열리지는 않을까 기다렸지만, 내가 바라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차에 돌아와 종이가방을 조수석에 털석 내려놓았다. 절로 한숨이 나왔다. 대체 이게 뭐지. 이 상황이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 아빠는 어쩌다 대학병원까지 오게 됐고, 나는 아빠를 언제 만날 수 있는 건지 막막하기만 했다. 안간힘을 써도 모든 상황이 이해되지도, 받아들여지지도 않았다. 눈 앞의 지금 이 현실은 나에겐 비현실이었다. 가슴이 답답하고 목구멍이 울컥거렸다.


그때 종이가방에 붙어 있는 스티커가 눈에 들어왔다. ‘ 만73세/ 남 / 000 / A+ / 바코드‘


환자 식별을 위한 바코드 스티커였다. 쓰여진 글자를 다시 천천히 읽었다. ‘만 73세, 남자, 000, A형…’

몇 번을 뚫어져라 다시 읽었다. 아빠다. 아빠를 말하는 거였다. 순간 온 몸에 소름이 돋으며 현실이 와 닿기 시작했다. 위독한 아빠의 상태와 어쩌면 일어날지도 모를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아닐거야. 그럴리 없어.’라며 애써 외면하며 쌓아온 내면의 방어벽이 와장창 깨져버렸다. 나의 아빠는 지금 많이 아프고, 위독하며, 어쩌면 돌아가실 수도 있다는 사실이 칼로 새기듯 날카롭게 머리와 가슴에 들이쳤다. 핸들에 올린 두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무서웠다. 겁이나 덜컥 눈물이 쏟아졌다. ‘어떻하지… 나는 뭘 어떻해야하지…’ 나의 세상이 멈춘것 같았다.



어떻게 운전해서 집에 돌아왔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날 오후, 아빠는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의식과 인지가 완벽히 깨어있는 상태지만, 인공호흡기치료를 하기 위해선 약으로 수면상태를 만들어 중환자실에 가야한다고 했다. 아빠는 하루하루 아니 오전, 오후가 다르게 폐의 상태가 나빠지고 있었다.


여전히 내가 할 수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내 인생의 중심에서 튕겨져 나가 소외된 느낌이 들었다. 넌 빠져있어. 세상이 나에게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가슴은 텅 비었고, 이성적인 생각은 멈췄으며 무력했다. 하루에 두세번 담당 간호사의 전화를 통해 아빠의 상태를 듣는 것 말고는 정말이지 할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었다. 전화를 기다리는 내내 입이 바싹 타들어갔다. 상태가 좋다가도 다음 전화엔 위독하다, 조금 나아졌다, 아니다 다시 위독하다를 수도없이 반복했다. 오늘 밤을 넘기기 힘들거라는 말도 여러 번 오갔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문득 나는 아빠의 마지막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그 순간 아빠곁에 아무도 없어선 안된다는 생각이 머리속을 치고 들어왔다. 너무나 절실했다. 그 날 나는 면회도 안되는 중환자실 밖에서 이틀 밤을 지새었다. 계속 복도를 서성였다. 밤의 병원은 무서우리만치 고요했지만, 분주했다. 나의 시간은 더디게 흘렀다. 가족들이 강제로 끌고 나와 집에 오기 전까지 나는 복도 대기실 모니터 화면에 적힌 아빠의 이름을 보며 ‘제발’ 이라는 말만 되뇌었다.


가족들의 간곡한 부탁으로 잠깐의 면회가 이루어졌다. ( 지금 돌이켜 보건데, 의사는 아빠의 죽음을 받아들일 준비라는 의미로 면회를 허락했던 것 같다. ) 면회는 허락받았지만 나는 아빠에게 힘내라는 말을 전하지도, 곁에 다가가 손을 잡아줄 수도 없었다. 온갖 기계가 매달린채 전선에 휘감겨져 누워있는, 강제로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아빠를, 유리로 된 벽 두개를 사이에 두고 멀리서 바라보는게 고작이었다. 혹시나 면회시 접촉으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재감염 예방을 위해 어쩔수 없는 조치라고 했다. 참담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손주들에게 말장난치며 웃고 용돈을 턱 하니 쥐어주던 덩치 큰 할아버지는 지금 볼 수가 없다. 몸은 반쪽이다시피 말라있었고, 얼굴은 창백했으며, 눈에도, 입에도, 온 몸에 수많은 테이프가 덕지덕지 붙어 있다. 손등, 팔, 다리, 발등에 수많은 주사들이 달려있었다. 저러고도 사람이 살수 있는 건가 라는 의문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뒤로 하더라도 나를 가장 마음 아프게 만든 건, 아빠가 거기 혼자 있다는 사실이었다. 혼자서 소리없이 힘든 싸움을 감당하고 있을 아빠가 너무 안스러웠다. 너무 오랫동안 면회가 안됐었기에 행여 우리가 아빠를 포기했다고 생각할까봐 두려웠다.


‘절대 아니야 아빠. 나는, 우리는 아빠를 포기 못해. 그러니 제발, 조금만 더 힘내서 중환자실에서 나올 정도로만 회복해줘. ‘

두 개의 벽 뒤에 있는 아빠에게 나의 지독한 바램과 눈물이 전해졌기를 빌었다.


마지막 날까지 아빠가 나을 거라는 희망은 버리지 않았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아빠를 살리고 싶었다. 간절함이 도를 넘어 이대로 계속 버티다가는 내가 미쳐버리는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정신이 혼미해지기도 했다.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견딜수 없는 날들이었다. 이제 아빠의 폐는 모두 굳어서 5%정도만 남았다고 했다. 기계가 억지로 폐를 부풀렸다 수축했다를 반복해서 지금 숨을 쉬고는 있지만, 더이상 치료라는 명목으로 할수 있는 방법이 아무것도 없으니, 의사는 가족들과 상의해서 기계를 제거하자고 했다.


중환자실에 들어가 의사의 설명을 듣고 동의서에 싸인을 했다. 의사 뒤로 멀찌감치 보이는 아빠는 이전보다 더 야위어 있었고, 손발끝은 검게 변하고 얼굴엔 핏기가 없었다. 마치 미라를 보는 것 같았다. 얼마나 아팠을까. 아빠가 그만 고통스러웠으면 좋겠다. 조금이라도 편하게 해주고 싶었다.


드디어 아빠를 가까이서 볼수 있었다. 아빠 얼굴에 손을 얹고 아빠의 체온을 느꼈다. 아빠 나왔어. 힘겹게 움직이는 가슴에 손을 얹고 힘들게 해서 미안해라고 말했다. 아빠를 단 한순간도 포기한적이 없지만 이제는 아빠가 고통받지 않는게 더 중요한 거 같다고, 그동안 내가 고집부려서 미안해, 사랑해 라고 했다. 그 날 아빠는 숨을 거뒀다.


코로나에 걸렸다고 죽다니. 한치 앞을 모르는게 사람일이던가.

코로나에 확진되고 43일 후. 나는 아빠를 잃었다.

나의 세상을 떠받쳐주고 이끌어주던 아빠는 이제 없다.


그 후에도 많은 일이 있었다. 떠올리고 싶지 않다며 외면한 일들이다. 외면하고 모른척 해서인지 마음의 병이 생겼다. 내 마음의 회복을 바라며, 아빠의 이야기를 써보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나의 그리움을 털어내 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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