걱정이 많은 완벽주의자
하필이면 나는 1남 1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장녀로 살아가며 매 순간 들었던 생각은 외동이나 막내라면 더 좋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 태어나버린 걸 어째. 태어나보니 장녀인걸. 사실 일말의 사건이 있기 전까지 나는 K장녀의 무게를 모른 척하며 살기도 하고, 슬쩍 외면하며 살기도 했다. 낙천적이고 밝으며 쿨하다는 사회적 성격이라는 가면 뒤에 숨어서 말이다.
내가 K장녀의 무게를 느끼게 된 것은 서른이 좀 넘은 나이에 인생에서 아주 큰 태풍을 만났을 때이다. 아무것도 하기 싫고, 집 밖에도 나가기 싫고, 밥 한 수저도 제대로 못 넘기던 그 시기. 눈 뜨는 게 죽는 것보다 더 힘든 것 같다고 생각했던 날들. 사회생활을 하며 어떤 인간관계 때문에 삶에 대해 허무함을 느끼고, 모든 것을 포기하려 했었던 그때... 나는 극심한 우울증과 불안장애로 아주 어두운 터널을 지나게 되었다.
주변의 권유로 정신건강의학과를 다니며 상담을 시작했다. 여러 가지 성격검사와 기질검사, 그리고 상담을 통해 나는 진짜 내 모습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작가로 살기 위해 사회에서 만들어진 나, 첫째 딸로 집에서 만들어진 나, 친구들 사이에서 만들어진 나를 보며 진짜 나는 어디 있는지 그제야 나에 대한 메타인지를 제대로 시작하게 된 것이다.
작가로 살면서 본래 내 모습대로 살겠다고, 자유로운 영혼으로 나만의 것을 찾겠다고 매번 외치던 나는, 사실은 누구보다 잘 감추어지고, 잘 만들어진 나로 살고 있었다.
나는 유난히 책임감이 강하고, 성실함에 대한 강박이 많았다. 태어난 기질이 그런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어릴 때 부모님으로부터 부여받은 미션에 대한 부담이 있었던 것 같다. 3살 터울의 남동생이 있으니 그 동생을 지켜줘야 하고, 그 동생이 울지 않게 봐줘야 하고, 그 동생과 잘 놀아줘야 했던 누나. 동생이 따라 하니까 누나가 잘해야 한다는 말 때문에 바르게 행동해야 했던 누나.(물론 가진 기질이 엉뚱해서 매번 잘할 순 없었지만) 그렇게 자연스러운 책임감이 생기고, 성실함에 대한 강박을 부여받았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작은 일에도 긴장을 많이 하고, 걱정이 많았다. 첫째는 의젓해야 한다는 말을 들어서인지 속마음을 잘 이야기하지 않게 되었고, 외로움도 많이 느끼게 되었다. 어린 나이에서 청소년기로 성장하면서도 그 이후에도 첫째인 나는 내 안의 불안함과 끊임없이 싸워야만 했다. 하지만 가족 중 누구에게도 이런 마음을 표현할 수는 없었다.
작가로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나는 걱정이 많은 완벽주의가 되었다. 엄마는 친구 같은 자식이라는 말로 사람들에게 딸과 사이가 좋다는 것을 자랑했지만 나는 가끔 그게 부담이 될 때도 많았다. 친구 같은 자식이지만 엄마의 대리 남편 같은 느낌이 없지 않았기 때문이다. 엄마는 점점 더 나에게 기대는 것, 기대하는 것이 많아졌고, 나는 그런 엄마의 걱정을 모두 내 걱정으로 끌어 안아 함께 불행한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엄마와 친구 같은 관계니까, 그리고 엄마의 힘듦을 내가 덜어줘야 한다는 부담감과 함께 말이다. 또 나 하나 희생해서 열심히 하면 언젠가는 이 상황들도 컨트롤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인생이 그렇게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 알게 되었다. 상담을 받으며 이 모든 사실들을 알게 된 후, 나는 현타타임에 아주 오래 머무르게 되었다.
이렇게 나를 들여다보고 내가 K장녀의 무게 때문에 힘들어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부터 나는 엄마와 나의 관계를 개선하고 바꾸기 위해 무던히 노력하기 시작했다. 물론 정신과선생님의 상담과 조언을 토대로 말이다. K장녀의 무게 때문에 때론 도망가고 싶을 만큼 힘들 때도, 외국으로 이민을 가고 싶을 때도 많았다. 하지만 평생 걱정이 많은 완벽주의자로 사느니 지금부터 하나씩 바꿀 수 있는 것들을 바꾸어 보기로 했다.
그렇게 나와 엄마의 관계 재적립을 위한 긴 여정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