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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마음 Jan 02. 2024

K장녀는 꼭 이래야 하나요?

K장녀의 불편함

나는 여러 번의 상담을 거치며 엄마와 나의 관계 속에서 불편함을 느끼고 있음을 깨달았다. 물론 이것을 불효라 지칭하는 대한민국의 기조와 어릴 적부터 부모님께 잘해야 한다는 유교사상을 지닌 나라에 세 세뇌를 받으며 살아온 나로서는 이것 조자 인지하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지금 엄마와 나 사이가 불편하다는 것을 인지하면 내가 나쁜 딸이 되는 것 같고, 효도하지 않는 자식이 되는 것 같은 느낌에서였다. (상담하며 들어보니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첫째들이 첫 자신의 상태를 인지할 때 이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해 불효라고 생각하다 보니 인지하고 이야기를 꺼내기 쉽지 않아 한다고 했다.) 세뇌가 이렇게 무섭습니다... 




어쨌거나 내가 엄마에게 느꼈던 불편함을 이야기해보려 한다. 첫 번째는 나에게는 남동생이 있는데 남동생과 나에 대한 차별이었다. 우리는 3살 터울 밖에 나지 않아 비슷한 시기게 입학과 졸업을 동시에 하고, 비교적 사회생활도 비슷한 시기에 시작했다. (물론 누나인 내가 더 빠르긴 했지만 체감상 작가의 막내시절은 월급이 얼마 안 되기 때문에 비슷하다고 느껴짐) 그러나 엄마는 내가 전화를 하루라도 안 하면 걱정이 된다, 왜 전화를 안 하냐, 그렇게 바쁘냐 등등 서운함을 내비치었지만 동생에게는 전화가 일주일씩 오지 않아도 남자애들은 그럴 수 있다는 말로 은근슬쩍 넘어가곤 했다. 도대체 같이 일하는데 뭐가 다른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또 엄마는 동생이 돈을 벌면 잘 모아서 결혼준비도 하고, 차도 사고 이것저것 필요할 데가 많을 것이라며 용돈을 한사코 거부하셨다. 그러나 나에게는 전화를 하고 심지어 스마트폰이 발전한 뒤로는 링크를 보내서 이걸 사서 보내달라, 저걸 사서 보내달라, 무엇을 하고 싶다, 용돈을 달라 등등의 부탁은 당연한 것이 되어버렸다. 가끔 나도 화가 나서 동생한테 시켜달라고 이야기하라고 하면, 걔는 쓸데도 많고 할 게 많다는 이상한 근거 없는 대답을 하기 까기 해 더 화가 나게 만든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심지어 작가는 가끔 계약금 명목의 돈이 월급보다 크게 들어올 때도 있는데 그럴 때면 더 많이 벌서 이런저런 걸 해달라고 할 때... 물론 그것이 효도라면 당연하고 나도 엄마가 나를 키우며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기에 형편이 되면 무조건 해드리고 싶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형편도 아닌데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왜 동생한테는 저런 말을 하지 않는 것인지 알다가도 모를 아이러니가 생기며 쌓여가고 있었다. 


엄마가 아파서 큰 대학병원에 가야 할 때도 엄마는 언제나 나를 호출했다. 작가의 직업 특성상 내가 아침과 오전에는 수면상태인 것을 뻔히 아는 엄마는 내가 동생에게 이 일을 토스해도 그래도 내가 가야 한다며 결국 다시 나에게 부탁을 했다. 명절에도 동생은 바빠서 가지 못할 때도, 친구들과 해외여행을 떠날 때도 허허 웃으며 알겠다고 했지만... 일주일 동안 10시간을 채 잠들지 못한 채 마감을 끝낸 내가 가지 못하면 서운하다느니, 딸자식 키워봤자 소용없다느니 서운한 말들이 전화기 사이로 날아와 가슴이 콕콕 박히고 말았다. 



하지만 내가 처음부터 엄마의 부탁이나 말이 싫었던 것은 아니다. 딸이라면 엄마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은 당연히 해주고 싶고, 당연히 금융치료도 해드리고 싶고, 여건이 된다면 더 잘해주고 싶은 것이 모든 딸의 마음일 것이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내 마음에 여유가 사라지고, 관계들이 힘에 부치기 시작하자 엄마의 말을 더 나를 힘들게 괴롭혔다. 세상에 든든한 나무였던 존재가 와르르 무너져버리는 느낌이랄까. 지금 내 나이가 30대 중반을 넘어섰으니 엄마는 자연스럽게 나무의 힘이 빠지는 중이라는 것을 인지하기까지도 시간이 걸렸던 것 같다. 나에게도 엄마는 언제나 엄마이길 바라는 마음이 컸으니까. 


어쨌거나 이런 불편한 상황들이 상담을 받으며 빵! 하고 터져버렸고 나는 엄마와의 관계를 개선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선생님께 엄청 힘들 거라는 이야기도 들었고, 대화하는 과정에서 서로에게 상처를 더 깊게 줄 수 있다는 말도 들어 무서웠지만...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사람과 불편함으로 지내기보다는 사랑으로 지내고 싶은 마음이 컸기에 나는 용기 내어 엄마와의 길고 긴 대화를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무엇보다 나는 엄마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내가 어떤 일을 해도, 어떤 것을 선택해도, 어딜 가도 엄마는 나를 믿어주고 지지해 주었기 때문에 (주변에서 나를 보며 우리 엄마에게 보살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꽤 된다...) 엄마는 이번에도 내 말에 귀 기울여 줄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엄마와 딸 관계 개선하기 프로젝트는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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