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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마음 Jan 09. 2024

엄마의 충격

멘붕과 현타 사이 그 어딘가


엄마와 떨어져 사는 나는, 엄마를 만나 데이트를 하기로 약속했다. 엄마와의 데이트가 뭐 그렇게 특별하냐고 물을지도 모르지만 딸은 신경 쓰이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특히나 오늘은 엄마에게 지금의 내 상태를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엄마의 의견도 듣고 싶은 마음이 컸다. 물론 한 번도 엄마와의 관계 때문에 내가 힘들다는 이야기를 해본 적이 없어서 편하게 밥만 먹고 헤어질까 하는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평소에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 터라 설렘보다는 '그냥 말하지 말고 지금처럼 참고 살까?'라는 회유감이 훨씬 컸지만 그래도 나는 마음을 다시 한번 다 잡았다. 




엄마와 만나 가볍게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러 갔다. 우리 엄마는 아직도 소녀감성을 간직하고 있는 터라 카페에서 예쁜 디저트와 커피를 마시는 걸 좋아한다. 엄마가 한참 커피를 마시고 내 근황을 물어보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내내 나는 언제 이야기를 시작해야 하나 안절부절못한 채로 연신 커피를 들이켜고 있었다. 너무 긴장되는 나머지 급기야 아이스커피의 얼음을 와그작와그작 씹어먹기도 했다. 


엄마의 말이 잠시 멈춘 시점, 나는 지금이 타이밍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간 있었던 일과 나의 생각을 차근차근 이야기했다. 대충 이야기의 요지는 이러했다. 여러 가지 일로 우울증이 찾아왔는데 내면을 들여다보니 여러 가지 해결되지 못한 마음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엄마와의 관계도 나에게는 스트레스 일 때도, 힘에 부칠 때도 있다. 그런데 그게 꼭 엄마만의 잘못은 아니다. 그러니 지금부터 하나씩 다시 서로가 편해지도록 고쳐가 봤으면 좋겠다. 나도 엄마와 관계가 힘들 때마다 엄마에게 이야기할 테니 엄마도 엄마의 생각을 이야기해 주면 좋겠다. 


내 이야기를 듣던 엄마는 처음에는 믿지 못하는 표정을 짓더니, 급기야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아뿔싸. 엄마는 내가 엄마와의 관계 때문에 힘들어한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던 것이다. 그리고 어떤 점이 그렇게 힘들었냐고 되려 나에게 따져 묻기도 했다. 엄마는 이야기하는 내내 나에게 미안해했다가, 화를 냈다가, 곰곰이 생각을 했다가, 또다시 질문세례를 퍼붓기도 했다. 멘붕과 현타를 동시에 마주한 울고 있는 엄마 앞에서 나도 멘붕이 왔고, 어서 엄마와 헤어지고 집으로 가고만 싶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엄마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기 전에 약간의 언질이라도 주고, 생각할 시간을 충분히 준 뒤에, 마음의 준비도 한 뒤에 이야기를 나눴더라면 참 좋았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나도 그땐 몰랐지. 엄마의 반응이 이렇게 스펙터클 할 줄이야. 어쨌거나 다시 마주하고 싶지 않은 그날의 이야기는 한참이나 같은 질문을 반복하고, 오랫동안 제자리를 맴돈 뒤에야 끝이 났다. 우여곡절 끝에 우리는 앞으로 서로에게 조금 더 신경 쓰고 조심하며 지내보기로 했다. 물론 힘든 부분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고, 서로의 감정도 피드백하는 것에 동의했고. 


그날 엄마는 멘붕과 현타를 세게 마주한 얼이 나간 얼굴을 하고 나와 헤어졌다. 평생을 아무 말 없던 딸의 폭탄선언에 할 말을 잃었던 것이다. 그리고 한 동안 엄마도 우울증이 온 것 같았다고 했다. 물론 나중에 알게 된 이야기지만. 아무런 준비 없이 폭탄을 맞고 난 뒤 엄마의 삶도 송두리째 흔들리는 것 같았다고 한다. 만약 이때 내가 조금이나마 엄마의 마음을 헤아리고 배려한 뒤에 이야기했다면 어땠을까, 우리의 대화는 또 많이 달라졌을까 싶지만... 이미 벌어진 일을 어떡한담. ㅎㅎㅎ


이렇게 끝을 알 수 없는 우리의 대화는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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