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 아버지가 혼자 계신 집에서 갑작스레 쓰러지셨다. 불행 중 다행인지 그 정신에도 남동생에게 전화를 걸었고, 휴대폰 너머 희미한 신음 소리에 좋지 않은 느낌을 직감한 동생은 즉시 달려갔다. 대화는 물론이고 고개조차 못 가누고 눈도 못 마주치는 아빠를 119구급차에 태우고 부리나케 달려간 병원에선뇌출혈 판정을 받았다. 아주 위험한 부위는 아니라 수술은 안 하고 그대로 말려보자고.
그때 처음 알았다. 뇌에 문제가 생기면 음식을 삼키는 능력조차 발휘가 되지 않아 음식물을 콧줄로 섭취해야 하고 배변 기능도 상실하며, 오십 년을 함께 한 가족도 바로 어제 만난 사람처럼 기억이 조작된다는 사실을. 아버지는 그렇게 콧줄을 꽂고, 기저귀를 차게 되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거의 매일 저녁 술을 드셨고, 그런 날은 어김없이 엄마를 괴롭혔다. 퇴근시간이 넘어 동네 어귀에서부터 술 취한 노랫소리가 들려오면 나는 냉큼 이불 속에 들어가 잠든 척하며 바들바들 떨기 일쑤였다. 엄마를 향한 아버지의 폭력을 말리다 깨진 유리조각에 피를 흘리기도 수차례. 한바탕 기운을 쏟아내다 잠시 한눈 판 사이 엄마와 나, 동생 우리 셋은 몰래 탈출해 계단에서 새벽까지 시간을 보내다 코 고는 소리가 문밖에까지 쩌렁쩌렁 울려 퍼질 때쯤 살금살금 들어가 선잠을 청하곤 했다.
그렇게 살아온 세월 동안 내게 아버지라는 존재는 늘 가해자였다. 사춘기 시절엔 그런 아버지가 미치도록 싫고, 그걸 참고 사는 엄마가 이해가 안 돼 잠시 방황을 하기도 했다. 방황이라고 해봤자 아버지가 가장 싫어하는 교회에 몇 번 나간 게 전부였고, 그마저도 오래가지 못했다. 평생을 고통 속에서 자식만 바라보며 살아오신 엄마의 인생이 어느 순간부터 불쌍하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참 많이도 미워했다. 미워하고 미워해도 또 미웠다. '귀신은 저런 인간 왜 안 잡아가나' 할 때도 많았다. 아버지만 없어지면 살 것 같았다.
그런 아버지가 뇌출혈로 쓰러지신 지 1년 4개월째. 그 사이 참 많은 일들이 있었다. 뇌출혈로 인한 섬망이 너무 심해 간병인을 구해놓으면 이틀이 멀다 하고 관두기 일쑤라 직장에서 눈치 보며 간병인 찾는 전화를 수없이 돌려야 했는데 평생 내게 괴로움만 안겨 준 사람을 위해 내가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화도 났다. 그 와중에 잦은 설사로 인해 검사를 하니 대장암 4기에 간 전이, 신장 전이까지 되었다는 소식까지 듣게 되었다. 한 달에 500만 원이 넘게 들어가는 병원비와 간병비로 인해 슬슬 지쳐가고 있던 나는 수술을 할 수도, 항암을 할 수도 없는 어려운 상태라는 의사 말에 차라리 잘됐다 싶은 고약한 생각이 잠시나마 들기도 했다. 거기에 '죽을 때까지 미운 짓만 골라서 한다'며 눈을 흘기는 엄마의 시선은 피로감을 한층 더했다.
다행히 수개월의 재활치료 끝에 어언 1년 만에 콧줄과 소변줄을 제거했고, 입으로 죽을 드시기 시작했다. 대장암 4기 판정을 받은 후, 오로지 콧줄을 빼고 입으로 음식을 먹는 것, 소변줄을 빼고 편안히 볼 일을 보는 것에 목표를 두었던 나의 바람이 이루어진 순간이었다. 이제 정신도 맑아져 손자 손녀와 영상통화도 가능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코로나19로 인한 면회 제한이 일부 완화되면서 한 달여 만에 아버지를 만났다. 그런데 아버지가 평소와 많이 달랐다. 대화를 하는 내내 눈을 잘 마주치지 못하고, 자꾸 먼 곳을 바라보거나 바닥을 응시했다. 보고 싶은 사람 있냐 물어도 고개만 절레절레 젓고, 그토록 끔찍하던 손자 손녀 이름 한 번을 말씀 안 하시는 게 너무 이상했다. 딸인 나를 코 앞에 두고도 남동생에게 "니 누나는 왜 한 번도 안 오냐"라고 묻는데 순간 가슴 한쪽을 망치로 두드려 맞은 것처럼 아팠다. 마음 저 깊은 곳에서부터 점점 온몸으로 퍼지는 먹먹함이었다.
'마음이 아프다는 게 이런 거구나' 아버지가 병상에 누워계신 후로 가장 많이 느꼈던 감정인데도 적응이 되질 않았다. 사실 그래서 난 면회 가는 게 싫었다. 한 번 다녀오면 후유증이 기본 2~3일은 갔기 때문이다. '내가 왜! 고작 아빠 때문에 마음 아파야 하는데?'라며 스스로에게 따져 묻기도 했고, '아파할 필요 없어. 다 자업자득이야.'라며 스스로를 위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머리와 달리 마음은 따로 놀았다.
아버지를 만나고 한 일주일쯤 지났을까. 이제 막 일상을 되찾아가고 있는데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요 며칠 헛소리도 많이 하고, 동생이 왔다고 침대에서 내려오고, 소리도 지르고... 갑작스레 섬망 증세가 나타났다고. 그 말에 다시 심장이 요동치며 가슴이 아려오기 시작했다. 난 전화를 끊자마자 정신없이 달려갔다. 내 발에 신겨지는 것이 운동화인지, 슬리퍼인지 알아차릴 정신조차 없었다.
그렇게 아버지를 향한 미움은 어느새 연민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내 머리는 허락하지 않았는데, 마음은 나도 모르게 40여 년간 쌓아왔던 먼지를 하나씩 털어내고 있었던 것 같다. 너무 싫어했고, 두려워했고, 죽도록 미워했던 아버지인데 또 그렇게 마음이 아팠던 걸 보면, 그게 부모인가 보다. 또 이게 자식인가 보다. 참 이해가 안 되는 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