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숲에서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수선스럽다.
낮에는 여전히 매미가 울지만, 해가 지면 귓가를 맴도는 소리가 달라진다. 계절의 소리가 다른 소리로 이어지고, 없어진 듯한 자리에 새로운 존재가 들어선다.
노트북 속에는 출산 준비물을 빼곡히 적어둔 엑셀 파일이 있다. 출산 선배가 정리해 둔 것을 공유받아 맛맛으로 수정해놨다.
아기침대, 카시트 같은 기본적인 물품들을 포함하여 이름조차 생소해서 용도는 더욱 알 수 없는 것까지 줄지어 있다. 살 것 공부할 것 투성이다. 이리저리 신경 쓸 게 많다고 여겼던 결혼 준비는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 같다. 그 모든 게 출산 준비를 위해 훈련된 것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 너머에는 더 큰 파도가 기다리고 있겠지.
그래도 셀마다 채워진 글자들을 바라보며 나는 얼마간 마음이 놓였다. 하나의 표 안에 모든 것이 담겨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치 준비가 끝난 듯 안심이 되었다. 지금은 필요한 물품들을 조사하고 정리하는 시기. 실제로 바로 구입하기보다는, 우리의 조건과 환경에 맞게 선별하는 게 핵심이다.
하지만 남편의 눈은 다르다. 내겐 충분히 채워져 있는 그 목록이, 그에게는 빈칸 투성이로 보이는 듯하다. 손에 잡히는 실물로 지금을 대비하고 싶어 한다.
“오늘은 뭐 했어? 육아템 좀 찾아보지 그랬어…”
깜빡 착각할 뻔했다. 나의 하루를 궁금해하는 다감한 언어로.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을 때 부지런히 알아보고 중고거래를 하든 새 제품 구매를 하라는 핀잔이었던 것을. 한국 말은 끝까지 들어야 한다.
우리는 결국 “너는 왜 이렇게 더뎌?”, “너는 왜 이렇게 서둘러?” 하며 서로를 탓한다.
“잠언에도 나와. 조급한 사람은 일찍 멸망한댔어.”
나는 성경까지 거들먹거리며 혀 밑에 두었던 도끼를 휘두른다.
“너는 아기새가 아니야. 언제고 내가 다 챙겨줄 수가 없어”
그도 마찬가지로 걱정을 위장한 공격 전술을 편다.
나는 서러워 돌아누웠다. 때 되면 내가 알아서 할 텐데 왜 저리 지글지글 마음을 졸일까. 무엇보다 지금은 내 몸이 먼저인데. 마음이 물에 젖은 것처럼 무지근했다.
등을 만 채 누워 있는데 발끝에 그의 살가죽이 닿았다. 따뜻했다. 잠이 오지 않았다. 눈을 감자 그의 모습이 보였다.
엑셀 표 안에 글자를 채워 넣는 동안, 그는 실제 물건을 찾아 헤맸다. 나는 늘 채워져 있다고 믿었지만, 사실 그 채움은 그의 ‘빈칸 메우기’ 위에 세워진 것이었다. 내가 양지에서 안심하고 있을 수 있었던 건 그가 한편에서 부지런히 움직이며 반석을 쌓아 올린 덕분이었다.
모래성 같은 자존심은 금세 무너졌고 나는 그에게 사과했다.
새벽 다섯 시, 어둠이 가시지 않은 시간에 그는 집을 나섰다. 주말에는 오전에 이미 다 품절된다는 인기 있는 베이커리의 빵을 사기 위해서였다. 나의 식량을 준비하는 데 이만큼이나 진심이다. 그의 서두른 발기척은 내 일주일치 간식이 되었다.
이 맛집의 빵은 대단히 맛있었다. 단순한 간식 준비를 넘어 ‘있음’으로 바꿔놓는 그의 마음까지 함께 먹었기 때문일까. 전자레인지에 돌려 따끈해진 에브리띵 베이글을 우적우적 씹으며 꼭두새벽부터 나가던 그의 뒷모습을 떠올린다. 웃음이 나면서 동시에 미안함이 스몄다.
삶이란 언제나 채워지지 않은 상태로 흐른다. 빼꼭히 준비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빈틈을 두고 우리는 불안해한다. 하지만 그 빈틈이야말로 서로의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결핍이 우리를 서로에게 이끌어 주었던 것을 우리는 자주 잊는다. 그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나의 신중하고 차분한 성격이 그의 없음에 있음이 되어주기를 바라본다. 나도 그에게 따뜻한 양지가 되고 싶다.
매미가 사라진 밤, 귀뚤귀뚤거리는 소리 사이로 그의 성실한 발자국이 찍힌다. 그 자국 위에서 나는 오늘도 안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