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가 거의 나오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영등포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퇴근 시간의 여의도는 늘 그렇듯 사람들이 들끓었다. 붐비는 버스 안을 비집고 뒷문 근처에 서 있었는데, 누군가 오른쪽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젊은 여자가 내 백팩에 달린 임산부 배지를 보고는 자신의 자리를 양보해주었다. 생각지 못한 친절이었다. 나는 그 호의를 곱씹느라 정작 내려야 할 정거장을 지나쳐버렸다. 잘못 내린 곳에서 한참을 걸어야 했지만 이상하게도 힘들지 않았다.
버스에서 자리를 양보받고, 그 여운에 잠겨 정거장을 놓쳐버린 이 행동은 조금 해석해볼 만했다. 나는 임산부 배려석과도 떨어져 있었고, 일반석에서 양보를 받을 거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예상 밖의 친절은 순간적으로 큰 자극이 되었고, 머릿속 인지 부하를 급격히 늘려놓았다. 그 행동은 분명 나보다도 아기를 향한 배려처럼 느껴졌다. 아기가 살아갈 세상이 그렇게까지 삭막하지는 않겠다는, 작지만 또렷한 희망이 스쳤다.
사소한 일 하나하나에 의미를 과하게 부여하면 안 되겠지만, 그 순간만큼은 오래 머물러두고 싶었다. 결국 잘못 내려 몸은 더 고생하는 비효율적인 결과를 맞이했지만, 괜찮았다. 내리기 전 몸을 돌려 다시 한 번 감사 인사를 건넸다. 무뚝뚝하게 휴대폰을 보고 있던 그녀는 고개를 들어 나와 눈을 맞추고는 쌩긋 웃어주었다. 그 미소 하나로 칙칙하던 버스 안이 조명이 켜진 듯 환해졌다. 그녀의 작은 친절이 내 세상을 한 겹 밝힌 셈이었다.
모르는 이와 눈을 맞춘 적이 또 있다. 그는 젊은 외국인 남자였다.
이제 거의 만삭이기 때문에 요즘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보내거나 남편과 차로 이동한다. 그럼에도 가끔 대중교통을 이용할 일이 생긴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마음이 쉽게 닳아버린다. 지하철이나 버스를 탈 때마다 아주 높은 확률로 임산부석은 비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날은 특히 더했다. 약속이 있어 1호선을 탔다. 최대한 짧게 타고 내리면 되는 거리였지만, 그 짧은 시간에도 실망은 어김없이 끼어들었다. 데이트를 가는 듯 촘촘히 화장한 젊은 여자가 자신의 가방을 임산부석에 올려두고 두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임산부석을 비워두자는 메시지는 이미 미디어에 충분히 퍼져 있다. 그럼에도 그날, 두 자리를 점유한 사람은 젊은 여자였다. 눈을 의심했지만 사실이었다. 참새가슴인지라 말은 못하고 치워달라는 기색으로 앞에서 잠시 맴돌았다. 그러나 그녀는 끝내 모르쇠를 잡았다. 배려의 문제를 넘어서, 많은 시선이 자신에게 향할 수도 있다는 사실조차 개의치 않는 듯했다. 그녀의 얼굴은 파운데이션만큼이나 두꺼워 보였다.
‘그럼 그렇지.’
임산부석을 차지한 사람들 대부분은 이미 시민의식 같은 것은 말라버린 듯 보인다. 비워둘 생각도, 비켜줄 생각도 애초에 없는 것이다. 그때, 맞은편 일반석에 앉아 있던 외국인 청년이 벌떡 일어나 자리를 내주었다. 인류애 그래프가 바닥을 찍는 순간, 다시 급격히 치솟았다. 얼떨결에 자리에 앉았는데 그는 곧 옆에서 곤히 자고 있던 자신의 친구를 흔들어 깨워 일으켰다. 남편의 자리까지 만들어주기 위함이었다.
검은 피부의 그 청년에게 연신 감사 인사를 건넸다.
그는 고르고 유난히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웃고는, 나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겉볼안이라고 했던가. 그의 눈빛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아름다운 사람인지 다 느껴졌다. 또 한 번 지하철 안에서 조명탄이 터지는 환상을 분명히 보았다. 강추위에 조심하라는 안내 문자가 연달아 왔지만, 내 안은 어느 때보다 다사로웠다.
이 얼마나 값비싼 공공시설인가. 아무 대가 없이, 그러나 가장 확실하게 작동하는 조명과 난방.
겨울의 한복판에서, 친절 하나가 세상을 덥힌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 온기를 오래오래 붙들고 싶어 도착역에 내리지 말까 잠시 망설인다. 그렇다면 이번엔 정거장을 의도적으로 놓친 게 될 것이다. 하지만 약속 장소에 가야 하니 부득불 안 내릴 수는 없다.
나는 그 온기를 데리고, 약속된 자리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