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미명에 눈을 뜬다.
일찍 출근하는 남편보다 훨씬 이른 기상이다. 이것도 출산에 다가왔다는 징조일까. 자주 깨고 자주 잔다. 아기는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이미 저 혼자 놀고 있다. 요 태동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깬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이제는 하루가 다르게 몸이 무거워서 추임새 없이 침대에서 가뿐히 내려오기가 힘들다. 작은 신음을 지르며 둔중한 발걸음으로 거실에 나온다. 한겨울의 찬기운이 발바닥을 통해 전해진다. 베란다 바깥쪽 창문엔 뽁뽁이를, 안쪽 창문엔 단열필름을 낱낱이 붙였다. 난방비를 최대한 아끼겠다는 의지였다. 하지만 바닥의 한기는 어쩔 수가 없었다. 한 푼 돈을 우습지 않게 여기며 육아용품을 마련하고 있다. 아기를 만날 준비에 박차를 가한다.
추위에는 알뜰살뜰하면서 모순적이게도 우리는 여행을 떠났다. 바다 안 본 지가 오래되었는데 이제 한동안 정말 마지막이 될 것 같아서 빠른 고민 후에 즉흥적으로 출발한 것이다. 급히 예약한 경포호수 근처의 가성비 숙소에서 묵었다.
12월은 가는 곳마다 트리가 있었다. 그리고 트리를 마주할 때마다 남편은 소녀가 되었다. 트리를 처음 보는 사람처럼 예쁘다고 감탄을 쏟아낸다. 그는 본인 치장하는 데엔 관심이 없어도 심미에 밝은 사람이다. 자기 관리랑 센스가 좋은 것이 무조건 연결되는 관계는 아닌가 보다. 같이 쇼핑을 할 때면 난 그가 골라주는 것을 완전히 신뢰한다.
예전부터 워낙에 예쁘고 아기자기한 것을 좋아했지만 이번엔 나의 감상도 조금 남다르다. 믿음직한 심미안에 더해 반짝반짝한 것에 반응하는 그를 보고 있노라니 그가 고른 배필인 나까지도 괜히 반짝이는 사람이 된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한 폭의 풍경화 같았던 설산과 푸른 바람, 물결도 보았다. 일박 이 일이라고 하기도 민망하게 짧디 짧았던 출타였지만 모처럼의 환기였다. 남편 또한 매우 즐거워 보인다. 태교여행을 빙자해 사리사욕 채우려는 속셈 아니냐고 남편을 놀렸다. 그러나 실은 우리를 행복하게 해 주기 위함임을 누구보다 잘 안다.
충동적인 행동이 꼭 다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삶의 비밀을 하나 또 깨우친다. 늘 계획적이고 이성적이라면 인생은 너무나 지루해질 것이다.
제 몸 하나 건사도 벅찬 임신부의 뒷바라지까지 하느라 고생한 남편에게 감사를 전한다.
또 한 명 깊이 감사할 사람이 있다.
임신하면 몸이 변하고 수십의 증상들이 생긴다. 그중 괴롭기로 대표적인 것들을 모두 겪지 않았다. 물론 조금씩 메스껍고 부분 부분 통증을 느끼거나 불편한 구석이 있었지만 임신 전에도 예사로 지나갈 수 있는 수준이었다. 주수별 시행하는 검사도 별다른 긴장감 없이 통과했다. 태동이 센 걸로 보아 활발은 하지만 무척 순하고 착한 아이인가 보다.
맹활동을 하는 녀석의 움직임을 바라보면서 얼마간 걱정도 했던 게 사실이다. 내가 통제 가능한 정도를 뛰어넘는 발랄함일까 미심쩍었다. 찾아보니 태동이 많은 것이 아이의 기질이나 행동 특성과 꼭 관련되는 건 아니라고 한다. 성격 예고가 아니라 그저 잘 크고 있다는 안부일 뿐인 것이다. 건강하고 반응 잘하는 아기라는 신호를 보고도 흔들리는 엄마라니. 나 하나만 믿고 이렇게 약동하는 생명을 두고 난 벌써 오해를 했다.
빨리 만나고 싶으면서도 지금이 너무 안온해서 조금 더 품고 있고 싶은 마음도 든다. 내가 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양자택일이라도 하겠다는 듯이 그런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엄마라는 꽤나 점잖은 역할이 새로 생겼어도 유치함은 어디 가지 않는 모양이다. 기대는 게 익숙한 철면피 어른이라 벌써부터 아기에게조차 의지를 했다. 미안했다.
함께라서 너무나 행복했던 아홉 달이 지나고 있다. 만삭의 입구에서, 올해를 넘기기 전에, 덕분에 인생 최고의 한 해를 보냈다고 말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