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조금이라도 잃어버려보면 우리 삶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 기억이라는 사실을 느낄 수 있다고 한다. 책에서 본 어느 신경학자의 말이다. 기억이 없는 인생은 인생이라고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의 통일성과 이성, 감정, 심지어는 우리의 행동까지도 기억이 있기 때문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저 스쳐 지나갔다고 생각되는 그런 기억들조차 모여서 나를 이루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감사한 마음이 솟는다. 좋은 기억들을 줘서 지금의 나를 만들고 결정해 준 사람들이 하나둘 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돌아보게 된다. 나는 과연 다른 이들에게 어떤 기억을 줬을까. 악몽 같은 기억을 준 적은 없었나.
사실 조금 전 집에서 동생과 바락바락 악을 써가며 싸웠다. 나이 서른을 앞두고 아직도 조그만 일에 쉽게 흥분해서 그렇게 유치하게 싸운 행동이 정확히 소리를 지르고 5분 뒤에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미안해졌다. 싸울 때는 상처를 더 많이 주는 쪽이 이긴다고 생각을 하는 건지 마음에도 없는 소리까지 막 내뱉었기 때문이다. 어느 멜로 영화의 제목처럼 머릿속 기억을 지우개로 지울 수 있다면 내가 했던 말들을 쏙쏙 지우고 싶어졌다. 미안해서 눈물까지 날 정도였다. 그렇게 화를 낼 때는 언제고 급 잘못을 뉘우치는 게 스스로 생각해도 웃기고 어이없다.
아주 어릴 적 식탐이 왕성하던 시절 동생이랑 젤리 반쪽도 나눠먹기 아까워했던 내 모습을 동생은 기억한다. 적어도 20년이 지난 그 이야기를 아직도 가끔씩 꺼내곤 한다. 왜 그렇게 욕심을 부렸는지 너무 창피하기도 하고 지금은 어느 집 누나들보다 더 잘해주는데 그런 건 기억 못 하고 그때 일만 들추는 게 좀 짜증이 나기도 하지만 얼마나 충격이었으면 아직도 그 얘기를 하나 싶기도 하다. 어찌 됐든 기억은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골라서 저장하는 자기중심적인 성격이 있기 때문에 내가 기억되고 싶지 않은 부분을 남이 기억하는 것이 억울하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내 기억도 과장이나 왜곡이 없는 온전한 기억이라고 자신할 수 없기에.
이렇게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잊히지 않는 기억이 있는데 기억이 모여 그 사람의 인격까지 정할 수가 있다는 건 정말 무서운 말인 것 같다. 누군가의 인생에 내 말 한마디, 행동 하나가 영향을 준다는 소리가 그냥 간단하게 흘려 들리지가 않는다. 큰 책임감이 느껴진다. 그래서 동생에게 막말했던 게 더욱 미안해졌다. 오늘 사건을 빌미로 20년 뒤에 "누나가 그렇게 말했었잖아"라고 하진 않을까, 동생에게 새로운 상처를 준 게 아닐까 걱정이 된다.
앞으로는 아무리 화가 나는 일이 있어도 말과 행동을 하기 전 잠시 진정을 한 후 신중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이들을 따뜻하게 만드는 그런 좋은 기억만 전하는 사람이고 싶은데 오늘 큰 실수를 한 것 같아 너무 속상하다. 조심해야겠다.
동생아 미안. 앞으론 좋은 기억만 주는 누나가 되어볼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