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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사람 Nov 10. 2022

이도 저도 아닌 재능

애매한 재능


몇 달 전, 친구의 집에서 친구의 조카를 만났었다. 7살 이쁜 아이다. 그 아이는 스케치북에 약간은 기괴한 공주를 그리면서 놀고 있었다. 딱 미취학 아동이 그린 공주다웠다. 옆에서 칭찬을 해주면서 그림 그리고 색칠하는 것을 봐주었다. 그렇게 열심히 그리는가 싶더니 지겨운지 나에게도 색연필을 내민다. 이모, 너도 그려봐라 기회를 주는 것이다. 멋쩍게 색연필을 건네받았다. 오랜만에 잡아보는 색연필로 무엇을 그릴지 잠시 고민했다. 그러고 공주에 공주로 응수하기로 했다. 눈에 별을 박은 예쁜 인간을 슥슥 그렸다. 여기저기가 놀거리인 아이는 내가 그리는 과정에 집중하지 않았다. 다른 데서 놀다가 다시 내 곁으로 돌아온 아이에게 완성한 그림을 보여줬다.


깜짝 놀라는 아이의 반응에 내가 더 놀랐다. 감동을 받은 표정이었기 때문이다.  "너무 예뻐요...." 큰 눈이 더 커지면서 나지막이 한마디 하더니 들고 돌아다니면서 자랑까지 한다.

친구도 조카의 유난에 어디 보자 하며 보고 나서 똑같이 놀란다. 그러곤 그림을 원래 잘 그렸냐고 묻는다. 사실 그 정도의 실력은 전혀 아니었다. 겸손이었으면 좋겠지만 겸손이 아니라 진짜다. 평소에 그림 보여줄 일이 없으니 잘 몰랐는데 안 그렇게 생긴 애가(?) 생각보다 잘 그려서 놀란 것이다. 훅 들어온 칭찬들에 괜히 후끈해진 얼굴로 나도 모르게 어린 시절 꿈까지 고백해버렸다.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나 사실 만화가가 되고 싶었어"


초등학교 저학년 때 나는 조금 유명했다. 딴 반의 모르는 애들까지 자기 종합장을 들고 찾아와 나에게 그림을 그려달라고 했었다. 아무것도 안 들고 무턱대고 그려달라며 오는 애들한테는 내 종합장에 그려 벅벅 찢어줬다. 그래서 나의 공책은 항상 남아나질 않았다. 주로 그린 그림은 '우비 삼 남매'이다. 어렸을 때부터 개그콘서트 애청자였던 나는 우비를 입은 귀여운 캐릭터를 종이에 자주 그렸다. 혼자 그리고 있는 걸 옆에서 친한 친구가 보고 자기도 그려달라고 해서 그려줬더니 그게 점점 입소문을 탄 것이다.

공책을 희생하는 일이었지만 학교 가는 매일이 즐거웠다. 내 인생의 전성기는 그때이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마치 팬사인회를 하는 것 같았다. 나의 재능을 알아주고 찾아오는 이가 있다는 것. 그 짜릿함을 무얼로 표현할 수 있을까. 여러 명에게 인정을 받은 나는 만화가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부모님께도 많은 지원을 받았다. 아빠는 전문 연습장을 여러 권 사주셨고 엄마는 미술학원 선생님께 과외를 받게 해 주셨다. 그리는 것이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해를 거듭할수록 나는 꿈과 멀어지고 있었다.

어느 한순간의 일은 아니었다. 그냥 차츰차츰 현실을 깨달은 것이다. 이 세상엔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이 차고도 넘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스스로를 '잘 그리는 사람'으로 착각하고 살다가 '평균 이상'인가 보다 했고, 마지막엔 '보통도 아닌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 잘난 사람들은 어린 나에게 상처였다. 나의 특별한 재능이라고 믿었던 것이 별거 아닌 게 되는 일은 참 씁쓸했다. 이도 저도 아닌 재능임을 깨닫고 일찍이 꿈을 접은 것은 어찌 보면 잘한 일이다. 생계유지가 가능한 기술을 배워 생계유지할 정도로 먹고살고 있으니 참 감사하다. 만약 만화가의 꿈을 박박 우겼다면 어땠을까를 상상하면 눈앞이 캄캄해진다. 빠른 결단을 한, 어쩌면 지금보다 현실감각이 좋았던 어린 나를 칭찬해 주고 싶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엔 작은 미련도 있다. 자신이 좋아하는 꿈을 오랫동안 지키고 있는 사람들은 나의 선망의 대상이다. 유명하든 유명하지 않든 그들에게선 어떤 아우라가 느껴진다.  보통의 사람들이 대부분 현실에 맞춰서 꿈을 버리기 때문에 그런 걸까. 끈질기게 꿈을 지키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라는 걸 알아서 그런 것 같다.

<애매한 재능>이라는 책을 읽었다. 거기서 작가는 이만하면 잘 쓴다고 생각해 예술대학에 입학했는데 이 정도로는 안 되겠다고 수없이 낙담했다고 한다.  스스로 쓸만한 재주를 가졌다고 여겼지만 영재는 아니라서 낙담을 해왔던 나에게 깊은 위로를 주었다. 범재, 평범한 재주를 가진 사람, 이라는 별명을 듣는 작가의 이야기가 우리네 인생을 통찰하고 있다. 상위 1%의 화려한 삶을 보며 스스로에게 실망하는 99%의 범재들. 그 범재들에게 작가는 멋쟁이 토마토 노래를 선물한다. 토마토 앞에 '멋쟁이'가 붙은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말한다. 토마토는 하고 싶은 것이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아파트 베란다 텃밭에 매달려서도 케첩이 되고 싶다는 꿈을 꾸고, 수확기가 지나고 비닐하우스에 쓸쓸히 남겨졌는데도 주스가 되고 싶으며, 줄기에 가만히 매달려서도 온몸을 격렬하게 흔들며 춤추고 싶다는. 때로는 허황된 꿈이라도, 손에 잡히지 않을 먼일이라도 토마토들은, 하고 싶은 것이 있다고.


꿈을 꾸는 것만으로도 진정 멋쟁이 토마토라는 것이다.


그림 그리는 게 아니더라도 나에게는 애매한 재능들이 몇 개 더 있다. 글씨 예쁘게 쓰기, 비트박스, 긍정적으로 생각하기 등등.

나는 너무 평범하고 잘난 게 없어하며 상심했던 지난날들을 반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재능들을 오래오래 성실히 갈고닦아야겠다는 다짐도 하였다.

친구의 조카에게 그려준 그림은 한동안 벽 한쪽 면에 전시되어 있었다고 한다. 내 애매한 재능을 알아봐 준 그 천사에게 고마워진다.

앞으로 나는 애매한 재능들을 좀 더 우겨보기로 했다.

나는 꿈을 꿀 것이고 멋쟁이 인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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