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밍키 May 28. 2024

곱창 도둑

선선한 바람이 불고 적당히 따스한 날.

힙당동이라 불리는 신당동으로 마실을 간다.

오랜만에 지하철을 탄다. 어떤 아저씨가 멀리서부터 뭐라 뭐라 연설을 하며 이쪽으로 온다. 잡상인은 아닌 것 같고 태극기는 안 달고 있지만 시뻘건 냄새가 난다. 가까이 왔을 때 들어보니 역시나다. 우리나라가 너무 걱정이 돼서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어 나오셨다 한다. 욕설을 섞어가며 이야기한다. 처음부터 들을 가치가 없을 것 같았지만 그래도 호기심에 무슨 말을 하려나 유심히 귀 기울였는데 괜히 들었다.

저는 댁 때문에 심히 걱정이 듭니다.


오른쪽엔 절친, 왼쪽엔 남자 친구를 끼고 신당동 시장 골목을 걷는다. 한 곱창집이 우리의 눈길을 끈다.

빨간 야장 테이블이 죽 깔려 있다.

그래, 야장의 계절이 아닌가. 금세 더워질 것이다. 야장을 즐길 수 있는 마지막 주말이 될지 모른다.

이미 육회와 어묵을 먹은 후지만 후식으로 곱창은 가능한 종목이다.


자리가 있는지 둘러봤다. 앉은 사람은 없는데 곱창만 올라와 있는 자리가 보인다.

손님들이 담배를 피우러 간 사이 주문한 곱창이 나온 것 같다. 금방 나온 듯 모락모락 김까지 난다.

그 옆옆쪽 테이블이 막 비어서 직원이 손님이 나간 자리를 바로 치워준다. 직원은 아주 앳된 얼굴을 한 외국인 청년이다. 잠깐 얘기했을 때 보니 한국말이 서툴렀다.


상을 정리하는 걸 기다리고 있는데 수상한 남자가 나타난다. 베이지색 점퍼를 입은 어떤 노인이 주인이 아직 오지 않은 그 새 곱창을 냄비째 들더니 검은 봉지에 털어 넣는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우리는 그대로 얼이 빠져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친구가 이상한데? 이상한데? 했지만 나는 설마, 설마 했다. 직원이 1m 남짓의 거리에 떡하니 있고 할아버지의 행동은 느긋하고 자연스러웠으며 원래부터 있던 바로 옆 테이블의 커플마저 아무런 반응이 없었기 때문에 아무리 의심스러운 모습이어도 도착한 지 얼마 안 된 우리가 모르는 뭔가 있겠지 했다. 이해가 가지 않지만 이해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설마는 사람을 잡는다. 중년 남성 두 명이 담타를 마치고 자리로 돌아온다. 그러곤 빈 냄비를 보고 뭐지?라고 한다. 곱창이 도둑맞았다는 것이 확실시된다. 그런데 속이 좋은 것인지 술에 취한 것인지 나오겠지 하며 빈 냄비를 옆으로 치워놓는다. 아직 유유히 걸어가는 도둑의 뒷모습이 보이는데! 말을 해주려면 지금 해야 한다. 친구들에게 우리가 말해주자 말해주자 했는데 남자 친구가 말린다. 괜히 남의 일에 끼지 말자라고 한다. 실망스러웠다. 학생들 무리로 담배 피우는 데 가서 따끔하게 훈육하자는 게 아니다. 선량한 손님들과 괜한 피해를 입을 수 있는 순진한 아르바이트생을 위해 우리가 본 것만 그들에게 말하자는 건데 이 남자는 뭐가 두려운 걸까. 눈앞에서 곱창을 베어가는 것보다 이 남자의 반응이 더 충격이었다.


우리의 곱창이 나왔지만 나는 신경 쓰여서 제대로 먹을 수가 없었다. 이대로 말해줄 기회를 놓친 채 집에 가면 나는 분명 평생을 후회할 걸 안다. 저 손님들이 하염없이 곱창을 기다리다 우리 것은 언제 나오느냐 물어보는 시간이 올 텐데 현장을 목격한 건 우리밖에 없다. 어리바리한 알바만 뒤집어쓰고 혼날 수도 있었다. 내가 이렇게 걱정하고 있을 때 친구가 그 외국인 직원을 불러 용감하게 제보한다. 물론 직원은 알아듣지 못하는 눈치였고 곧이어 사장을 데려온다. 무슨 일이시냐며 사장님이 우리에게 오셨고 자초지종을 다시 설명했다. 그런데 한국인인 사장님도 이게 무슨 말인지 바로 못 알아들으신다. "그게 무슨 소리시죠...?"

우리가 말하면서도 황당하긴 했다.


그런데 더 황당한 건 옆 테이블의 커플이었다. 서로 대화도 안 하고 곱창만 먹던 여자가 갑자기 끼어들더니 "그거 남아서 포장해 가신 거예요"라고 했다. 여자의 그 한마디로 우리가 엉뚱한 이야기를 한 것 같은 상황이 됐다.


그 순간 마침 곱창을 도둑맞은 아저씨 둘이 사장님을 부르고 곱창이 너무 오래 안 나온다 이야기한다.

그제야 사장님은 우리의 제보를 바로 이해한 듯한 표정을 지었고 그분들에게 설명하고 사과하면서 곱창을 금방 다시 가져다 주기로 했다. 아저씨들은 쿨하게 뭘 죄송하시냐 허허하며 괜찮다고 한다.

커플 여자는 알지도 못하면서 왜 나선 걸까? 모르면서 잘 아는 척 나서는 사람들은 정말 싫은 부류다.

이렇게 간단히 훈훈하게 마무리할 수 있는 문제를 남자 친구는 왜 그렇게 피한 걸까? 나를 말려가면서까지.

몇 가지 의문은 있지만 어쨌든 한 시름 놨다. 이제 웃으면서 곱창을 넘길 수 있었다.


친구가 나한테 너도 말 못 한 건 마찬가지니까 너무 뭐라 하지 말라며 우리를 중재한다.

하긴 그 말이 맞다. 내가 뭐라고 실망을 할 수 있을까. 바보처럼 가만히 있던 건 매한가지였다.

나도 하지 못할 일을 다른 이한테 기대하지 말자.


곱창을 맘 편히 먹고 있는데 재미난 일이 또 일어난다. 아까 그 곱창 도둑 할아버지가 개선장군처럼 다시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범인은 현장에 돌아온다'는 말을 눈앞에서 목격한다. 곱창을 담은 검은 봉지를 한 손에 쥔 채로 대담하게 그 아저씨 둘 바로 옆으로 간다. 그러곤 아저씨들의 맥주도 몰래 한 컵 따라 마신다.


작가의 이전글 친절한 은행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