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치병이란 말을 의사들은 잘 쓰지 않는다.
창조주의 영역을 넘 볼 수준으로 발전된 의학은 대부분의 질병을 정의해 낼 수 있다. 그리고 효과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거기에 대응하는 치료법은 대부분 존재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인생을 시한부로 만드는 말기암조차 불치병이라 부르진 않는다. 조기 발견을 못하여 치료시기를 놓쳤다고 말할 뿐.
의사인 나에게 그녀의 병은 불치병으로 느껴졌다. 그녀는 고혈압과 같은 만성질환 관리를 위해 나에게 다니고 있었다. 꼼꼼하고 조금은 예민한 성격으로 보였던 그녀는 그만큼 운동, 식이관리를 잘하며 건강 관리가 잘 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남편의 부축을 받으며 힘들게 나의 진료실을 찾았다.
그녀가 말했다.
"허리가 아파서 큰 병원에서 가서 허리에 주사를 맞고 약을 먹었어요. 그런데 약이 독했는지 그 이후로 점점 걷기가 힘들어지네요~"
내가 말했다.
"제가 도움이 될 만한 약을 처방해 드릴 테니 드셔보시고, 계속 안 좋으면 시술한 병원도 다시 한번 가보세요~"
그녀는 수술 한번 한적 없고, 평소 혈액검사 결과도 좋았던 터라 푹 쉬고 시간이 지나면 좋아질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녀의 발걸음의 폭은 점점 좁아졌고, 근육은 점점 뻗뻗해졌다. 표정은 조금씩 감정을 잃어갔다. 이제는 걷기조차 어려워지는 그녀의 운동신경에 문제가 생겼을 가능성이 커 보였다. 그래서 대학병원 신경과에 연결을 해드렸다. 하지만 MRI, 신경전도검사 등 여러 검사를 통해 그녀는 별 문제없다는 한마디만 들을 수 있을 뿐이었다.
환자들은 어디서도 해결되지 않는 자신의 문제를 대학병원에서 해결해 주길 원한다.
하지만 한 명의 인간을 다루기보단 질병을 다루는 의학은, 그 학문의 스펙트럼 밖에 있으면 왜 꾀병을 부리냐는 듯, 내 영역은 아니라는 듯 환자를 불청객 취급을 하기도 한다.
불청객이 된 서러운 그녀를 정신건강의학과에 다시 의뢰했다. 이과, 저과에서도 해결이 안 되면 마지막 대안으로 여겨지는 분야가 정신건강의학과이다.
한 사람의 인생 서사를 좀 더 들여다보며 신체의 원인으로 설명되지 않는 증상을 정신과 내면에서 그 원인을 찾아보는 것이다.
그녀는 수개월이 지나자 혼자서는 음식을 먹을 수도 없는 상태가 되어 결국 정신건강의학과에 입원을 했고, 한 달간의 치료 후에 어느 정도 회복이 되어 퇴원을 했다. 하지만 기대한 만큼의 호전은 없었다.
결국 대학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치료에도 기대를 접고, 집에서 가까운 동네병원의 나를 남편과 함께 다시 찾아왔다.
"오랜만이죠 선생님~ 좋은 모습으로 만나야 되는데 아직도 몸이 이렇네요. 자꾸 몸이 한쪽으로 기울게 돼요"
내가 말했다.
"그러네요. OO님과 남편분, 두 분 다 너무 힘드시겠어요~ OO님의 증상은 마음이 힘든 게 신체로 나타나는 증상 같습니다. 다른 병원 정신건강의학과를 연결해봐 드릴까요~?"
남편이 말했다.
"빅 5 병원이고, 대학병원이고, 연락도 해보고 다 가봤어요. 근데 이 사람은 자기를 많이 봐왔고, 신뢰가 쌓인 사람이 아니면 의사에게도 마음을 열지를 못해요. 그러니 이제 어디 딴 데 가란 말은 마세요."
사실 나에게도 그녀가 다른 병원에 다시 갔을 때, 그녀가 좋아질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별로 없었다. 나 역시 내가 가진 지식의 스펙트럼 밖인 그녀를 순화된 말로 불청객 취급을 한 건 아니었을까.
기왕 이렇게 된 거 동네병원 내과의사인 내가, 잠깐 정신과 의사도 되어보기로 했다. 지식의 스펙트럼이야 한정 돼 있을지언정, 질문의 스펙트럼이야 한없이 넓힐 수 있지 않나.
최근 정신적으로 힘든 가정사는 없었는지, 유년기 시절에 트라우마는 없었는지 물어보았다. 그녀가 어렸을 적 아버지는 교장 선생님이었고, 완벽주의자였다고 하였다. 그런 아버지에게서 양육된 그녀도 완벽주의 성격이 있다고 했다. 그녀의 여러 단편적인 이야기를 들어보고 그녀에게 말했다.
" OO님의 완벽을 추구했던 힘든 마음이 버티고 버티다가 너무 힘들어서 모든 것을 놔버린 건 아닐까요..? "
그녀는 눈시울을 붉히며, 뻣뻣해진 목을 애써 움직여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원인을 알고서도 해결하지 못하는 병이라면, 슬프게도 그것이 불치병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건강상태 확인을 위해 정기적으로 하는 피검사를 하고 갔다. 다음날 그녀의 남편 혼자 피검사 결과를 보러 나에게 왔다.
집에 있을 때 그녀의 몸이 뻗뻗히 굳는 증상은 그녀의 심리 상태에 따라 변동이 심하다고 했다. 그런데 어제 나와 대화를 하며 진료를 보고 간 후에는 몸이 많이 가벼워졌다고 남편이 말해줬다. 우울감과 굳어진 몸으로 한동안 하지 못했던 산책도 어제부터 다시 시작했다고 전해줬다. 그저 던져본 나의 말 한마디가 그녀에겐 내가 생각지도 못한 영향과 무게가 있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꽤나 오래 전인 나의 고등학교 시절, 나는 위장장애로 동네병원에 간 적이 있었다. 의사 선생님이 나에게 말했었다.
"학생~ 위장을 건강하게 하려면 아침을 꼭 먹어야 돼~"
나는 그 얘기를 듣고 바쁜 등교시간에도 어떻게든 아침을 먹으려 노력했다. 그게 영향이 있었는진 모르겠지만 지금도 매일 아침을 챙겨 먹는다. 아직까지 그 당시 의사 선생님의 한마디가 기억나는 걸 보면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찰나의 조언이 나에게 영향을 준 건 확실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당시 의사의 한마디는 수많은 환자들에게 건네는 스쳐가는 한마디였을 것이다. 현재 나의 진료실의 언어가 그러하듯이.
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어린 학생에겐 신뢰감 순도 100% 의 건강 바이블과 같은 의미였던 것이다.
나는 다시 생각한다. 내 말 한마디에 그녀의 몸이 조금이라도 변할 수 있는 거라면, 그녀의 병은 불치병이 아닐 거라고. 그리고 지나치는 나의 말 한마디가 누군가에겐 어느 비싼 약보다 더 좋은 치료제가 될 수도 있을 거라고.
하지만 수많은 환자를 보며 항상 내 말의 무게를 느낀다면 난 그 부담을 견딜 수 없을 것이다. 그저 내가 환자들에게 가볍게 던지는 말 한마디에도, 나를 찾는 이들에게 도움이 되겠다는 진실한 마음만은 항상 담겨있기를 바래본다.
그녀의 치유를 바라는 진실한 몇몇의 마음을 그녀도 느낄 때, 굳어가던 그녀의 몸과 마음도 조금씩 부드러워질 수 있을 거라 믿는다.
인간의 마음은 한없이 나약하지만 그만큼 유연할 수도 있기에.
의사는 불치병은 없다고 믿어야 하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