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서울대가 뭐길래

나는 서울 시내의 의대를 졸업하고, 서울 외곽의 2차 병원에서 전공의 시절을 보낸 후 내과전문의가 되었다.


철이 들고 뒤늦게 노력을 하고 또 운도 좋아 서울대학교병원의 분원에서 임상강사로 1년을 보냈다. 나의 상당히 긴 의학교육 기간 중에서는 그야말로 서울대학교의 맛만 본 셈이다.


1년간의 임상강사 기간이 끝나고 나는 바로 개원을 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손가락 안에 드는 큰 병원에서 근무하던 자부심에 취해 있던 나는 서울대학교 병원근무 이력과 서울대마크를 간판에 호기롭게 내세웠다. 얼핏 보면, 아니 철저한 의도 하에 서울대학교에서 뼈를 묻은 의사처럼 나를 포장했고, 환자들도 자연스럽게 나를 그렇게 오해해 주었다.


종종 나에게 서울대학교 이력에 동질감을 표하는 분들도 있었다.

" 우리 젊은 원장님이 우리 학교 동문이었구먼~ 어쩐지~"

환자는 나에게 한껏 신뢰를 보내주었지만, 성골도 진골도 아닌 4두품 쯤되는 나는 어색한 웃음과 함께 어쩔 줄 몰라했다. 마치 남의 가면을 쓴 듯 불편했다. 나를 치켜세운 것은, 곧 그분의 우월감의 표현이었, 그게 세운 서울대의 테두리 안에 나는 자신 있게 끼어들지 못했다.


한 번은 과호흡을 하던 딸을 병원에 데리고 온 아버지가 한 분 있었다. 내가 과호흡 하는 딸을 눕히고 호흡을 천천히 안정시키자 아버지가 딸에게 얘기했다.

" 서울대 나온 선생님이 괜찮다고 하시잖아! 너 이제 좋아질 거야!! "

아... 웃어야 할까, 울어야 할까.


내가 서울대의 가면을 쓴 것에 대한 환자들의 오해 덕분인지는 모르지만 , 개원 초기에 환자가 없어 걱정이던 나의 병원 대기실엔 어느 정도 환자가 늘기 시작했다.


수개월이 지난 후 나의 병원에서 약 200m 거리에 새로운 내과가 개원했다. 원장은 나와 아주 비슷한 의대 과정을 거치고, 나와 똑같이 서울대병원의 맛! 만 본 같은 의국의 선배였다.

얼마 후 그는 내 병원에 인사차 방문했고 우리는 반가움으로 포장된 경계심과 함께 악수를 나누며, 지키지 않을 밥 한번 먹자는 인사를 했다. 그는 돌아가는 길에 묘한 템포의 발걸음으로 내 병원을 구석구석 훑어보고는 병원을 나갔다.


며칠 후 서울대학교 산학협력단이란 곳에서 연락이 왔다. 민원이 들어왔는데 서울대학교 학부 졸업생만 간판에 서울대학교 마크를 쓸 수 있으니 당장 간판을 고치라는 연락이었다.

남의 병원 간판에 대부분 관심이 없을터, 갑자기 관심이 생긴 사람은 한 명 밖에 없을 것 같았지만, 그 한 명도 나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이라 민원을 넣지는 않았을 거라 생각했다. 며칠 후 새로 개원한 동문의 병원 간판을 보니 거기에 달려있던 서울대학교 마크는 아주 슬기롭게.. 미세하고 오묘하게 변형된 마크가 자리하고 있었다.


며칠 밤잠을 설치도록 화가 많이 났다. 며칠 후 산학협력단에서 다시 전화가 와서 간판을 고치지 않으면 내용증명을 보낼 거라 압박을 했다. 개원 초기여서 자금도 넉넉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간판에서 서울대학교 마크를 떼고 새로 만들기로 했다. 새 간판을 만드는 김에 새로운 로고를 만들어 보기로 하였다. 나의 이니셜도 넣고 내가 좋아하는 색깔로 내 취향을 듬뿍 담아 제작해 보았다. 그것은 남들이 볼 땐 흔하디 흔한 병원 로고였지만, 나의 취향이 담긴 유일한 나만의 것이었다.


새로 간판을 바꾸자 마음이 아주 홀가분 해졌다. 나에게 씌워진 가면을 모두 벗은 느낌이었다. 새로 개원한 동문에 대한 (나 혼자만의 확신일지도 모르는..) 분노도 점차 사글어들었다.


몇 달이 지나자 나를 서울대학교 출신 의사로 오해하는 환자들은 이제 아무도 없게 됐다. 힘이 잔뜩 들어갔던 진료의 마음가짐도 훨씬 가벼워짐을 느꼈다. 환자가 줄어드는 거 같으면 '바꾼 간판 때문인가..' 하는 좀스런 자격지심이 들 때도 있었지만 이내 무뎌졌다.


그렇게 시간이 지났다.

진료시간에 너털한 웃음이 좀 더 많아지고, 그저 맘씨 좋은 동네 의사가 되고 싶어졌다.

이전까지 내가 아닌, 내가 속했던 곳의 권위 뒤에 나를 숨기고 있었다. 가면을 쓴 듯한 그 불편감은 숨지 말고 솔직한 내가 되라고 하는 내 자아의 외침이었다.


오랜만에 토요일 진료가 끝나고 병원 정리를 위해 이곳저곳 훑어보는데, 모두 다 없앴다고 생각했던 서울대마크가 병원 구석 문 한켠에 남아있었다.

씁쓸한 마음 뒤로 한껏 가벼워진 미소가 지어졌다. 욕심을 비우고 보니, 그 마크는 기와집 지붕 같기도 하고 멋스럽긴 했다. 미천한 기간이지만, 나름 내가 자랑스러워한 그곳에서의 생활이었다.


잠깐 고민한 끝에,

나의 추억을 위해.. 리고 간혹 속아줄 환자가 있다면,

난 '서울대에 한쪽 발만 잠깐 담갔다 뺀 의사'라며 웃으며 알려줄 수 있을 것 같았기에..

그 마크하나는 그대로 놔두기로 했다.

keyword
이전 04화더위 먹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