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독히 더운 여름이었다. 자는 게 두려울 정도의 더운 여름밤이었다. 내 병원에도 더위에 힘들어오는 환자들이 많았다. 이 여름날, 가장 많은 고통의 표현은 이거였다.
"더위 먹은 거 같아요!"
더위를 먹었다니..먹긴 먹었다는데, 과연 어떤 맛 일까.
더위에 기가 허한 것일까, 소화가 안 되는 것일까, 머리가 아픈 것 일까, 열이 나는 것일까, 아니면 이 모든게 다 있는 상태인 것인가.
사실 의학을 배워온 입장에서 보면 더위먹은 병이라는 질환은 존재하지 않는다. WTO 가 지정한 ICD-11 국제질병분류에 그런 질환은 없다. (이 재수없는 알파벳의 나열은 대체 뭔가!) 온열질환에 해당하는 열사병은 40도가 넘어야하고, 열탈진은 탈수와 전해질의 불균형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다면 나의 동네병원에 두발로 걸어왔을리는 없다. 그러면 더위먹었다는 이 상태는 정상과 열사병의 중간단계, 더위먹음증후군 정도가 될 수 있겠다.
이러한 딱딱한 의학적 관점을 가지고 환자에게 교과서를 들이밀 듯 접근하면 오히려 엄청난 불신을 초래한다.
" 환자분, 체온이 40도는 안되니 열사병은 아니고, 열탈진이 있는지 나트륨, 칼륨의 균형이 깨진건 아닌지 혈액검사를 한번 해보는 게 좋겠습니다."
그 순간, 환자의 눈빛은 '뭐 이런 돌팔이가 다있어?' 라는 무언의 메세지를 적나라하게 던진다. 나의 다년간 경험에서 나온 나름의 노하우를 얘기하자면, 이럴땐 우선 환자의 팔목에 맥을 지긋히 잡아야 한다. 그리고 환자의 눈동자를 역시 지긋히 바라보며 얘기해야 한다.
" 어유~ 맥이 이렇게 약한걸 보니, 더위를 많이 먹었네요. 기력회복에 도움되는 영양제 수액 놔드리면 도움이 되실 거에요~"
과장반 진심반, 아니 과장20% 진심80% 인 이야기 이지만 실제로 진료를 보러 오는 환자들은 자신의 몸 상태에 대해 자신만의 진단을 이미 내리고, 병원에 오는 경우가 많다. 유튜브도 찾아보고, 아침마당에 나오는 의사 얘기를 들어보니 내 얘기 같기도 하고, 한의원에서 얘기도 들어보며 자신만의 확신에 찬 진단을 이미 내리고 병원을 찾는 것이다.
이런 자기만의 확신은 아픈 사람 만의 얘기는 아닐 것이다. 사람의 생각이라는 것이 자신만의 사고 체계 안에서만 작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단어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은 그 사람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대상이다. 거꾸로 어떤 단어를 새로 만들어 그것에 대해 규정하는 순간, 그 존재는 없다가도 새로 생긴게 된다.
대프리카라 불리우는 지독히 더운 한국의 여름, 우리는 그 더위에 견디기 힘든 상태를 더위 먹었다고 칭하기로 한다. 그래서 그 애매한 상태의 질병의 정의에 대해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모두가 공감하고, 왠지 모르게 여름날 몸이 안 좋으면 더위먹은 것으로 퉁치기로 한다.
동네 의사의 업을 이어 나갈수록, 상대방의 사고체계 안에서 이해해보고 그에 맞장구를 한번 쳐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걸 느끼게 된다. 생사를 오가는 환자를 다루는 큰 병원 의사들에게는 무엇보다 최신 지식의 업데이트가 필요할 것이고, 수술하는 외과의사에게는 정교한 손재주가 필요할 것이다. 나와 같은 동네의사에게는 딱딱한 지식의 전달보다는, 환자의 입장에서 쉬운 정보의 전달, 상대가 말하는 행간의 의미를 읽고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그런 것이 필요하다고 갈수록 느껴진다.
의사들이 웬만해선 척을 지고 욕을 하는 한의사들에게 그런 점은 배울 것이 있지 않나 생각한다. 차가운 청진기보다 자신의 체온을 담은 손으로 환자의 맥박을 느끼는 행위, 아주 한국적인 용어들로 아픈 사람들의 공감을 이끌어 내는 것이 한의사의 이미지가 아닌가.
그 지독한 더위 먹음은 우리 가족에게도 찾아왔다. 웬만해서 에어컨을 틀고 자지 않는데, 그날은 너무 더워 하루 종일 에어컨을 틀고 잠이 들었다. 6살 아들이 에어컨 바람 아래 자고 일어나더니, 좀처럼 없던 두통을 호소했다. 아들의 체온을 재보니 35C, 저체온이었다. 에어컨을 전부 끄고 창문을 열어 더운 공기를 다시 쐬게했다. 땀을 흘리며 다시 자고 일어나니 다행히 아들의 체온이 올라갔고 두통도 없어졌다. 더위를 피하려던 노력들이 과해서 아들의 몸에 무리가 갔던 모양이다. 너무 과하지 않게, 어느 정도는 계절을 따르는 태도가 필요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종일 틀어대는 에어컨은 그와 연결된 실외기를 오히려 더욱 뜨겁게 만든다. 이처럼 더위에 맞서려는 문명의 이기는 지구를 더욱 뜨겁게 만들 것이다.
지구의 입장에서 이 지독한 더위는, 환자가 된 행성이 아프다며 우리에게 보내는 뜨거운 입김이자 외침이지 않을까.
우리가 지구의 입장이 되어 맞장구도 쳐보지 않고, 그가 던지는 행간의 메세지를 계속 놓친다면.. 나의 아들, 그의 자식, 또 그의 자식 세대 쯤이 되었을때 인류는 온난화에 새로 맞닥뜨린 멸종한 공룡의 처지가 되는 건 아닐지... 막연하고도 진실한 걱정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