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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데헌의 여름

by 문과체질 내과의사

9살 조카네 가족과 여름 휴가를 갔다. 무더위는 다른 세상 얘기라는 듯, 시원한 평창의 바람은 상쾌하고 좋았다.
숙소 앞에 펼쳐진 초록색 풀밭은 일상에 지친 마음을 안정시켜주었다. 아이들이 자유롭게 뛰어노는 장면이 저절로 떠오르는 그런 분위기였다. 나와 9살 조카, 그리고 6살 아들은 초록색으로 물든 업된 마음을 참지 못하고 바로 풀밭으로 나왔다. 축구도 하고, 술래잡기도 하고,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도 하며 땀을 흘렸다.

조카는 춤추기를 좋아했다. 집에서 방문을 닫고, 음악을 틀고서는 엄마, 아빠에게도 잘 안 보여주는 자기만의 무대를 갖는다고 했다. 사춘기 시절, 한 때 댄서를 꿈꿨던 나는 조카의 흥을 200%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 조카에게 2025년 여름에 'K팝 데몬 헌터스' (케데헌) 의 노래는 빼놓을 수 없는 레퍼토리였다.

"고모부! 케데헌 OST golden 틀어주세요~!"

"좋아. 그럼 우리 한명씩 춤추고, 나머지가 관객이 되어줄까~?"

그렇게 초록색 풀밭은 스테이지가 되고, 휴대폰은 스피커가 되었다. 내 유전자를 반은 가지고 태어난 6살 아들도 춤 추는 걸 좋아하는 흥을 가지고 있었다. 어설프고 귀여운 아들의 무대를 시작으로, 다음 조카의 댄스 무대 차례였다. 대여섯명의 가족이 우리 옆으로 지나가자 조카가 쭈뼛대며 말했다

"저기 옆에 지나가는 사람들 다 가면 출까요?"

나는 말했다.
"저 사람들이 보면 더 멋있다고 생각할텐데~? 렛츠고!!"

예의상 약간의 망설임을 보인 조카는 이제 춤을 추기 시작했다. 댄스 학원을 다닌 것도 아닌데, 기가 막히게 안무를 외우고 있었다. 여유있게 리듬을 탔고, 그 사이에 도도한 표정의 디테일도 있었다.
시원하게 뻗은 초록색 풀밭, 도시 생활에 생경해진 평창의 하늘색 하늘, 그 가운데 남들의 시선을 잠시 잊은 조카의 힘찬 춤동작. 그림같은 장면에 나는 연신 셔터를 누르지 않을 수 없었다.
순수한 동심은 그렇게 자연에 잘 어우려져 마치 일부분 이 된 것 같았다. 노래가 끝나고 조카가 한마디 했다.

"이제 고모부 차례예요~"

오마이갓... 조카에게 남에 시선이 어떠냐며 흥을 부추긴 나는 빠져 나갈 구멍이 없었다. 아주 소심하게 리듬을 타 보았다. 왕년에 댄스동아리 공연도 하던 나였는데.. 흥은 누구보다 뒤지지 않는데..
소심하게 들썩이는 어깨와 스텝은 영락없는 부장님의 회식자리 춤사위였다. 각종 관절은 15도 이상 펴지지 않는다. 뭐가 그리 부끄러운지 혼자서는 추지 못하고, 결국 조카와 아들 손을 잡고 덩실덩실만 했다.

음악에 맞춰 팔 다리를 뻗어본 게 언제인가. 무엇이 나의 행동 반경을 이리도 좁게 만들었나. 그것은 40으로 시작하는 나이의 숫자, 하루종일 직업이라는 역할 놀이를 하며 나에게 고정되버린 틀, 남들은 대수롭지 않게 지나가 버리지만 나 혼자 지레 겁먹고 나를 억제시키는, 내가 만든 남들의 시선일 것이다.
아이들과 춤추는 아저씨를 보면, 지나가는 사람들은 좋은 아빠로 볼 수도, 실성한 아저씨로 볼 수도, 춤 좀 추는데?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뭐가 됐든, 남들은 웃음 한번 짓고 지나가고 그만일텐데.
이렇게 소심해진 나, 그리고 잠깐 케데헌으로 빙의한 조카를 보고 여러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리도 중요하게 생각했던 자유란 가치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인문학 책에서 찾는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정치인이 말하는 허황된 구호나, 거리에 나와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들며 외치는 것도 아니었다.
그 것은 목적지 없이 신나서 푸른 들판을 뛰어다니는 아들의 발걸음에 있었다. 아무것도 신경쓰지 않고 춤을 추며 순간에 충실한 조카의 춤 동작에 있었고, 뻗고 싶은 만큼 쭉쭉 뻗는 조카의 두 팔에 있었다.

예전 아들이 두살때 우연히 들리는 락음악을 듣고, 몸을 흔들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여러 지역 축제의 무대 앞에는 초대가수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동네 아이들의 춤사위가 펼쳐진다. 그런걸 보면 춤이란 건 감정을 갖는 인간의 본능이 아닌가 싶다.
아이들의 이 순수한 표현의 본능이 입시지옥을 거치며 잊혀질까봐.. 성인이 되면 체면과 시선에 그 본능을 잊고 살까봐 걱정된다. 내가 그래왔듯이.

조카는 케데헌 음악에 맞춰 하늘로 쭉 뻗은 손바닥같이 꿈을 펼칠 수 있기를.. 조카가 커가며 만날 세상이 노래 제목 golden 처럼 늘 금빛만은 아니겠지만, 항상 자기가 소중한 존재인 걸 기억하며 자라기를..바래본다.

내가 잊고 있던 학창 시절의 꿈을 조카에게서 봤다. 막연하게 갈구하던 자유라는 소중한 것을 조카에게서 배웠다. 올 여름날 중 가장 시원했던 하루, 평창에서 케데헌의 여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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